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신문여행학교 8월23~28일
내몽골 역사·문화·생태여행

쿠부치사막~오르도스 초원 탐방
칭기즈칸과 왕소군의 흔적 따라
충돌과 공존의 역사 되짚어

관광객들이 내몽골 쿠부치사막에서 낙타타기 체험을 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내몽골 쿠부치사막에서 낙타타기 체험을 하고 있다. 

[고양신문] 북방의 초원과 중국의 농경세계는 어디에서 만났을까.
지난달 23일부터 28일까지 중국 내몽골자치구 일원에서 진행된 ‘고양신문 여행학교’ 내몽골 역사·문화·생태여행은 이 질문을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22명의 참가자들은 후허하오터(呼和浩特·호화호특)를 출발해 음산산맥과 쿠부치사막, 오르도스 초원, 황허를 지나 칭기즈칸릉과 왕소군묘를 찾았다. 차창 밖으로 초원과 사막이 번갈아 모습을 드러냈고, 산맥 아래로 황허가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초원과 농경세계를 가른 음산산맥
24일 아침 후허하오터를 출발한 전세버스가 쿠부치사막을 향해 달렸다. 잘 닦인 한산한 고속도로 왼쪽으로 끝없이 초원이 펼쳐졌고, 오른쪽으로는 험준한 음산산맥이 길게 이어졌다.
내몽골 중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음산산맥은 북쪽의 몽골고원과 남쪽의 황허 유역을 가르는 중요한 지형이다. 산맥 남쪽에는 황허가 크게 굽이쳐 흐르는 오르도스 지역이 자리한다. 지금의 풍경은 한없이 평화로웠지만, 오래전부터 이곳은 긴장이 흐르던 땅이었다.
몽골고원 일대에서 남하한 초원 세력들은 고비사막을 넘어 음산산맥과 오르도스, 황허 일대에서 중국의 농경국가와 마주했다. 때로는 전쟁이 벌어졌고, 때로는 교역과 혼인이 이루어졌다. 목축과 농경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군사와 사람의 이동도 끊이지 않았다. 중국 왕조의 입장에서는 오르도스와 음산산맥 일대가 북방 세력의 남하를 막아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내몽골 쿠부치사막에 각종 관광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내몽골 쿠부치사막에 각종 관광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고양신문여행학교 회원들이 신발 위에 긴 양말을 신고 사막을 체험하고 있다.
고양신문여행학교 회원들이 신발 위에 긴 양말을 신고 사막을 체험하고 있다.

사막 가운데 들어선 거대한 테마파크
후허하오터를 출발한 지 약 3시간. 버스가 쿠부치사막 남쪽의 샹사완에 도착하자 풍경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황허 북쪽을 따라 동서로 길게 펼쳐진 쿠부치사막은 황허의 큰 굽이와 맞물려 독특한 지형을 이룬다. ‘쿠부치’는 몽골어로 ‘활시위’를 뜻한다. 황허가 감싸 흐르는 오르도스 고원 북쪽을 따라 사막이 길게 휘어진 모습에서 이름이 비롯됐다.
샹사완(響沙灣)은 ‘소리 나는 모래’라는 뜻이다. 모래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가거나 모래를 움직일 때 독특한 소리가 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국가 5A급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사막 한가운데 각종 체험시설이 들어섰다. 낙타를 타고 모래언덕을 가로지르거나, 사막용 차량과 오토바이를 타고 모래사면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케이블카를 타고 모래바다를 건너는 관광객들로 곳곳이 북적였다. 사막은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언덕 사이로 관광시설이 들어서 자연과 인공의 풍경이 겹치는 독특한 풍경이었다.
쿠부치사막은 모래만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다. 모래언덕 사이와 가장자리에 초지와 관목지, 습지 등이 나타나고 건조한 환경에 적응한 식물들이 뿌리를 내린다. 이 식생은 곤충과 파충류, 포유류의 서식처가 된다.
사막화 또한 자연현상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기후와 강수량, 바람과 지형 같은 자연조건에 더해 과도한 방목과 토지이용 등 인간의 활동이 식생 훼손과 사막화 확대에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쿠부치에서는 사막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사막화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고 식생을 복원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태양광 발전과 사막 복원을 결합한 사업도 추진 중이다. 

관광객들이 내몽골 쿠부치사막에서 낙타타기 체험을 하고 있다. 오르도스초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고양신문여행학교 회원들. 오르도스초원에서 펼쳐진 몽골인의 마상공연. 몽골인들이 성지로 여기는 칭기즈칸릉 내부 모습. 왕소군과 흉노 호한야 선우가 나란히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의 동상.
오르도스초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고양신문여행학교 회원들. 
​ 두 여행객이 광활한 오르도스초원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두 여행객이 광활한 오르도스초원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황금빛 모래언덕이 초록빛 초원으로
사막 한가운데 지붕이 열리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탐방단은 다음 날 오르도스 초원으로 향했다. 버스가 1시간30분가량 달리자 전날까지 이어지던 황금빛 모래언덕이 초록빛 초원으로 바뀌었다. 사막과 초원이 맞닿은 경계지대에서는 황허 유역의 생태환경을 보호하고 사막화를 막기 위한 복원사업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초원에 도착하자 몽골식 환영 의식이 탐방단을 맞았다. 푸른색 비단 목도리를 두 손으로 정중하게 건네고, 이어 술을 권했다. 몽골문화에서 푸른색은 하늘과 연결되는 상징성을 갖는다. 손님에 대한 존중과 평안한 여행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황허가 크게 감싸안은 오르도스는 자연환경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사막과 초원, 강과 습지, 농경지가 가까운 거리에 공존하는 이곳은 흉노를 비롯해 선비·돌궐·거란·몽골 등 여러 북방 세력의 활동 무대였다. 오르도스 초원은 이러한 유목문화를 관광과 결합해 보여주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내몽골 쿠부치사막에서 낙타타기 체험을 하고 있다. 오르도스초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고양신문여행학교 회원들. 오르도스초원에서 펼쳐진 몽골인의 마상공연. 몽골인들이 성지로 여기는 칭기즈칸릉 내부 모습. 왕소군과 흉노 호한야 선우가 나란히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의 동상.
오르도스초원에서 펼쳐진 몽골인의 마상공연. 
오르도스초원에서 펼쳐진 마상공연 '영웅' 의 한 장면.. 
오르도스초원에서 펼쳐진 마상공연 '영웅' 의 한 장면.. 

이날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마상공연이었다. 기마병들이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눕히고, 말 위에 서서 질주했다. 활을 쏘고 무기를 휘두르는 장면이 이어졌고, 두 마리의 말 사이를 오가며 전투를 재현하는 장면에서는 객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공연 <영웅>은 몽골 초원에서 발달한 기마문화와 공동체의 이야기를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줬다. 유목민에게 말은 이동수단을 넘어 생존과 전투, 교역의 핵심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이어 초원 썰매와 꼬마열차를 타고 초원 깊숙이 들어가 서커스를 관람한 뒤 게르에서 만찬이 이어졌다. 몽골 전통악기인 마두금 연주와 민속공연이 펼쳐지고, 여행객들의 흥도 더해지면서 초원의 밤은 깊어갔다. 

관광객들이 오르도스초원 공연장에서 손을 마주 잡고 몽골의 전통놀이를 즐기고 있다.
관광객들이 오르도스초원 공연장에서 손을 마주 잡고 몽골의 전통놀이를 즐기고 있다.

오르도스에서 칭기즈칸을 만나다
다음 날 찾아간 곳은 오르도스시에 자리한 칭기즈칸릉이었다.
오르도스의 칭기즈칸릉은 칭기즈칸의 영혼과 유물에 대한 몽골인들의 제례 문화가 이어지는 중요한 성지다. 이날도 많은 몽골인들이 이곳을 찾아 제례를 올리며 칭기즈칸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이곳은 칭기즈칸의 유해가 묻힌 곳은 아니라고 한다. 1227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비밀리에 장례가 치러졌다는 전승이 있지만, 실제 무덤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칭기즈칸의 본명은 테무진이다. 12세기 몽골 초원은 여러 부족이 경쟁하고 충돌하던 시대였다. 어린 테무진은 아버지를 잃은 뒤 가족과 함께 극심한 고난을 겪었지만, 뛰어난 정치력과 지도력을 바탕으로 경쟁 부족들을 하나씩 통합해 나갔다.
1206년, 몽골의 여러 부족이 모인 회의에서 테무진은 대칸으로 추대됐고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몽골은 빠른 기동력을 갖춘 기마군과 조직적인 군사체계, 정보망을 바탕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었다. 
칭기즈칸의 후계자들에 의해 제국은 더욱 확대되어 13세기 중반에는 중국에서 중앙아시아와 이란, 러시아 초원지대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이 몽골계 국가들의 지배 아래 놓였다.
몽골제국의 역사는 정복과 파괴의 역사였다. 도시가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라시아의 광대한 지역이 하나의 정치·경제적 네트워크로 연결되면서 사람과 물자, 기술, 종교, 지식의 이동이 활발해지기도 했다. 역사가들이 몽골제국을 ‘전쟁과 정복’의 역사인 동시에 ‘교류와 연결’의 역사로 바라보는 이유다. 

관광객들이 내몽골 쿠부치사막에서 낙타타기 체험을 하고 있다. 오르도스초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고양신문여행학교 회원들. 오르도스초원에서 펼쳐진 몽골인의 마상공연. 몽골인들이 성지로 여기는 칭기즈칸릉 내부 모습. 왕소군과 흉노 호한야 선우가 나란히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의 동상.
몽골인들이 성지로 여기는 칭기즈칸릉 내부 모습. 

‘두 개의 몽골’은 왜 나뉘었을까
여행길에서 참가자들 사이에 자주 나온 이야기가 ‘두 개의 몽골’이었다.
오늘날 몽골은 북쪽의 독립국 몽골과 중국의 내몽골자치구로 나뉘어 있다. 두 지역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청나라의 몽골 지배와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 청나라의 붕괴와 20세기 초 국제정세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1911년 청나라가 무너진 뒤 외몽골에서는 독립 움직임이 본격화됐고,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이 성립하면서 오늘날의 독립국 몽골로 이어졌다. 내몽골은 몽골국과 통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현실화되지 못한 채 중국의 일부로 남았다.
여행 중 역사 이야기를 구수하게 풀어낸 재야사학자 이종선씨(만주뚜벅이)는 “몽골의 분리는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리적 조건과 정치·사회적 차이, 주변국의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오랫동안 사람과 문화가 오가며 이어져 있던 넓은 초원세계는 그렇게 서로 다른 정치적 공간으로 나뉘었다.

관광객들이 내몽골 쿠부치사막에서 낙타타기 체험을 하고 있다. 오르도스초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고양신문여행학교 회원들. 오르도스초원에서 펼쳐진 몽골인의 마상공연. 몽골인들이 성지로 여기는 칭기즈칸릉 내부 모습. 왕소군과 흉노 호한야 선우가 나란히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의 동상.
후허하오터 남쪽에 자리한 왕소군박물관..
왕소군과 흉노 호한야 선우가 나란히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의 동상.
왕소군과 흉노 호한야 선우가 나란히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의 동상.

왕소군, 초원과 농경세계를 잇다
여행의 마지막 날에는 후허하오터 남쪽의 왕소군묘를 찾았다.
칭기즈칸이 초원세력의 팽창과 정복을 상징한다면, 왕소군은 초원세계와 농경세계 사이의 평화와 교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박물관을 지나 남북으로 곧게 뻗은 신도를 따라가니 완만한 언덕처럼 솟은 왕소군의 무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총(靑塚)’이라는 별칭답게 무덤은 푸른 풀로 덮여 있었다.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 때의 궁녀였다. 기원전 33년 무렵 흉노의 지도자 호한야 선우가 한과의 관계 안정을 위해 혼인을 요청했고, 왕소군은 흉노로 가 호한야 선우의 아내가 됐다. 이를 계기로 한나라와 흉노 사이에는 상당 기간 평화가 이어졌다. 중국의 3대 미인으로도 꼽히는 왕소군 이야기는 중국 역사와 문학에서 오랫동안 전승되면서 한-흉노 화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한과 흉노의 관계는 왕소군 이전부터 전쟁과 화친을 반복했다. 기원전 200년 한 고조 유방이 흉노의 묵특선우에게 패한 뒤 한나라는 흉노에 비단과 곡물 등을 제공하고 혼인관계를 맺는 화친정책을 펼쳤다. 
사막과 초원이 만나는 곳에서 시작한 여행은 끝날 즈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경계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왔다. 고양시민 이동훈씨는 “전쟁과 교류, 충돌과 공존이 반복된 역사의 현장을 5일 동안 걸으며 경계란 나누는 선이 아니라 서로를 만나게 하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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