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숨결 따라 걷는 북한산 2> 태고 보우의 길

중국 임제종의 법통 이어받은 고려 말 고승
북한산 중흥사 중수하고 태고암에서 수행
시대를 고민하며 개혁의 씨앗 뿌려


[고양신문]한 달 만에 다시 찾은 북한산에는 어느새 봄기운이 완연하다. 선인들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두 번째 북한산 나들이는 태고 보우 스님의 흔적을 찾는 길이다. 보우 스님이 언제 적 분인지를 살펴봤더니,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에 살았던 고려 말의 고승이다. 유한한 시간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들이 700년이라는 아득한 간극을 건너 누군가의 흔적을 더듬는다는 사실이 새삼 신비롭게 느껴진다. 옛 사람과 지금 사람이 함께 바라보았을 ‘북한산’이라는 공통 분모가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지 않을 수 없다. 도움말을 듣기 위해 안재성 고양향토문화보존회 회장이 강사로 모셨다.

 

태마산행을 함께 한 고양신문 산악회원들이 대서문에서 임철호 대장(사진 맨 왼쪽)의 설명을 듣고 있다.  

 

성벽에 새겨진 ‘공사 실명제’ 흔적

수문을 지나 계곡길을 밟았던 첫 번째 답사와는 달리 이번에는 넓게 트인 대로를 따라 대서문을 통과하는 길로 산행의 초입을 잡는다. 계곡길과는 또 다른 느긋함을 즐기며 걷다 보니 간간이 들려오는 산새 소리가 나들이의 기대감을 보탠다.  

대서문 주변 비탈에는 살구꽃이 화사하다. 지금은 국립공원이 정비되면서 모두 산 아래로 이주했지만, 예전에 산성 안에까지 주민들이 살았던 시절에는 이곳 북한동의 주요 산물이 살구였다. 나이가 지극한 북한동 출신 어르신들을 만나면 “살구를 가마니에 담아 지게에 잔뜩 지고 영천시장까지 가서 팔았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사람은 떠났지만 살구나무는 여전히 남아 철이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다.    

대서문 성벽에 다다르자 일행 중 한명이 성벽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자세히 보니 성벽돌 하나에 뭔가 글자가 잔뜩 새겨져 있다. 산성을 조성하며 공사구간, 담당부대, 공사기간, 책임자 이름 등을 아주 상세히 기록했다. 북한산성 축성 공사에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를 증명하는 ‘공사 실명제’의 흔적이다. 대서문을 여러 번 지나치면서도 이런 돌이 있는지조차 몰랐다니…. 동일한 각자석은 산행 후반에 들른 대동문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대동문에 새겨진 불한산성의 '공사 실명제' 각자. 

 

봄이 찾아오는 북한산의 숲

대서문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숲이 펼쳐진다. 이번 산행부터는 역사 탐방과 함께 고양신문 산악회를 이끌고 있는 임철호 대장의 도움말을 곁들이며 생태 공부도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임 대장은 ‘믿고 찾는’ 숲 해설 전문가다.

다양한 수종이 뒤섞여 자라는 북한산의 숲에서 가장 먼저 푸르른 잎싹을 틔운 나무는 뭘까? 정답은 귀룽나무다. 음지에서도 잘 자란다는 귀룽나무는 다른 나무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하려는 듯 성급하게 초록빛 봄옷을 단장했다. 가까이서 보니 키 작은 찔레도 수줍게 잎을 내밀었다.

‘사위질빵’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덩굴은 칡이나 등나무 덩굴에 비해 잘 끊어진단다. 그래서 사위에게 가벼운 등짐을 지게 하기 위해 장모가 사위질빵 덩굴로 어깨끈을 매 주었다고. 역시 사위사랑은 장모인가보다.

혼동하기 쉬운 나무 구분법도 배웠다. 미류나무는 가지가 풍성하게 펼쳐지는 반면, 양버들나무는 거대한 싸리비 모양으로 가지가 가지런히 하늘을 향해 뻗는다. 

 

산괘불주머니가 노란색 꽃을 수줍게 선보였다.

 

생강나무 꽃의 ‘아찔한’ 향기
 
앙상한 가지에 풍성하게 매달린 노란 꽃망울을 가리키며 임철호 대장이 이름을 묻는다. ‘산수유’라는 대답이 돌아오지만 틀렸단다. 생강향이 나는 잎이 나온다는 ‘생강나무’라고 짚어준다. 비슷해 보이는 두 꽃의 구분법은 뭘까?
“자세히 보면 산수유는 잔가지 끝에 꽃이 달리지만, 생강나무는 가지의 중간에서 꽃이 터집니다. 도감을 찾아봐도 안 나오는 설명이니 실물을 보며 확실히 익혀두세요.”
아하, 그렇구나! 이제 두 나무를 혼동할 일은 없겠다.

차이점은 또 있다. 산수유가 별다른 향기가 없는데 비해 생강나무꽃은 은은하면서도 아찔할 만큼 매혹적인 향기를 발산한다. 다시 임철호 대장의 설명이 이어진다.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에 보면 주인공이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 아래에서 열일곱 점순이를 만나는 장면에서 ‘꽃향기에 머리가 아찔해진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소설의 무대인 강원도엔 동백꽃이 없거든요. 열매가 동백기름 대용으로 쓰이는 까닭에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박나무라고 부르기도 하니까, 아마도 소설속에 등장하는 꽃은 생강나무 꽃이 아닐까 짐작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주인공 총각의 머리를 아찔하게 만든 향기는 생강나무꽃 향기이면서, 동시에 점순이의 향기일거라는 로맨틱한 해석을 덧붙인다.
 

생강나무꽃. 코를 대보면 '아찔한' 향기가 난다.

 

 

산수유나무. 생강나무와 달리 꽃망울이 작은 가지 끝부분에서 터진다. 

 

융성했던 모습 복원중인 중흥사

이틀 전 내린 봄비로 계곡마다 시원한 물소리가 가득하다. 일행들 사이에서 ‘창릉천의 발원지’를 어디로 볼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다. 작은 물길들이 북한산 전체를 실핏줄처럼 감싸고 흐르다가 여러 계곡을 만들고, 물줄기들은 다시 창릉천으로 모아져 고양땅의 동남쪽을 적시며 한강을 향해 흐른다. 단순한 자연 경관뿐 아니라 고양의 생태와 환경을 지탱하는 물길, 바람길의 시원에 북한산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첫 번째 목적지인 중흥사(重興寺)에 도착한다. 천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중흥사는 북한산성이 축성된 후에는 13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건된 절이다.
1915년 큰 홍수에 절이 유실된 후 터만 남아있던 절이라 예전의 웅장한 규모를 상상의 공간에서만 그려보곤 했는데, 현재 단계적으로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니 머잖아 21세기 버전으로 새롭게 단장한 중흥사의 실체를 만나볼 수 있으리라.

고양향토문화보존회 안재성 회장이 오늘의 주인공 태고 보우(普愚)스님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고려 말에 중흥사를 중수한 이가 바로 보우 스님입니다. 호는 태고(太古), 시호는 원증(圓證)인 보우 스님은 41세가 되던 해 중흥사를 다시 짓고는, 바로 위 태고암(지금의 태고사)에서 4년 동안 수도 정진을 합니다. 하지만 혼자만의 수행으론 성이 차지 않았던지 그는 더 깊은 공부를 위해 원나라로 넘어가 중국 임제선사의 법통을 이어받은 임제종(臨濟宗)의 18대 법손(法孫)인 청공선사로부터 후계자로 인정을 받아 가사와 주장자를 받습니다. 원나라 황제도 보우스님에게 법회를 청했을만큼 법력과 명성을 얻었지요. 고려로 돌아온 보우 스님은 공민왕과 우왕 시절 연이어 국사의 자리에 오릅니다.”

목은 이색이 정리한 보우 스님의 행적 

중흥사에서 왼쪽 봉우리로 향하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보우스님이 불심을 닦은 태고사에 다다른다. 입구에서 150년 된 거대한 귀룽나무(고양시 보호수)가 탐방객을 맞는다. 귀룽나무에선 희고 탐스런 꽃이 피는데 계절을 맞춰 찾으면 장관일 듯.  

태고사는 경사진 터에 자리를 잡은 탓에 커다란 돌을 쌓아 만든 여러 단의 축대 위에 대웅전이 자리를 잡고 있다. 대웅전 우측에는 보우 스님의 행적이 적힌 ‘태고사원증국사탑비’가 서 있다. 보물로 지정된 귀한 문화재다.

사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지만, 보우 스님은 임제종은 물론 조계종에서도 종조(宗組)로 모실 만큼 영향력 있는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살아생전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는 국사와 왕사, 대선사와 선사, 탁발승 등 1800여 명에 달하는 제자를 두었다는 원증국사탑비의 내용으로 미루어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당대의 거물 조정대신인 이인임(李仁任)과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역시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사망하자 우왕은  비문은 고려말의 문인 목은 이색(李穡)에게 명해 보우스님의 행적을 정리한 비문을 짓게 하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 권주(權鑄)가 쓰도록 했다.

 

보우 스님이 수행을 한 태고암에 자리잡고 있는 태고사. 오른쪽 비각 안에 보물 제 611호 '태고사원증국사탑비'가 있다. 

 

 

태고 보우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안재성 고양향토문화연구회장.

 

 

실에 발 디딘 개혁가의 풍모

가파른 언덕을 오른 끝에 양지바르고 전망이 멋진 자리에 ‘태고사원증국사탑’이 나타난다. 탑비와 함께 북한산이 품고 있는 단 두 개의 보물이다. 고려시대의 기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사리탑은 소박하면서도 멋스럽다. 멀리 노적봉과 백운대, 만경대, 용암대 등의 주요 봉우리들이 한 눈에 시원스레 조망된다.

보우 스님은 살아생전 높은 명성을 얻었지만, 사실 그는 불교를 통해 국가의 기풍을 바꿔보려 했던 개혁가로 기억되야 한다. 그가 활동했던 시대는 공민왕이 쇠퇴의 조짐이 완연한  원나라로부터 고려의 자주성을 확보하려고 몸부림치던 때다. 이에 호응하듯 보우 스님 역시 임제종의 엄격한 선풍(禪風)으로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고자 했다. 선종구산문(禪宗九山門)을 통합하려던 시도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기득권을 틀어쥔 고려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한양 천도의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주장한 것도 보우 스님이다.

공민왕에게 “왕도는 불교의 신앙에 있지 않고 밝은 정치에 있다”고 아뢰었다고 하니, 비록 선불교의 법통을 이어받았지만 그의 두 발은 단단히 땅을 딛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시절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기득권 세력의 반대로 한양 천도 계획은 좌절되고, 공민왕이 요승 신돈을 가까이하며 보우 스님의 개혁적 시도들은 힘을 잃게 된다. 이와 더불어 고려의 국력도 서서히 쇠하며 불교 역시 지는 해처럼 수명을 다 하게 되는 것이다. 신돈의 견제를 피해 은거하다가 신돈이 사망한 후 다시 중앙 무대로 복귀해 우왕의 왕사가 되지만, 대세를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보물 제 749호 '태고사원증국사탑'

 

보우가 뿌린 씨앗, 후대에 꽃 피우다

그러나 보우가 뿌린 개혁의 씨앗은 후대에서 다른 방식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가 주장했던 한양 천도는 얼마 후 선진 유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들의 손에 의해 조선의 개국하면서 실현된다.

또한 수백년이 지난 후 조선 불교를 갱신하고자 했던 만해 한용운이 보우 스님을 재조명한다. 만해에 의해 그가 신라시대 우리나라 불교의 밑돌을 쌓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전통을 이어받은 중시조로 받들어지게 된다.

보우 스님은 자신이 뿌린 통합과 개혁의 씨앗이 훗날 다른 이에 의해 알차게 결실을 맺으리란 사실을 짐작했을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스스로 자신을 삶을 불살라 불교의 참된 길을 구했던 것 자체로 보우 스님의 삶은 아름답게 빛난다. 귀룽나무가 그렇고 생강나무가 그렇듯 온 몸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날려 보내는 것 까지가 나무의 몫, 어떤 씨앗이 싹을 틔울지는 천지의 기운이 알아서 할 일 아니겠는가.

■ 산행코스 : 북한산성입구-대서문-중성문-중흥사지-태고사-원증국사탑-동장대-대동문-호조창지-출발지로 회귀 

 

북한산성의 지휘소였던 동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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