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본 세상
『우리가 케이크를 먹는 방법』(김효은 지음, 문학동네)

박미숙 『그림책은 힘이 세다』 저자
박미숙 『그림책은 힘이 세다』 저자

[고양신문] “정확히 같은 크기로 열세 조각을 내야 합니다.”
직원이 여럿인 도서관에서 일할 때 한 달에 한 번 생일 케이크에 초를 켰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고 나면 생일을 맞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미션이 있었다. 그날 일하는 직원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평등하게 케이크를 자르는 일. 그나마 짝수면 자르는 게 수월한데 홀수가 되면 모두의 눈이 빵칼을 든 사람의 손끝으로 향한다.

그러다 어느 날 누군가 말했다. 
“난 생크림 싫어하는데 작게 잘라주면 안 되나요?”
“내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인데, 요 쪽 딸기가 있는 쪽으로 잘라주세요.”
크기를 동일하게 자르고 나눠먹는 ‘평등’의 문화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평등한 사회’를 꿈꿔왔다. 남녀차별이 없이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는 세상을 바랐고, 모두에게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도록 의무교육을 강화하는데 힘을 썼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하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정치인 말에 훅 끌리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틈인가 과연 무엇이 ‘평등’일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늘 똑같이 나누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주어진 시간’만 같을 뿐 시작의 조건이 다른 사람들이 ‘경쟁’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새 ‘노력한 대가’라는 말로 모든 결과를 판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2023년 서울대 신입생 10명 중 4명은 서울 출신이고, 한 해 등록금이 1000만 원 수준인 특목고나 자사고 졸업생이 서울대 신입생 10명 중 4명으로 집계되었다는 보도만 보아도 경제적 배경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짓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2023. 10. 09 TV조선 보도 인용)

다르게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배고픈 사람과 배부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케이크의 크기가 달라져도 괜찮고, 돈이 많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달라져도 괜찮다. 저울의 중심을 맞추는 방법은 같은 무게의 추를 놓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게가 다른 접시에 다른 추를 놓는 것이라야 한다. ‘치우치지 않고 고르다’는 뜻의 ‘공평’이 더 크게 쓰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평평하게 만드는 것’은 기울어진 쪽을 더 많이 돋우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니까. 

물론, 이러한 ‘공평’이 확산되려면 다르게 나누는 것이 가능해야 하고 그렇게 나누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경쟁에 아이들을 밀어 넣고 우리 스스로를 밀어 넣으면서 ‘열심히 해서 이기는 것이 진리’처럼 살아왔으니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림책 『우리가 케이크를 먹는 방법』(김효은 지음, 문학동네)에는 다섯 명의 아이들이 나온다. 다섯 명의 아이들은 무엇이든 다섯으로 평등하게 나누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우유도 200ml씩, 문어과자도 숫자를 세어 5등분 한다. 킥보드를 24분씩 나누어 타기로 한 어느 날, 둘째(둘째로 예상된다)가 넘어져 다쳐 병원으로 가게 된다. 남은 아이들은 다친 아이의 시간까지 다시 나눠 타지만 자기 몫이 늘어나는 게 늘 좋은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깁스를 한 아이와 부모님은 케이크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오고, 케이크를 똑같은 크기로 자른다. 케이크 위 올려진 여섯 개의 딸기도 여느 때처럼 하나씩 나누고 나머지는 하나는 다섯 조각으로 잘라 나누게 되는데, 아이들은 다섯 토막으로 쪼개진 딸기를 다친 아이 접시에 슬그머니 놓아준다. 다들 웃으며 사진을 찍는다. 

다 같이 사는 것이 다 같이 웃는 것이다. 그러려면 내 접시에 놓일 딸기 조각을 다른 사람 접시에 놓아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아니 처음부터 내 접시에 딸기 조각이 놓이지 않아도 된다. 더 필요한 누군가가 있을 테니.

자, 이제 우리도 케이크를 잘라보자. 어떻게 나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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