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용 방송물 제작 맡은
류남이 EBS 콘텐츠사업기획부 CP

연말까지 발달장애인 콘텐츠 30편 제작
고양신문 발달장애 기록, 콘텐츠 밑거름
자립·시설 아우르는 맞춤형 교육 콘텐츠
일상에서 배우는 ‘기다림’과 공존의 태도

류남이 EBS 콘텐츠사업기획부 CP는 “공영교육 콘텐츠는 좋은 내용을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질문하고 공감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자랄 수 있는 구조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제공 = 류남이 CP]
류남이 EBS 콘텐츠사업기획부 CP는 “공영교육 콘텐츠는 좋은 내용을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질문하고 공감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자랄 수 있는 구조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제공 = 류남이 CP]

[고양신문] 서울 동작구의 한 미용실. 어머니 손을 잡고 들어온 여학생이 정작 자기 차례가 되자 갑자기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고 했다. 어머니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원장은 가위를 잠시 내려놓고 차분히 말했다. “다음에 자를 거니까 얼마나 자르고 싶은지 생각하고 있어.” 옆자리 손님은 아이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이들은 태연하게 각자의 일을 이어갔다. 아이가 스스로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듯했다.

현장 기록이 방송 카메라 속으로
이 장면을 오래 눈에 담은 사람이 있다. EBS에서 발달장애인용 방송물 제작지원 사업을 맡고 있는 류남이 콘텐츠사업기획부 CP(Chief Producer)다. 그 미용실에는 발달 장애 자녀를 둔 어머니가 인천에서 두 시간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다고 했다. 아이의 돌발 행동을 이해하고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원장이 있기 때문이다. 류 CP는 그 자리에서 문득 발달장애인을 위한 콘텐츠가 다뤄야 할 무대가 교실이나 시설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류 CP가 콘텐츠의 방향을 고민하며 눈여겨본 것은 뜻밖에도 고양신문이 그동안 쌓아온 발달 장애 현장의 기록이었다. 시설 밖에서 ‘시민’으로 살아가려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 최중증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가 내가 세상에 없어도 아이를 안전하게 돌봐줄 ‘공간’을 절박하게 구하던 목소리. 자립이냐 시설이냐, 어느 한쪽으로 쉽게 손을 들어줄 수 없는 두 개의 진실을 오래 들여다본 고양신문의 기록이 그의 마음에 남았다는 것이다.

“EBS가 있는 고양의 지역신문이 발달장애인과 가족의 삶을 이토록 꾸준히 기록해 왔다는 사실이 반가웠습니다.” 그는 기획 의도만으로는 좋은 방송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현장에서 배웠다. 당사자와 가족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시설과 지역 사회는 어떤 어려움과 수요를 안고 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 이해의 토대를 그는 현장을 오래 지켜본 기록에서 구했다.

그 인연은 한 사람의 합류로도 이어졌다. 이 사업의 자문단에는 발달장애인 부모와 특수학교·고등학교 교사들이 참여하고 있었지만, 정작 시설의 눈으로 현실을 말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 빈자리를 중증장애인 거주시설 조이빌리지의 김미경 전 대표가 채우기로 했다. 20여 년 전 발달 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의 기도 모임에서 출발해, 최중증 성인 발달장애인의 주거 공동체를 끝내 일궈낸 바로 그 조이빌리지다. 오래전 고양신문의 지면에 담았던 이야기가 이렇게 공영방송의 카메라 속으로 걸어 들어온 셈이다.

장애인과 함께 사는 태도 익혀야
이번 사업은 시청자미디어재단이 주관하는 장애인 방송 제작지원 사업의 일환이다. EBS는 온라인·유튜브 기반의 발달장애인 교육 콘텐츠 브랜드 EBS 디딤돌을 통해 관련 콘텐츠를 만들어 왔고, 올해 역시 2026년 공모에 선정돼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목표는 연말까지 30편 시리즈를 제작하는 것이다.

콘텐츠의 결은 크게 둘로 나뉜다. ‘나 혼자 산다’ 형식으로 식품·가정 내 신체활동·가족과 함께하는 체조 등 자립 생활을 다루는 콘텐츠가 한 축이고, 예절과 의전을 다룬 기존 프로그램을 새롭게 엮은 콘텐츠가 다른 한 축이다. 바리스타 같은 직업 훈련처럼 실생활 기술을 익히는 내용도 담긴다. 이를 위해 박수경 작가, 강목련 PD, 연승민 PD가 발달장애인과 가족의 삶에 닿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함께 고민하고 있다. 발달 장애를 직접 겪은 가족이 제작진에 없어 초기에는 아이들과의 소통 방식부터 더듬어 찾아야 했지만, 오히려 그 낯섦이 이들을 현장으로 더 깊이 끌고 들어갔다.

류 CP가 현장에서 확인한 것은 필요가 결코 하나의 기준으로 묶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자립을 준비하는 분들에게는 일상생활과 지역 사회 이용을 돕는 정보가 필요하고, 중증 발달장애인과 가족에게는 안정적인 돌봄 환경과 반복 가능한 생활교육이 중요합니다. 발달장애인용 방송물은 하나의 기준으로 만들 수 없어요. 실제 삶의 조건을 세밀하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자립과 시설, 어느 한쪽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은 조이빌리지를 만나며 더 또렷해졌다고 했다. “자립을 강조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현실에는 시설의 보살핌이 꼭 필요한 이들이 여전히 더 많습니다. 제 생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조이빌리지를 보며 다시 배웠어요.” 이번 시리즈를 자립과 시설 생활을 함께 아우르는 방향으로 기획하게 된 이유다.

장애 당사자·가족의 존엄한 삶 중요
미용실 일화는 그런 고민 속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됐다. 발달장애인과 가족이 겪는 어려움은 특별한 장소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미용실·병원·대중교통·식당처럼 누구나 드나드는 일상의 공간에서 반복된다. “콘텐츠가 그런 장면을 다룰 수 있다면 당사자에게는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경험이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기다리고 함께할 수 있는지를 배우는 기회가 됩니다.” 발달장애인용 콘텐츠는 당사자만을 위한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가족에게는 이해와 준비의 시간이 되고, 이웃에게는 함께 살아가는 태도를 익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인터뷰 자리에서 이야기는 뜻밖에 노인 돌봄의 문제로 흘러갔다. 류 CP의 시아버님이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인데, 회복과 악화를 오가는 병상을 지키며 그는 ‘나의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됐다고 했다.

그 물음은 발달 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의 가슴 속에 있는 ‘내가 먼저 죽으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나’라는 불안, ‘자식보다 하루만 더 살다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오래된 하소연과 본질에서 맞닿아 있는 듯했다.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이를 곁에서 돌보는 일, 그리고 그 돌봄이 언젠가 자신의 손을 떠나야 한다는 예감. 발달 장애든 노년이든,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선다. 중요한 것은 시설이냐 탈시설이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당사자와 가족이 존엄하게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조건이라는 것을 그는 병실 앞에서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류남이 CP(오른쪽)와 콘텐츠 제작을 함께하는 연승민 PD. [사진제공 = 류남이 CP]
류남이 CP(오른쪽)와 콘텐츠 제작을 함께하는 연승민 PD. [사진제공 = 류남이 CP]

해석·판단은 질문·공감을 바탕으로
류남이 CP는 EBS 독립 후 첫 경영 부문 공채 1기로 입사했다. 35년간 기획예산부장과 온라인사업부장을 거쳐 방송사 최초의 종합정보시스템 구축, 직영출판사업 출범 같은 굵직한 전환점마다 실무를 이끌었고, 현재 콘텐츠 기획·제작 CP로 일하고 있다.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석사(최우수논문상)를 마치고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지난달 말 『AI 시대, 공영방송은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펴냈다. 직접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류남이 TV〉에도 AI·미디어·교육에 관한 생각을 기록해가고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한 문장으로 모인다. AI가 모든 답을 순식간에 내놓는 시대일수록 더 중요한 건 질문을 잃지 않는 인간이 필요하다는 것. “판단력은 근육과 닮았습니다. 쓰지 않으면 약해집니다. 그럴듯한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른 관점에서 다시 묻는 일을 생략할수록 판단하는 힘은 줄어듭니다.” 공영교육 콘텐츠 역시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한다. 좋은 내용을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질문하고 공감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자랄 수 있는 구조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발달장애인용 콘텐츠에 대한 그의 기준도 여기서 나온다. 

‘현장에 닿는 콘텐츠’라는 원칙은 발달 장애를 넘어 지역연계 교육으로도 이어진다고 그는 본다. 방송이나 플랫폼 안에서 좋은 콘텐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학교·도서관·복지기관·기업·문화공간과 연결될 때 비로소 실제 생활 속에서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고양을 가능성이 큰 도시로 꼽는다. 방송영상밸리와 한류월드를 품고 있는 고양시는 창의적인 문화 인재들과 훌륭한 인프라가 집약된 곳이라고 본다.

“공영교육 콘텐츠는 중앙에서 획일적으로 만들어 내려보내는 방식으로는 생명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고양시가 가진 풍부한 방송영상 기반과 강소기업, 그리고 도서관과 복지기관 등 지역의 삶이 서로 연결될 때 교육은 비로소 살아납니다. 발달 장애 학생들이 지역 산업과 연계해 직접 숏폼 콘텐츠를 제작해 보거나, 지역의 자원을 활용해 기술을 삶 속에 적용해 보면 삶의 생태계가 구축될 수 있습니다.”

정답이 아닌 해답 함께 찾아야
한 편의 방송물이 완성되기까지 걸리는 시간보다 그 방송물이 누군가의 미용실과 병원과 식당으로 가 닿기까지의 거리가 훨씬 멀다는 것을 류 CP는 잘 알고 있다. 그 먼 거리를 좁히기 위해 그는 기획서 대신 현장의 기록을 먼저 읽었고, 자문위원석 하나를 시설을 아는 이에게 비워 두었다.

시설이냐 탈시설이냐를 서둘러 판정하는 대신, 당사자와 가족이 존엄하게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함께 묻는 일.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아이가 나무와 꽃과 하늘을 볼 시간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그 시간을 이웃이 함께 지켜볼 수 있도록 만드는 일. 기록이 콘텐츠가 되고, 콘텐츠가 다시 한 사람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 순환 앞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급한 정답이 아니라 함께 찾아가는 해답일지도 모른다.

“좋은 교육 콘텐츠는 좋은 내용을 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누가 이해할 수 있는지, 필요한 사람에게 닿는지, 실제 삶에서 다시 꺼내 쓸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방송이 한 사람의 하루를 조금 덜 불안하게 하고, 가족의 부담을 조금 나누며, 주변 사람이 한 번 더 기다릴 수 있게 한다면 그때 비로소 공영교육 콘텐츠가 제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난달 말 출간한 류남이 CP의 신간 『AI 시대, 공영방송은 어떻게 살아남는가』 표지. 류 CP는 이 책에서 질문하고, 공감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자랄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는 일. 그것이 AI 시대 공영교육미디어가 다시 맡아야 할 공적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미지 제공 = 류남이 CP]
지난달 말 출간한 류남이 CP의 신간 『AI 시대, 공영방송은 어떻게 살아남는가』 표지. 류 CP는 이 책에서 질문하고, 공감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자랄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는 일. 그것이 AI 시대 공영교육미디어가 다시 맡아야 할 공적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미지 제공 = 류남이 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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