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교통안전 칼럼

[고양신문] 밤길 교차로에서 신호등이 깜빡이고 있다. 그냥 지나쳐도 되는 건지, 멈춰야 하는 건지 순간 헷갈린다. 많은 운전자는 점멸 신호를 마주했을 때 그냥 속도만 줄이고 통과한다. 그런데 그 깜빡임이 무슨 색이냐에 따라 법적 의무가 완전히 달라지고, 사고가 났을 때 형사처벌로도 이어질 수 있다.

지난 3일 전주지법 항소심 판결이 그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줬다. 2024년 1월 전북 완주군 한 교차로에서 4.5톤 화물차가 승용차를 들이받아 12주 상처를 입힌 사고였다. 화물차 기사는 적색 점멸 신호를, 승용차 운전자는 황색 점멸 신호를 받은 상태였다. 법원은 화물차 기사에게 벌금 500만 원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속도가 시속 34㎞에 불과했고 피해자에게도 과실이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적색 점멸과 황색 점멸은 같은 깜빡임처럼 보이지만 의무가 다르다.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은 적색 점멸 신호에서 정지선 또는 교차로 직전에 반드시 일시 정지한 뒤 다른 차량을 확인하고 진입하도록 규정한다. 단순히 속도를 줄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차가 완전히 멈춰야 한다. 황색 점멸은 다른 교통에 주의하면서 진행할 수 있다. 황색 점멸 신호를 받은 차량이 적색 점멸 차량보다 통행 우선권이 있고, 적색 점멸 차량은 양보해야 한다.

이 사건에서 재판부가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밝힌 이유가 중요하다. 재판부는 "적색 등화의 점멸 신호를 위반해 교차로에 진입하는 것은 충돌 사고를 일으킬 고도의 개연성이 있는 행위"라고 판시했다. 동시에 황색 점멸 신호를 받은 피해자도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아 사고에 기여했다며 원심보다 형을 감경했다. 가해자의 잘못이 더 크지만,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일부 있다는 판단이었다.

적색 점멸 신호위반은 도로교통법상 12대 중과실 중 하나인 신호위반에 해당한다. 교통사고처리특례법에 따라 피해자와 합의하더라도 형사처벌을 피할 수 없는 항목이다. 이번 사건처럼 단순 벌금이 아니라 집행유예까지 선고될 수 있다. 점멸 신호를 그냥 지나쳤다가 사고를 내면 합의금을 줘도 전과가 남는다는 뜻이다.

과실 비율도 확연히 갈린다. 적색 점멸 차량이 일시 정지를 하지 않고 진입했을 때 기본 과실은 통상 70~80% 수준으로 산정된다. 황색 점멸 차량이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았거나 과속한 경우 과실이 일부 가산되지만, 적색 점멸 측의 책임이 훨씬 크게 산정된다.

현실에서는 점멸 신호를 제대로 지키는 운전자가 많지 않다. 특히 심야 시간대에 차량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냥 통과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법은 차량 유무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적색이 깜빡이면 반드시 멈추고 확인하는 것이 의무다. 상대 차량이 보이지 않아도, 속도가 다녀도 마찬가지다.

적색 점멸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황색 점멸과 적색 점멸이 함께 운영되는 교차로에서 통행 우선권은 황색 점멸 쪽에 있지만, 우선권이 있다고 해서 주의의무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이번 판결에서 피해자의 과실이 인정된 이유도 황색 점멸 신호에서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고 제한속도를 넘겼기 때문이다. 우선권을 믿고 빠르게 지나치다 사고가 나면 피해자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광수 일산서부경찰서 경감
이광수 일산서부경찰서 경감

결국, 적색이든 황색이든 점멸 신호 교차로는 신호가 없는 교차로보다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 신호가 있다는 믿음 때문에 긴장이 풀리기 때문이다. 적색이 깜빡이면 일단 멈추고, 황색이 깜빡이면 속도를 줄이고 좌우를 살핀다. 그 두 가지 원칙이 점멸 신호 교차로에서 사고를 막는 전부다.

이광수 일산서부경찰서 경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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