[유경종 기자의 하루여행] 원당1구역 골목길 산책

사람들 떠난 골목길 지키고 있는 나무들  
보아주는 이 없어도 화사한 단풍잔치 펼쳐
철거공사 시작되면 가장 먼저 제거될 운명
나무가 지켜봤을 골목 이야기 궁금해지네 

주교동 원당1구역 대당맨숀과 은하아파트 사이의 골목길.
주교동 원당1구역 대당맨숀과 은하아파트 사이의 골목길.

[고양신문] 골목길마다 오밀조밀 붙어 자란 나무들이 울타리 너머로 가을 맵시를 자랑한다. 울긋불긋 앙증맞은 애기단풍, 눈부시게 화사한 은행나무, 커피색 잎으로 갈아입은 목련나무가 야트막한 연립주택단지와 어우러져 느긋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담벼락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어야 할 주차 차량의 행렬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오가는 사람들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마을 전체가 텅 비었다. 

이번 가을이 자신들이 누리는 마지막 계절이라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걸까. 원당 골목길 나무들의 단풍 잔치가 유난스레 찬란하다. 

대당맨숀 아파트단지 마당의 작은 나무그늘 쉼터.
대당맨숀 아파트단지 마당의 작은 나무그늘 쉼터.

가장 먼저 택지개발 진행된 연립주택단지  

원당1구역 재개발 사업에 수용되는 지역은 원당로와 마상로, 그리고 마상공원과 원당초등학교로 둘러싸인 주택단지다. 이 동네는 고양에서 가장 먼저 택지개발이 진행된 동네이기도 하다. 수도권의 인구가 팽창하던 1970년대 후반, 고양군청이 자리한 원당 일대의 드넓은 채소밭이 주교동 주거지구와 성사동 상업지구로 개발됐다. 

하지만 고양군 으뜸 주거지역이라는 원당 주택가의 자부심과 위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90년대 초부터 일산과 화정, 행신, 중산 등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차례차례 들어서며 원당 주교동과 성사동은 하루아침에 ‘구도심’으로 격하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당골목은 설계에 따라 조성한 균형 잡힌 주거단지로서의 품위를 여전히 잃지 않고 있다. 격자형으로 반듯하게 그려진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수십 년 전 도심 변두리 가옥의 보편적 형태였던 3~5층 높이의 저층 빌라와 연립주택들을 종류별로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재미를 배가시켜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나무 구경이다.  

아이들이 떠나버린 미도아파트 놀이터.
아이들이 떠나버린 미도아파트 놀이터.

비틀리고 잘려도 꿋꿋히 버틴 적응자들

원당 골목길의 나무들이 뿌리 내린 공간은 무척 협소하다. 빌라나 연립주택의 건물과 담장 사이 좁은 화단이 이들에게 부여된 유일한 영토다. 하지만 놀라운 적응능력자인 나무들은 양지를 찾아 몸통을 비틀기도 하고, 한정적으로 내리쬐는 햇살을 나눠 받기 위해 바로 옆 나무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기도 하고, 웃자란 가지들이 수시로 잘려지는 숙명도 담담히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지분을 알뜰하게 확보해냈다. 

어떻게 보면 원당 골목의 나무들은 그 골목에 터 잡고 살아온 이들의 삶을 고스란히 닮은 것도 같다. 매일 아침 기차나 버스에 올라 서울에 있는 직장으로 출근을 하고, 가성비 좋은 식재료를 고르는 눈썰미로 장바구니를 채우고, 한 푼 두 푼 저축해 가족들과 몸을 누일 작은 빌라 한 칸 마련하는 데 성공한 장삼이사의 이웃들 말이다.
그렇게 40여 년을 함께 한 이들과 앞으로도 오래도록 동행할 줄 알았는데, 결국 사람들이 먼저 훌쩍 떠나버리고 나무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현대맨숀 현관을 호위하는 단풍나무.
현대맨숀 현관을 호위하는 단풍나무.

2000여 가구 떠나가고 올 겨울 공사 개시 

2000년대 중반 이후 고양시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된 재개발 계획 중 하나로 출발한 원당1구역 재개발 사업은 논의가 시작된 지 무려 15년 만에 가속도를 붙일 수 있었다. 몇몇은 변화가 싫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다 나은 삶을 약속하는 목소리애 흔쾌히 마음을 실었다.

철거가 예정된 지역에는 빌라, 연립, 아파트, 주택, 맨션 등의 이름을 단 건물들이 모두 150여 동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2000여 가구, 6000여 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북적였다. 하지만 현재는 주민들이 대부분 떠나가 사업구역의 공실률이 95%를 넘겼다. 올해 안에 이주가 마무리되면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고, 2026년 2600세대가 입주하는 아파트단지로 변신하게 된다.    

영흥아파트 화단의 목련나무.
영흥아파트 화단의 목련나무.

조경수로서 상품 가치 없어 “일괄 제거”

골목을 산책하는 이에게는 나무들이 낭만적 감상의 대상이지만, 공사를 시작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건물 옆 나무들은 본격적인 건물 철거에 앞서 가장 일찍 제거해야 하는 방해물일뿐이다. 재개발사업 관계자는 “수목 제거 작업은 겨울에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조만간 가장 먼저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봄 터파기를 하려면 미리 땅속에 묻힌 나무뿌리까지 깔끔하게 캐내야 한다. 

쓸만한 조경수들을 필요한 곳에 옮겨 심을 수는 없는 걸까. 공사 당사자들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돈이 되지 않아요. 상품 가치도 없고, 옮기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그냥 싹 베어버리는 방법밖에 없어요.”

하긴 그렇다. 지금 서 있는 나무들이 나름 아름다워 보이는 건 배경이 되는 건물과 한 몸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건물과 따로 떼어 바라보면 몸통은 쏠리고 가지는 비틀린 볼품 없는 나무만 남게 된다.

미도아파트 놀이터의 그네.
미도아파트 놀이터의 그네.

한 곳에 뿌리내리고픈 정주의 욕망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든 평생을 살며 몇 차례 사는 곳을 옮긴다. 개별적으로 이사를 떠나기도 하고, 원당1구역처럼 이웃들이 한꺼번에 이주하기도 한다. 이주를 숙명처럼 안고 사는 이들이 짊어지고 가지도 못하는 나무를 굳이 좁은 마당 한쪽에 들이는 까닭은 뭘까. 

실용적으로는 경관과 그늘 확보 등의 이익이 있겠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를 추측해보면 나무처럼 한 곳에 오래도록 정주하고픈 욕망이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삼화하이츠빌라 벽을 감싼 단풍나무.
삼화하이츠빌라 벽을 감싼 단풍나무.

나이테마다 저장된 골목길의 이야기 

기자는 지난 2년간 가끔씩 원당 골목길을 일부러 산책하곤 했다. 누군가는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고, 별다른 보존 가치도 없는 변두리 연립주택마을에 뭘 그리 애착을 갖냐며 핀잔을 보내기도 했다. 따져보면 맞는 말이다 그렇다. 80년대에 조성된 변두리 마을이 한둘이 아니고, 소규모 주택업자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뚝딱뚝딱 지어 올린 건물에 특별한 건축적 가치나 미학이 담겼을 리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에는 어떤 형태로든 고유한 이야기가 쌓이게 마련이다. 특히 주교동 주거단지처럼 마을 구성원들이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규모의 주택에 입주해 40여 년을 함께 살다가, 동일한 시기에 이주하는 경우라면, 함께 공유한 이야기의 교집합이 나름 흥미롭지 않았을까. 또한 비슷한 듯 서로 다른 빌라 건물들 역시 당대의 특징과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한번 사라지면 다시는 만나보지 못할 풍경이 아닐까. 

그 삶의 재미난 이야기와 정겨운 풍경들을 나이테 사이사이에 저장했을, 원당 골목길을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는 나무들에게 자꾸만 눈길이 가는 이유다.

삼림아파트 울타리의 나무들.
삼림아파트 울타리의 나무들.
삼림아파트 마당을 수놓은 단풍잎들.
삼림아파트 마당을 수놓은 단풍잎들.
장미3차 아파트 마당의 등나무쉼터.
장미3차 아파트 마당의 등나무쉼터.
삼일맨숀 담장을 덮은 나무들.
삼일맨숀 담장을 덮은 나무들.
장미3차 아파트단지의 등나무 쉼터.
삼화하이츠빌라 담장을 물들인 아기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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