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종 기자의 역사문화탐방
⑧ 연천 숭의전

고려 대표하는 4왕, 16충신 배향한 사당
망국 백성 한 다독이고, 조선 정통성 천명 
고려-조선 넘어오는 ‘단절과 연속’ 품어

고려 4왕과 16충신을 배향한 사당인 연천 숭의전.
고려 4왕과 16충신을 배향한 사당인 연천 숭의전.

[고양신문] 조선왕조 505년 역사를 대표하는 상징 공간 하나를 꼽으라면 당연히 종묘(宗廟)다.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셨다는 역사적 위상과 탁월한 건축적 독보성을 함께 지닌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이름을 올린 자랑스런 국가유산이다.

하지만 10세기 초 후삼국을 통일한 후 474년간 존속했던, 조선왕조 못잖은 역사적 지분을 차지하는 고려왕조의 사당이 고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은 아는 이조차 드물다.

잊혀진 왕조 고려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역사탐방 세 번째 시간에는 고려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4명의 왕(태조, 현종, 문종, 원종)과 16명의 충신(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을 배향하고 있는 사당, 연천군 미산면 임진강변 잠두봉 언덕에 자리한 숭의전(崇義殿)을 찾아가 보자. 

조선 태조 이성계, 고려 태조 왕건 배향 

승용차로 일산동구청을 출발해 자유로와 율곡로를 따라 한 시간을 달려 파주시 동북쪽 끝자락 어유지리에서 연천 땅으로 접어들면 임진강 건너 숭의전에 닿는다.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진 입구에서 참나무 그늘길을 따라 올라가면 임진강 물길이 내려다뵈는 언덕에 다섯 채의 단아한 건물이 나타난다. 중앙의 숭의전은 태조 왕건을 비롯해 고려 4왕의 위패를 모신 정전이고, 오른편에 임금을 우러르듯 직각으로 배치된 건물은 고려를 대표하는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배신청(陪臣廳)이다. 그밖에 이안청, 전사청, 앙암재는 제례를 봉행하기 위해 제각각 기능을 담당하는 건물들이다. 

숭의전을 세운 이는 의외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다. 나라를 세운 지 5년 만인 1397년 고려 태조 왕건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건립했고, 이후 고려 8왕의 위패가 봉안됐다. 세종 때는 왕의 숫자를 4명으로 줄이고, 충신 16명을 함께 배향해 오늘날에 이른다. 

언뜻 생각하면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 왕조를 세운 조선이 고려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는 데에만 몰두했을 것 같지만, 고려 왕과 신하들을 기리는 숭의전 제사는 조선시대 내내 국가제례로 이어졌다. 건물 역시 5번에 걸쳐 개수·중수를 할 만큼 중요하게 관리됐다. 

태조 왕건을 비롯해 고려 4왕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
태조 왕건을 비롯해 고려 4왕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

소박한 사당 감싼 600년된 느티나무들 

하지만 지금 건물은 아쉽게도 조선시대에 지어진 게 아니다. 한국전쟁의 치열한 격전지였던 연천 땅, 숭의전도 전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전소됐다가 1970년대 문화재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재건됐다. 그래서 1971년 사적 223호로 지정된 대상도 엄밀히 말하면 숭의전 건물이 아니라, 옛 숭의전이 자리했던 터(崇義殿址)다. 조선시대 숭의전 관리를 담당했던 마전군 읍지(麻田郡 邑誌)의 기록으로 볼 때 원래의 건물은 지금보다 규모가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들은 언덕의 경사를 따라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높낮이를 달리하는 축대와 담장, 계단과 대문이 아기자기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단아하면서도 품격을 갖춘 한옥의 공간 미학을 넉넉히 즐길 수 있다. 

600년 세월동안 숭의전 앞을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들. 솔부엉이를 찍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는 사진작가도 보인다.
600년 세월동안 숭의전 앞을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들. 솔부엉이를 찍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는 사진작가도 보인다.

잔디에 박석이 깔린 마당 앞은 임진강으로 이어진 급경사 절벽인데, 숭의전이 조성되며 심어졌다고 전해지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이 소박한 사당 앞쪽에 초록의 담장을 둘러주고 있다. 노거수(老巨樹) 구멍에는 짝을 이룬 솔부엉이들이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들어 알을 품고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이왕 숭의전에 왔다면, 뒷마당에서 돌계단을 조금 오르면 나타나는 잠두봉(蠶頭峰) 전망데크도 꼭 올라 보길 권한다. 잠두봉은 임진강변에 둥그러니 솟아오른 바위 언덕이 누에의 머리(蠶頭)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동남쪽에서 서남쪽으로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흐르는 임진강 물길이 한눈에 조망된다. 잠두봉 아래 썩은소에는 고려 멸망 후 태조의 신위를 실은 돌배가 가라앉았다는, 망국의 비애를 투영한 전설이 전해온다.   

잠두봉 언덕의 임진강 조망데크.
잠두봉 언덕의 임진강 조망데크.

고려 역사 예우로 조선의 정당성 확보  

이제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져보자.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이 세워지자 고려 왕족들은 잠재적 불안세력으로 간주돼 수도 개경에서 쫓겨나 강화도, 멀리는 거제도까지 보내졌다. 그랬던 조선 조정이 한편으로는 ‘의를 숭상한다(崇義)’는 명분과 격식을 갖춰 고려의 왕들을 예우했다. 이유가 뭘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피를 동반한 왕조 교체에 대한 고려 왕족과 귀족, 백성들의 반발을 완화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수단으로 숭의전이 필요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조선에 협조적인 일부 고려 왕족의 후손들도 제례에 초청돼 예우를 받았다는 기록이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나아가, 숭의전 제례를 통해 조선 왕실은 자신들이 무도한 권력 찬탈 세력이 아니라, 하늘의 명을 이어받은 왕조임을 천명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고려의 정통성을 예우함으로써, 적법한 계승자를 자처하고자 했던 것이다. 동시에, 과거의 역사를 조선 건국의 바탕 이념인 유교적 질서 안으로 수렴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조선은 물론, 전 왕조의 제사까지 국가가 직접 관리함으로써 유교적 역사관을 완성하려 한 것이다. 

숭의전 내부 모습. 
숭의전 내부 모습. 

치밀하게 설계된 고도의 상징정치 공간 

그런 눈으로 들여다보면, 숭의전에 배향된 인물들의 면면도 새롭게 보인다. 우선 4명으로 추려진 왕들은 명실상부 고려 역사의 간판들이다.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태조 왕건은 설명이 필요 없을 테고, 몇 해 전 지상파 TV에서 방영된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으로 재조명을 받은 현종은 거란 침입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를 안정시켰고, 문종은 고려의 문화와 제도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를 상징하는 임금이다. 마지막으로 원종(충경왕)은 고려사의 아픔인 몽골 간섭기를 버텨낸 왕을 대표해 선정된 것으로 보인다. 

왕을 선정한 기준이 상징성이라면, 신하들을 고른 기준은 한마디로 ‘구국과 충절’이다. 복지겸·신숭겸·유금필 등은 왕건과 함께 활약하며 고려를 세운 개국공신이고, 강감찬·서희·윤관은 군사와 외교로 나라를 지킨 영웅들이다. 아울러 김부식과 같은 대표적 문관도 있고, 조선 건국에 동참하지 않고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정몽주도 마지막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다시 말해 “고려의 신하는 고려에 충성하고, 조선의 신하는 조선에 충성하라. 그것이 신하의 도리”라는 강력한 국가주의적 메시지를 배신청에 위패를 봉안한 인물들을 통해 전했던 게 아닐까. 

이처럼 숭의전은 매우 치밀하게 설계된 고도의 상징정치 공간이었다. 어쩌면, 현대적 국가이데올로기가 어느 때보다 강력했던 1970년대 초에 숭의전 건물이 복원되고 제례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부활한 것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배신청에 배향된 고려 16충신의 위패.
배신청에 배향된 고려 16충신의 위패.

몰락한 왕조의 한 기억하는 전승들 

하지만 정치적 배경과는 별도로, 백성들은 숭의전을 몰락한 왕조의 한과 슬픔을 품은 공간으로 기억했다. 연천군에서 발행한 설명문에는 숭의전 자리가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 있을 때, 개경에서 철원 궁성을 오가는 도중 묵어가곤 했던 기도처(앙암사)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라고 말한다. 만일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조선이 편찬한 <고려사> 등의 역사서에 그 대목을 빼먹었을 리 없다는 지적이다. 다만 고려 왕건을 추모하려는 마음이 숭의전이 서 있는 자리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작동돼 이 같은 전승이 확산됐으리라 해석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잠두봉 썩은소 전승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충절을 주입하려고 사당을 세웠지만,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서 저문 왕조가 남긴 전설을 되새기고 있다. 

규모도 작고 볼거리도 소소하지만, 알고 보면 흥미롭고, 보고 와서 궁금한 게 많아지는 탐방지가 바로 숭의전이다. 고려사를 관통하는 명예의 전당인 동시에,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역사의 연속과 단절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숭의전에서 조망데크로 향하는 윗마당. 
숭의전에서 조망데크로 향하는 윗마당. 

적석총, 당포성, 주상절리 명소 지척에  

주변의 여행지로 시야를 넓혀 일정을 짜면 훨씬 재미난 나들이를 즐길 수 있다. 임진강을 거슬러 올가가며 고구려의 국경 방어성곽인 당포성, 한국전쟁 당시 UN 참전국의 희생을 되새길 수 있는 UN군 화장장 시설, 그리고 임진적벽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동이리 주상절리, 백제 초기 무덤인 동이리 적석총 등이 지척의 거리를 두고 차례로 등장한다. 가히 고대부터 현대까지, 2000년에 가까운 한반도의 역사가 연천 임진강변 주변에 집약돼 있는 셈이다.

임진강 주상절리가 건너다뵈는 임진강자연센터 2층 카페에서 향긋한 커피 한 잔과 함께 탁 트인 통유리창으로 멋진 풍광을 감상하며 나들이의 쉼표를 찍는 것도 강추다.

임진강 국경선을 지키던 고구려의 방어시설인 당포성. 
임진강 국경선을 지키던 고구려의 방어시설인 당포성. 
당포성 동벽에서 내려다 본 임진강. 
당포성 동벽에서 내려다 본 임진강. 
동이리 주상절리 건너편의 초기 백제시대 적석총. 오른쪽 건물은 임진강자연센터다. 
동이리 주상절리 건너편의 초기 백제시대 적석총. 오른쪽 건물은 임진강자연센터다. 
임진강자연센터 2층 카페에서는 통유리창 너머 임진강과 주상절리가 한눈에 조망된다. 
임진강자연센터 2층 카페에서는 통유리창 너머 임진강과 주상절리가 한눈에 조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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