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종 기자의 역사문화탐방
⑦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천년 세월 한자리, 혜음령 산길 랜드마크
은진미륵과 함께 고려시대 석불 대표 걸작
과거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흥미로운 구전
[고양신문] 한반도 불교의 가장 매력적인 유산 중 하나가 바로 마애불(磨崖佛)이다. 거대한 바위나 암벽에 새긴 부처, 또는 보살을 말하는 마애불은 한민족 고유의 바위신앙(巨石信仰)과 불교라는 고등 종교가 만나 탄생했다. 선사시대부터 이 땅의 선조들은 힘 있게 불끈 솟은 바위 앞에서 다산과 풍요를 빌었고, 마을마다 범바위, 매바위, 눈썹바위 등 특정한 형상의 바위들을 숭배됐다. 심성의 뿌리가 이러했으니, 삼국시대 불교가 도래한 이후 가장 높고 숭고한 존재인 부처와 보살을 자연스레 바위에 새긴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인 마애불은 현재 전국에 200여 개가 전해지는데, 이 중 다수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숲 그늘 그윽한 고갯길에 자리한 혜음원지에서 시작한 고려 여행의 두 번째 방문지는 고려시대 마애불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 보물)이다. 이름 그대로 바위를 쪼아 만든 부처님 두 분이 나란히 서 계시다는 뜻이다.
바위 형태 고스란히 살려 마애불 조성
혜음원지에서 광탄 방향으로 3㎞ 정도만 달리면 마애이불을 품고 있는 용암사 입구다. 국가유산청이 세운 표지판에는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이라는 공식 명칭이 적혀 있지만, 사찰에서 세운 표지석에는 ‘쌍미륵불’이라고 표기됐다. 기자 역시 예전부터 들어왔던 ‘용미리 쌍미륵불’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단을 오르면 나타나는 일주문에 ‘장지산 용암사(長芝山 龍巖寺)’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내걸린 분홍빛 연등이 대웅보전을 감싸고 있고, 서북쪽 숲 뒤편 언덕에 우뚝 솟은 쌍미륵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래에서 볼 때는 소박해 보이지만, 돌계단을 따라 올라갈수록 점점 쌍미륵불의 거대한 위용이 드러난다. 쌍미륵불의 키는 17.4m, 같은 고려시대 작품인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 18.1m)에 이어 두 번째로 크지만, 가로 넓이가 은진미륵보다 훨씬 풍성하기 때문에 국내 최대 석불이라 불러도 틀리지 않다.
크기도 크기지만, 조형적인 면에서 용미리 쌍미륵불은 독보적 아우라를 발산한다. 앞서 미륵불이 자연과 인간의 합작이라 말했는데, 눈앞의 두 부처님이야말로 이를 유감 없이 보여주는 걸작이 아닐까 싶다. 언덕 중턱에 우뚝하게 돌출된 바위의 형태를 고스란히 살려 석불의 몸통을 삼고, 그 위에 큰 돌덩이를 다듬어 얼굴과 머리를 얹었다.
둥근 하늘, 네모난 땅… 세계관 표현
나란히 선 두 석불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대조적인 점이 여럿이다. 한쪽은 키가 크고, 한쪽은 조금 작다. 키 큰 쪽은 넓은 가슴을 당당히 편 듯하고, 작은 쪽은 그 뒤편에 몸을 반쯤 숨겼다. 사이좋은 부부나 연인이 인증사진을 찍는 포즈가 연상된다. 왼쪽은 남상(男像), 오른쪽은 여상(女像)이라는 구전이 전해오는 이유다. 학계에선 왼쪽은 미륵불, 오른쪽은 미륵불에게 경배의 예를 바치는 보살상으로 보기도 한다.
다른 점은 이뿐 아니다. 자세히 보면 왼쪽의 키 큰 석불은 둥근 갓(전문 용어로는 보개·寶蓋)을 쓰고 있고(圓笠佛), 오른쪽 작은 석불은 네모난 갓을 썼다(方笠佛).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天圓地方)’는 옛사람들의 세계관을 조화롭게 품고 있는 듯 보인다. 손 모양 역시 왼쪽은 연꽃 가지를 들고 있고, 오른쪽은 두 손을 살짝 틀어 고요히 합장하고 있다.
석공의 정과 망치는 단단한 화강암 표면에 하늘거리는 옷주름과 매듭까지 섬세하게 새겨놓았다. 더 놀라운 건 솜씨가 아니라 설계다. 자연적으로 갈라진 바위 틈새와 균열을 절묘하게 활용해 전체적인 형상을 디자인했다.
미학적으로 볼 때 쌍미륵불의 조화를 완성하는 가장 큰 포인트는 두 석불의 얼굴 크기가 아닐까 싶다. 일반적인 조형작품이라면 몸통이 크면 두상도 크게, 몸통이 작으면 두상도 작게 만들어야 조화가 맞을 것 같지만, 쌍미륵불은 반대의 선택을 했다. 덩치가 큰 쪽의 얼굴이 확연히 작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개별적 비례보다 두 석불의 조화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인 듯하다.
머리 크기가 서로 바뀐 모습을 상상해 보면 왼쪽은 너무 무거워 보이고, 오른쪽은 너무 왜소해 보였을 게 분명하다. 승한 곳을 살짝 누르고, 허한 곳을 북돋는 신묘한 안목에 감탄사가 나온다. 쌍미륵불을 해설해 놓은 여러 자료에는 대개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조형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이라는 평가가 등장하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신체 비율을 기계적으로 맞췄더라면, 지금과 같은 개성과 생동감을 얻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쌍미륵불 뒤편으로 돌아 올라가면 옆모습과 뒷모습까지 세세히 관찰할 수 있다. 바라보는 방향과 높이에 따라 석불이 전하는 느낌도 달라진다. 특히 뒤편 소나무숲 그늘에 올라 눈 아래 펼쳐진 용미리 마을과 건너편 산 능선을 묵묵히 조망하고 있는 두 석상의 뒷모습을 꼭 감상해 보기를 권한다.
석상 새기고 왕자 얻었다는 고려 임금 전설
구전으로 내려오는 설화도 흥미롭다. 고려 선종이 후사가 없어 세 번째 왕비인 원신궁주(元信宮主)를 맞았는데, 어느날 궁주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있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기이하다 여겨 왕이 사람을 보내어 알아오게 했더니, 커다란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왕이 바위에 두 석상을 새기고, 절을 짓고 불공을 드리자, 그 해 왕자가 태어났다고 한다. 불교와 민간신앙, 왕실 설화가 보태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것이다.
쌍미륵불은 고려시대에는 개경과 남경을 오가는 왕족과 백성들의 여정을, 조선시대에는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의 연행길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랜드마크였을 것이다. 임진나루를 건너 한나절길을 걸어온 여행객들의 눈에 장지산 중턱에 우뚝 솟은 바위부처님 두 분이 들어오면 반가움이 울컥 올라오지 않았을까. 시간이 조금 지체되더라도, 절집 뒤편 돌계단을 올라 두손 합장하고 쌍미륵불을 알현하며 지친 마음을 충전했을 옛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하지만 최근 암벽 측면에 새겨진 ‘성화(成化) 7년’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명문이 해석되면서 쌍미륵불 조성 시기를 조선 성종 때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기도 했다, 기존의 학설대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쌍미륵불에 조선시대에 명문이 보태진 것인지, 아니면 구전과 역사적 사실이 일치하지 않는 것인지, 좀 더 정확한 학술적 규명이 뒤따라야 할 것 같다.
이승만과 박정희, 권력자 흔적 곳곳에
앞서 소개한 구전설화로 미루어, 후손 점지를 기원하는 이들의 간절한 발걸음이 수백년 세월 동안 쌍미륵불을 찾았으리라 짐작된다. 재밌게도 천년 전 왕실을 배경으로 시작된 전설은 오늘날의 권력자 이야기로 이어진다. 사찰 한쪽 삼성각 옆에는 작은 동자상과 칠층석탑이 서 있는데, 솜씨가 엉성한 이 두 석물에 얽힌 주인공은 바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다. 사찰에서 세운 안내문에는 ‘구전에 의하면 고 이승만 대통령 모친께서 용암사 쌍미륵 석불에서 득남발원기도를 하여 고 이승만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조금은 억지스러운 이 ‘현대판 설화’는 그리 널리 회자되지 않고 있다.
이어지는 설명은 ‘이 대통령이 1954년 쌍미륵불을 참배하고 남북통일과 후손잇기를 기원하며 동자상과 7층 석탑을 세우셨다’고 밝히고 있다. 동자상과 석탑은 원래 쌍미륵불 어깨 옆에 서 있었다는데, 4·19 이후 문화재를 훼손한다는 비판에 밀려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놀랍게도 용암사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흔적도 남아있다. 대웅보전으로 올라가는 중앙계단 양쪽에 구국통일, 국태민안을 발원하는 ‘천일기도광명등’이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1970년대 박 대통령이 1군단 지휘관들과 함께 이곳을 다녀가며 남긴 유물이라고 한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을 30년 넘게 통치한 두 절대권력자가 파주 시골마을의 작은 사찰에 족적을 남겼다는 것 자체가 경기북부 주민들 사이에서 쌍미륵불이 차지하는 위상의 방증이리라.
인근에 자리한 고려 명장 윤관장군 묘
또 하나 재미난 현대판 유물은 ‘파주군 교육청’이 세운 ‘유의사항’ 안내석이다. 내용을 보면 △경내에서 담배 피우지 말 것 △가래침을 뱉지 말 것 △부처님 친견시 탈모할 것 △미륵님 어깨에 올라가지 말 것 △음주를 금하고 춤이나 불량한 행동을 하지 말 것 △꽃과 나무를 꺾지 말 것 등이다. 70~80년대 공공질서를 계몽했던 단어들이 안내석이 세워진 시기를 짐작케 한다.
고려시대를 만나러 찾아온 용암사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근과거 유물들을 만나니 답사의 보람이 배가된다. 하지만 수십 년밖에 안 된 안내석이 한참을 들여다봐야 내용이 읽힐 정도로 글씨가 마모됐다. 나름 한 시대를 증언하는 흔적인만큼 방치하지 말고 잘 관리되면 좋겠다.
길을 나선 김에 용암사 지척에 자리하고 있는 ‘파주 윤관장군 묘(坡州 尹瓘將軍 墓, 사적)’도 들러보자. 12세기 초 북방을 어지럽히는 여진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축조한 고려의 명장이자 문신인 윤관 장군의 자취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묘역의 규모와 주변 시설은 마치 왕릉을 보는 듯 장대하다. 파주 땅에 뿌리를 둔 명문가 파평윤씨 후손들의 위세와 자부심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묘역 한쪽 느티나무 그늘이 넓게 드리운 쉼터에서 시원한 음료로 목을 축이며 혜음원지, 쌍미륵불, 윤관장군 묘로 이어졌던 고려시대 시간여행 첫 파트를 마무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