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생각·고양신문 특별강연

강연 중인 박영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강연 중인 박영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박영신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하벨 정치철학과 한국 시민사회’


[고양신문] 오늘날 한국 정치에는 ‘사람’이 없다. 우리 편, 너네 편(?) 같은 ‘집단’은 뚜렷하나,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의 의미가 희미해지고 있다. 개개인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집단으로 묶어 매도한 선동 끝엔 분노만 남을 뿐이다. 지난 몇 년간의 편 가르기 정치는 혐오를 양분 삼아 지역·젠더·세대 갈등으로 피어났고, 갈등의 악취 속에서 미래세대의 희망은 시들어버렸다. 최근들어 시민들이 정치권에 느끼는 답답함은 무책임한 일반화 속에서 ‘개인의 도덕’을 무시한 사회를 향한 권태일 것이다.

약 반세기 전, 유럽의 심장 체코 프라하에서도 비슷한 염증을 호소한 남자가 있었다. 바로 체코의 전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 대중에겐 극작가·운동가로 유명한 그이지만, 그 일생을 살펴본다면 시민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린다. 집단을 강요한 국가권력에 맞서 ‘개인의 도덕’을 존중한 시민인 그가 세상을 향해 외친다. 

“제게 정치는 이데올로기나 이념이 아닙니다. 정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행위도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정치는 세계를 책임지고자 하는 개인의 도덕에 근거합니다.” 하벨 전 대통령은 ‘한 사람’의 도덕이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강조한다. 그에게 정치란 일부 권력자들의 싸움터가 아닌 모든 시민 개개인의 도덕·진리·가치가 모이는 열린 공간이다. 그가 주도한 ‘벨벳혁명’은 각자의 도덕을 지켜내려던 힘 없는 개인들이 뭉친 이른바 ‘실천도덕으로서의 정치’의 결과였다. 

오늘날 정치에 질려버린 우리는 하벨로부터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까? 하벨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박영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의 강연 주요내용을 정리한다.  

지난 18일 사과나무치과병원 7층에서 열린 ‘하벨의 정치철학과 한국의 시민사회’ 특별강연회에서 의견을 주고 받는 참석자들.
지난 18일 사과나무치과병원 7층에서 열린 ‘하벨의 정치철학과 한국의 시민사회’ 특별강연회에서 의견을 주고 받는 참석자들.

고양신문·시민의생각이 공동 주관한 지난 18일 열린 강연회에서 박영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오늘날 한국 사회를 돌이켜보면 시민의 자율성·독자성 같은 당당함이 빈약한 것 같다”라며 “하벨을 공부하며 시민의 힘을 깨닫고, 우리 주변의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 품어온 ‘도덕’과 ‘진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강연은 김훈 소설가, 정범구 전 주독일대사, 문은희 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장 등 고양시민들이 한데 모인 열띤 토론의 장이었다.
 
패배 속 지켜낸 ‘시민의 당당함’
1936년 체코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하벨의 유년기는 ‘패배’의 연속이었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시작된 나치 독일의 지배와 종전 후 이어진 체코 공산당의 압제는 그에게 권력에 대한 불신과 상처를 남겼다. ‘북쪽의 로마’라는 별명을 가진 유서 깊은 예술 도시, 프라하 출신인 그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부르주아 집안이라는 출신성분 때문에 극장 무대기술자로 내몰렸다.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벨은 잇따른 패배에 굴복하긴커녕 어깨너머로 연극을 공부해 마침내 『뜰의축제』와 『비망록』이라는 희곡으로 대중에 이름을 알린다. 이때 그는 굴복하지 않는 시민의 ‘당당함’을 배워나갔다. 그가 극작가로서의 명성을 뽐내던 60년대 초,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주의의 한계로 장기 침체를 겪고 있었다. 이를 인식한 서기장, 알렉산데르 둡체크는 1968년 독자적인 민주화와 경제개혁을 단행한다. 소련에 대항한, 시민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사진 왼쪽에서부터)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 프라하의 봄 현장.
(사진 왼쪽에서부터)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 프라하의 봄 현장.

그러나 소련에 반기를 든 대가는 참혹했다. 소련을 위시한 바르샤바 조약군이 체코를 침공했고, 이에 저항한 체코 시민 186명이 사망·362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그간의 노력은 소련의 ‘정상화 정책’ 아래 모두 수포가 되었다. 이날의 범시민적 저항을 우리는 ‘프라하의 봄’이라고 부른다.

‘프라하의 봄’은 체코 민주주의의 좌절이었으나, 하벨 개인에게는 정치가로서 첫 데뷔였다. 박영신 교수는 “프라하의 봄 한가운데에서 하벨은 사회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배제된 소련식 사회주의를 반대했습니다. 이웃과 사람에 대한 관심을 사회주의라고 정의 내린다면 그런 사회주의를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라고 덧붙였다. 이날의 프라하 저항은 그가 정치가로서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한 첫 순간이었다.

체코를 프라하의 봄 이전으로 회기시키려는 소련의 ‘정상화’ 기간에도 하벨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1977년, 하벨을 필두로 한 지식인, 예술가들은 록그룹 ‘플라스틱 피플’의 투옥을 계기로 인권 향상 및 표현의 자유를 촉구한 ‘77헌장’을 발표한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품은 77헌장은 체코 민주화 운동의 주역인 ‘시민 포럼’의 단초가 되었고, 그는 국가전복죄로 투옥되지만, 당을 제외하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 약 10년이 지난 1989년, 체코 시민들과 하벨은 이른바 ‘벨벳혁명’ 속에서 하나 되어 무혈 정권교체를 이뤄낸다. 프라하의 봄 이후 20년간 버텨온 압제의 끝이었다
 
눈앞의 현실 아닌, 그 너머 진리 향해
박영신 교수가 말하는 다른 정치인에겐 없는 하벨만의 독특한 색깔이 있다. 바로 ‘예술을 통한 정치’. 오랜 극작가로서의 경험 덕인지 하벨은 당장의 현실뿐 아니라 예술가적 시각으로 이상을 추구했다. 

참석자와 의견을 나누는 박영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참석자와 의견을 나누는 박영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박 교수는 “작가는 현실감만으로 사는 사람이 아닌 그 이상의 높은 가치를 좇는 사람”이라며 “하벨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양분화된 세계에서 예술을 통한 새로운 가치를 제시했다”라고 밝혔다. 즉 눈앞의 소비 문명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너머에 자리잡은 시민 공통의 ‘진리’를 추구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박 교수는 하벨이 주창한 ‘진리’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닌 오랜 역사에 걸쳐 체코 시민들이 고민해 온 결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약 100년 앞서 체코의 신학자 얀 후스는 부패한 가톨릭을 비판하며, “모든 이가 진리에 이르기를 소망하라”라는 말을 남겼다. 박 교수는 이런 후스의 가르침이 얀 코메니우스, 마사렉 초대 대통령 등을 거쳐 하벨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얀 후스부터 하벨까지, 역사 속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사람들은 시민 개개인의 진리와 도덕추구를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왔다”라며 “다만 한국은 역사 속에서 시민들 개개인의 진리를 존중하고 공유하려는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아쉬움을 보였다.
 
진흙탕 정치판, 시민사회가 바꿔가야
하벨에 대한 긴 소개를 마친 박영신 교수는 정치권이 변하기 위해선 시민사회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먹고사는 의식주의 문제를 넘어 진리를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시민 사이의 ‘감수성’을 강조했다.

박 교수는 산황산 골프장 증설 문제 해결에 대해 “잘못된 행정에 대항해 목소리를 낸 것은 인근 주민뿐이었다”라며 “집값 같은 이해타산의 문제에만 촛불 들고 일어날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 바로 하벨이 말한 진리일 것”이라고 말했다. 진리를 추구하는 시민의 연대가 있어야, 진영논리로 얼룩진 정치권이 비로소 ‘사람’과 ‘이웃’을 바라볼 수 있다는 의견이다.

(사진 왼쪽에서부터) 정범구 전 주독일대사, 김훈 소설가, 문은희 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장.
(사진 왼쪽에서부터) 정범구 전 주독일대사, 김훈 소설가, 문은희 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장.

이날 정범구 전 주독일대사는 “현재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진영논리는 극단주의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라며 “해방 직후 여운형, 김구를 위시한 중도파를 중심으로 공동의 ‘진리’를 추구할 기회가 있었으나, 좌우 극단의 폭력적인 목소리에 묻혀 소멸했다. 박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체코식 ‘실천도덕’이 현재까지 내려오지 못한 점은 아쉬울 뿐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마이크를 잡은 김훈 소설가는 “오늘날 야당은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여당도 보수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가치’를 좇지 않는 한국 정치계는 당파성 때문에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익환 목사의 동생이자 사회운동가인 문은희 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장은 “진영, 당파 등의 이야기는 집안에도 존재한다. 가족이 되었든, 사회가 되었든 핵심은 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는 진리”라며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내로남불식’ 사회·가정 문제들은 대부분이 공통된 진리가 없어 생긴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하벨을 공부하며 시민사회가 먼저, 정치권이 차례로 진리를 찾아 나서길 희망한다”라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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