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종 기자의 역사문화탐방
② 한양 수도성곽 ‘경복궁~한양도성~탕춘대성’
북악~인왕산 고갯마루 창의문 옛모습 그대로
탕춘대성 기차바위 암릉구간 방어라인 활용
부암동·평창동 1ㆍ21사태 후 안보차원 택지개발
[고양신문] ‘한양의 수도성곽’ 시스템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궁에서 궁으로 이동하는 여정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임금과 국가는 동급의 개념이었고, 궁궐은 국가를 보위하는 최후의 물리적 공간이었다. 평상시에는 도성 안 궁궐(宮闕)에 머무는 임금을 전란 발생 시 보장처인 북한산성의 행궁(行宮)으로 신속하고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한 설계도가 바로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 동선이었던 것이다.
경복궁 조망 명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도전하는 ‘한양의 수도성곽’을 만나는 두 번째 시간, 선조들이 설계했던 ‘궁에서 궁으로’의 이동을 두 발로 체험해 보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이 있는 광화문역으로 향했다. 지상으로 올라오니 안개가 자욱하고 빗방울도 흩날린다. 답사기는 조망과 사진이 생명인데, 날을 완전히 잘못 잡았다. 하지만 다시 시간을 내기도 어려운 일. 전란이 일어나 행궁으로 향하는 임금의 참담한 심경을 상상하기에는 궂은 날씨가 제격일 수도 있겠다.
첫 번째 행선지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층 옥상전망대다. 광화문과 경복궁, 궁궐을 감싼 북악산, 동쪽을 호위하는 인왕산, 그리고 두 산 사이로 멀리 북한산 향로봉 능선이 한눈에 조망되는 포인트지만, 역시나 북악산과 인왕산은 윤곽만 겨우 눈에 들어온다. 안개가 지워버린 북한산의 실루엣은 마음속으로 그려 넣는다.
오랜 세월 닫혔던 한양도성 북쪽라인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가장 가까운 길은 한양도성 서북쪽 창의문을 나온 후 인왕산 기차바위를 타고 내려와 세검정 인근에서 홍제천을 건너 북한산 산줄기가 천변까지 뻗어 내려온 능선을 타고 올라가 향로봉과 비봉, 문수봉을 거쳐 대남문으로 가는 코스다. 탕춘대성이 바로 이 길을 따라 축성됐다.
경복궁 서편 담장을 따라 효자동, 궁정동, 청운동을 차례로 지나 오르막길을 끝까지 올라가면 한양성곽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인 창의문(彰義門)이 나타난다.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창의문은 북악산 능선과 인왕산 능선이 만나는 고갯마루에 자리하기 때문에 한양성곽 트레킹, 또는 서촌과 부암동 일대 나들이의 출발점이 되곤 한다. 한양성곽의 여러 문 중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시대에 중건된 모습 그대로 문루가 보전된 문이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그 가치가 더욱 조명될 것 같다.
성곽을 따라 인왕산 능선을 오른다. 한양성곽은 축조된 지 600년이 넘은 건축물이지만, 오늘날에도 실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궁이라 할 수 있는 청와대 배후를 지키는 군사방어시설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의 무장공비가 청와대로 향했던 1968년 1ㆍ21사태(일명 김신조 사태) 이후 한양성곽 북악산~인왕산 구간은 고스란히 군사시설로 전용됐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민간인 출입이 전면 통제됐던 구간은 2000년대 들어서야 시민 품으로 돌아왔지만, 성곽길을 따라 군 순찰로와 경비초소 등의 흔적을 곳곳에 남겼다. 그 중 일부는 ‘숲속쉼터’ 등의 휴게공간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안갯속에 묻혀버린 기차바위 전망
인왕산 능선을 가파르게 치고 올라가던 성곽길은 해발 338m 정상부를 코앞에 둔 지점에서 기차바위 갈림길을 만난다. 여기부터가 탕춘대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성곽이 없는데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만, 한양의 수도성곽은 인력을 동원해 화강암으로 축조한 석성과 자연암릉이 혼재되어 있다. 지형이 완만하거나 지대가 낮은 구간은 화강암 덩어리로 성벽을 단단하게 쌓아올렸고, 경사가 급하거나 암릉이 우뚝한 구간은 자연지세 그대로를 방어라인으로 활용했다. 축성과 관리에 드는 에너지를 아끼는 지혜를 선택한 것이다. 기차바위가 이를 잘 보여준다. 좌우로 가파른 경사면이 길게 이어진 거대한 바위능선은 오늘날에도 가장 사랑받는 인왕산 등반코스로 손꼽힌다.
기차바위에서는 동쪽으로 안산과 무악재, 홍제동과 내부순환도로, 멀리는 상암동과 한강 너머까지 시원하게 조망되고, 서쪽으로는 평창동과 구기도, 부암동, 그리고 북한산 남쪽 스카이라인이 멋지게 어우러진다. 하지만 역시나 안갯속에 잠겨 바윗길의 소실점조차 보이지 않는다. 양쪽으로 이어진 안전로프를 잡고 조심조심 기차바위를 통과한다.
기차바위 등산은 대개 인왕산 북서쪽 개미마을 코스가 애용되지만, 탕춘대성을 따라가려면 ‘세검정 삼거리’라는 이정표를 따라 북쪽으로 쭉 직진해야 한다. 바윗길을 지나서도 좌우가 가파른 자연 능선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이어진다.
소나무숲길을 지나 ‘홍지문(상명대)’ 이정표가 나타나면 드디어 석성이 시작되는 지점인데, 또다시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렸다. 노후 난간과 데크를 교체하는 공사로 탕춘대성 구간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현수막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현수막에 고지된 날짜대로라면 이미 정비공사가 끝났어야 하는데, 여전히 붉은 테이프가 처져 있다. 난리를 피해 궁에서 궁으로 향하는 길이 쉬울 리 없나 보다.
성곽 안쪽에 설치된 창고와 군영본부
하는 수 없이 부암동 자하문터널 방향으로 우회해서 하산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부암동과 평창동의 탕춘대성 관련 흔적들을 둘러보기로 하자.
부암동과 평창동 일대에는 80년대 이후 고급 단독주택과 빌라들이 빼곡히 들어차 서울의 부촌으로 불렸다. 하지만 70년대 이전까지는 포장도로도 하나 없는 산골마을 풍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1·21사태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북한산과 인왕산 라인이 무장공비들에게 무혈입성 루트를 제공한 셈이 되자, 안보 차원에서 이곳을 도심화해야 한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인왕스카이웨이와 북악스카이웨이가 뚫렸고, 택지개발이 빠른 속도로 진행돼 오늘날의 풍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성곽 이야기로 돌아가서, 탕춘대성의 역할은 단순히 이동경로 확보만이 아니다. 그 자체로 한양도성 전면의 1차 방어성이었고, 군량보급과 지휘체계에도 커다란 이점을 안겨줬다. 탕춘대성 안쪽에 새로 만들었던 군량보급 창고 ‘평창(平倉)’의 이름은 오늘날 평창동이라는 지명으로 흔적을 남겼고, 한성부 일대 군영의 중앙 지휘소인 총융청(摠戎廳), 군사시설인 연융대(鍊戎臺) 등을 성 안쪽에 설치했다.
여기서 탕춘대성이라는 이름도 잠시 짚고 넘어가자. 탕춘대(蕩春臺)는 사실 연산군이 경치 좋은 홍제천 풍광을 내려다보며 술판을 벌이며 놀던, 질탕하게 봄을 즐기겠노라는 뜻을 지닌 정자(蕩春亭)의 이름이었다.
홍제천 따라 연이어 나타나는 옛터들
현재 평창과 총융청, 탕춘대는 오늘날 남아있지 않고, 작은 표지석들만 그 위치를 확인해주고 있다. 먼저 찾아간 곳은 평창터다. 암반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홍제천을 건너 평창동 주민센터 못 미쳐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면 럭키평창빌라가 나타나는데, 빌라 표지석 우측 계단 옆을 잘 살피면 ‘평창 터’ 표지석을 찾을 수 있다. ‘1712년(숙종 38)에 북한산성 군량창고를 탕춘대에 설치하여 평창이라 하고 선혜청이 관리하였다’는 설명이 적혀있다. 표지석은 만든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날짜를 적어놓지 않아 아쉽다.
이번에는 총융청터를 찾아가보자. 평창 터에서 홍제천을 따라 600여m 내려오면 신영동 삼거리에 세검정 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는데, 초등학교 담장 한쪽에 ‘총융청터’ 표지석이 박혀 있다. 표지석은 2012년 서울시가 설치했고 ‘총융청은 인조 2년(1624)에 설치된 조선시대의 중앙군영이다. 광주, 양주, 수원 등 경기도 지역의 군사일을 맡았으며, 영조 23년(1747)에는 북한산성의 수비를 맡기도 했다’고 적었다.
마지막으로 탕춘대터(蕩春臺址) 표지석은 좀 더 아래쪽, 월드캐슬 정문 앞에 놓여있다. 그리고 그 아래 물길이 돌아나가는 암반이 바로 인조반정을 주도한 세력들이 광해군 폐위를 결의하며 칼날을 벼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세검정(洗劍亭)이다. 오늘 나들이는 여기까지. 다음 여정은 탕춘대성의 중심 건축물인 홍지문(弘智門)에서 북한산성 행궁까지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