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모임 중독자의 고백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

[고양신문] 작년에 시작한 <영국 문학 완독 클럽>에서 시대순으로 영국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있다. 이번에 읽은 작품은 『위대한 유산』. 도대체 얼마나 가치 있는 유산이기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까 궁금해하며 읽어 갔다. 

19세기 영국, 중산 계급은 물질적 부의 축적을 바탕으로 급성장한다. 이들은 정치·경제적으로 사회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세습 귀족 계급에 맞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들은 귀족 계급이 갖추고 있던 자질과 중산 계급에서 중시하는 도덕적 덕목을 합쳐 ‘신사’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 ‘영국 신사’의 이미지는 아마도 이때 만들어진 듯하다. 하지만 결국 신사 계급도 재산과 신분이라는 외적 요소에만 집중하게 되면서 속물 계급으로 전락한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이러한 변질된 신사 개념을 반영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신사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또는 “신사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당시 영국은 제국주의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주인공 핍과 그의 친구 허버트가 이집트 카이로에서 성공하게 된 배경과 매그위치가 유배지에서 성공하여 핍의 후원자가 된 배경도 모두 이에 기인한다. 결국 ‘신사’라는 지위의 배경에는 식민지를 소유하여 물질적 부를 이루는 것을 바탕으로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신사는 직접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식민지에서 피땀 흘려 일한 사람들의 공헌 덕분에 계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자 그대로 ‘위대한 유산’은 오직 본인의 노동으로 재산을 일구어 백만장자가 되고 도덕성까지 갖춘 신사의 지위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반어적인 뉘앙스를 띠고 있을 수도 있다. 원제 역시 Great inheritance가 아니라 Great expectations이다. ‘막대한 유산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라는 뜻으로 읽힌다. 실제로 가난한 집안의 핍은 유년 시절부터 막연하게나마 자신이 후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다. 지금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유산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금덩이가 아니라 석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핍이 깨닫게 되는 과정이 나는 불편했다. 왜냐고? 나 역시도 한때 그런 막대한 유산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유산’의 기대 때문에 자신이 가장 의지했던 매형 조를 외면하고 싶어 했던 핍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결혼을 하고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생활에 놓인 나는 과거를 통째로 잃어버렸다. 특히 10대부터 20대까지. 사건뿐 아니라 상황,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 덕분인지 이제는 무의식중에도 오래된 과거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가장 초라했던 시기에 의지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오랜만에 다시 만나면 무조건 반갑기만 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내 과거를 떠오르게 하는 그들과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 ‘그땐 그랬지’ 하고 웃고 떠들며 과거를 반추할 용기가 나에겐 없다. 내게 3년 내내 힘이 되어 주었던 친구가 고3 졸업식 때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을 때 반가움보다 당혹감에 얼굴을 붉혔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무 살이 되고 대학에 합격한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그것만으로 나는 3년의 부끄러움에 안녕을 고하고 싶었나 보다.

그 후로 내가 ‘대한민국의 신사’가 되지 못한 것은 위대한 유산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 노력이 담기지 않은 위대한 유산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뭔가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런 막연한 기대. 그러면서 그저 버티고 버티면서 나의 이런 처지를 원망만 했던 것 같다. 

김민애 출판편집자
김민애 출판편집자

아마도 핍은 중산 계급에 속하지 못할 것이다. 영국 신사가 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지역에서 꽤 괜찮은 중년 남자로 늙어 갈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질 진짜 위대한 유산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내 주위에 ‘위대한 사람이라는 유산’이 있는 것처럼 그에게는 조도 있고 비디도 있고, 에스텔러와 허버트도 있다. 결국 사람이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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