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숨결따라 걷는 북한산 4> 숙종의 길

북한산성 행궁 후원에서 건너다보이는 삼각산 연봉의 우람한 모습.

 
[고양신문]  북한산에 오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가 있다. 바로 ‘성문’이다. 성문을 들고 나지 않고서는 북한산의 주요 봉우리들에 다가갈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북한산 등산 코스를 짤 때는 가장 먼저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을 정하는 것에서 시작하곤 한다.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만들었고, 수원 화성은 정조가 만들었는데, 북한산성은 누가 만들었을까. 바로 조선의 19대 임금 숙종(肅宗, 1661~1720)이다. 숙종은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그리고 숙빈 최씨 등이 등장하는 파란만장한 궁중비사의 주인공으로서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숙종은 46년이라는 긴 재위기간 동안 파당이 갈린 정치세력들을 수차례 교체하며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임금이었다. 대동법의 확대 등 여러 가지 치적을 남겼지만 가장 빛나는 업적은 역시 재위 37년 되던 해(1711년) 국권 수호의 염원이었던 북한산성을 축조한 일이었다. 산성을 완공한 숙종은 이듬해 4월 북한산으로 친히 거둥(임금의 나들이)한다.

숙종의 북한산성 행차길을 따라

테마산행 네 번째 나들이를 떠나는 날, 밤새 단비가 내려 흙이 촉촉하다. 긴 가뭄에 목마름을 호소하던 나무와 풀들도 오래간만에 생기를 되찾았다. 산행하기 더없이 좋은 일기다. 임금의 나들이를 행행(行幸, 행운이 따르는 행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데, 300여 년 후 자신이 밟았던 길을 따라 걷는 후손들에게 숙종이 행운의 기운을 전하는가보다.

도움말을 들려주기 위해 향토사학자이자 고전번역가이며 공양왕고릉제 제전위원장을 맡고 있는 최경순 위원장이 동행했다. 고양을 대표하는 답사·걷기모임인 ‘들메길’을 이끌고 있는 최경순 위원장은 해박한 지식과 친근한 전달력을 겸비한 ‘답사 해설의 달인’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숙종의 북한산 나들이길은 대서문(大西門)을 입구로 삼았다. 거리로 보자면 궁을 출발해 대동문이나 대남문이 더 가깝지만, 행장이 거창한 왕의 거둥이니만큼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방향으로 입구를 잡은 듯하다.
 

향토사학자 최경순씨가 대서문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쓴 대서문 현판

북한산성입구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대서문에 이르자 최 위원장의 첫 번째 해설이 시작된다. 의외로 숙종이 아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다.

“전란으로 피해를 입은 문화재의 복원을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은 1958년 이곳 북한산성 대서문을 방문합니다.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당시 경기도지사가 부랴부랴 인근 공병대에서 불도저를 가져와 북한산성입구에서부터 대서문에 이르는 임시 도로를 만드는데, 그 길이 지금 우리가 걸어 올라온 포장도로가 된 것이지요. 그리고 가까운 곳에 숙소를 급하게 짓고 구름에 오른다는 뜻의 ‘등운각’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나들이가 만족스러웠는지, 이승만 대통령은 대서문에 친필 현판 글씨를 남깁니다.”

20세기의 대통령이 고작 문루 하나를 복원하고도 자부심에 겨워 거창한 행차의 뒷이야기를 남겼으니, 18세기 초에 거대한 축성 사업을 마치고 현장을 방문한 숙종의 감회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숙종은 대서문을 통해 북한산성 안으로 행차한다. 복원된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다.


벅차오른 감격을 시에 담다

숙종은 14살의 나이로 용상에 오른 해부터 북한산성의 축성을 꿈꿨다. 양대 전란을 겪고 나서 왕조와 수도 방어를 위한 새로운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찬성과 반대 의견이 오랫동안 팽팽하게 힘을 겨루다 왕위에 오른 지 37년이 돼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축성에 착수하게 된다. 그리고는 일사천리, 불과 6개월만에 총 길이가 13km에 이르는 장대하고 견고한 산성을 완성한다.

숙종은 북한산성 행차길에 모두 여섯 수의 어제시(御製詩)를 남긴다. 궁을 나서며, 대서문에 도달해, 산영루의 멋진 절경을 감상하며, 행궁에서, 시단봉에 올라, 그리고 다시 궁궐로 돌아가는 길에서 각각의 감회를 담은 시를 짓는다. 대서문에 도달해 지은 어제시를 살펴보자.

서문 들어 사위를 한번 둘러보니
기상과 마음 웅장해져 근심 없어지네
도성 가까이 견고한 금성탕지 있으니
백성 어찌 버리겠나 한양 꼭 지키리라

- 최경순 번역

북한산성은 전란이나 위기가 닥쳤을 때 왕과 도성의 백성이 함께 대피할 목적으로 축성됐다. 긴급 피난처이자 장기 항전을 의탁할 최후의 보루였던 것. 그러니 숙종의 눈에는 과연 산성이 외적을 막기에 충분히 견고하고 튼튼한가에 먼저 눈길이 갔으리라. 단단한 석벽이 산중의 왕국을 빈틈없이 둘러싼 모습을 금으로 만든 성벽과 끓는 못(金城湯池)이라는 표현 속에는 감히 누구도 접근 못할 견고한 방어요새를 향한 염원이 담겨있다.

성벽 안으로 들어서며 펼쳐지는 북한산의 빼어난 절경도 왕의 감격스런 심정을 고양시켰을 것 같다. 왕궁에서 건너다보는 인왕이나 백악, 목멱산의 산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우람하고 당당한 산이 산성 안에 펼쳐져 있으니 어찌 든든하지 않았겠는가.

보다 견고한 방어 위해 중성 축성 명해

대서문에는 찬찬히 살펴보면 조금 독특한 석조 조형물이 있다. 아치형으로 뚫린 출입구 위쪽 좌우에 성 바깥쪽을 향해 돌출한 두 개의 용머리다. 기능상 누각 위쪽의 빗물을 배출하는 배수구 역할을 하는데 굳이 용의 입 모양으로 만든 이유는 뭘까.

“성을 만들 때 인부들은 백성들을 동원했지만, 석물이나 목판 등의 특별한 기술자들은 절에서 전통장인으로서의 명맥을 이어오던 스님들이 담당했지요. 조선이 유교 국가이지만 많은 유형문화재들이 불교 양식으로 제작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저 석조물은 ‘반야용선(불교 설화에서 전해오는 세상을 구원할 용 모양의 배)’을 상징하는 머리 부분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최경순 위원장의 설명을 듣고 보니 북한산성 전체가 조선땅을 위기에서 구할 구원의 방주라는 사실이 새삼 와 닿는다.
 

대서문 바깥으로 돌출한 용머리 형상의 배수구. 최경순 위원장은 '불교의 반야용선'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아닐까 추측했다.

대서문을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면 중성문이 나타난다. 방금 대서문을 통과했는데 왜 또다시 문이 나오는 걸까? 산성 가운데 다시 겹으로 쌓은 중성이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산성에 행차한 숙종은 산성의 전 구간 중 비교적 외적의 공략이 용이한 대서문 방향으로 성을 한줄 더 쌓을 것을 명한다. 중성문은 바로 그 중성의 대문인 셈이다.

“중성의 축조를 지시한 걸 보면 숙종의 행차가 단순한 나들이가 아니라, 북한산성의 구조와 기능을 꼼꼼히 점검한 치밀한 시찰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성문 옆에는 암문과 수문이 나란히 있었다고 하는데, 암문은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이고, 수문 역시 계곡 방어를 위한 구조물이지요.”
 

숙종은 북한산성 행차길에서 대서문 위애 추가로 중성을 축성할 것을 명한다. 중성문 성루의 처마와 원효봉의 자태가 멋지게 어울린다.


행궁 후원에 숨은 비경

산행은 산성 안에 필요한 물자를 비축하기 위한 창고가 있었던 자리인 호조창지를 지나 행궁지에 다다른다. 행궁(行宮)이란 산성 안에 임금이 머무는 거처다. 아쉽게도 지금은 건물은 모두 무너지고 석축과 주춧돌만 남아 과거의 규모를 어렴풋이 짐작케 할 뿐이다.

행궁의 경관은 조금 답답하다. 후면과 측면을 숲이 감싸고 있고, 정면으로는 시단봉이 가로막고 있다. 물론 시단봉 정상에는 군 지휘소인 동장대가 서 있어 궁을 경비하기에 좋은 위치에 행궁 자리를 잡은 듯했다.

최경순 위원장이 꼭 봐야 할 게 숨어있다면서 일행들을 행궁의 뒤뜰로 안내한다. 뒤뜰에 서니 시단봉에 가려 보이지 않던 백운대와 노적봉 등의 삼각산 연봉이 멋진 자태를 보여준다.

“전란중에라도 마음의 평정을 찾으라고 북한산이 행궁의 후원에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허락한 듯합니다. 숙종이 행궁에서 지은 어제시에도 행궁의 풍경이 실감나게 묘사돼 있지요.”

험한 10리길 지나 행궁에 이르니
높다란 시단봉 동쪽 가까이 있네
노적봉 꼭대기 구름 걷히지 않고
백운대엔 안개 흐릿하게 덮여있네

- 최경순 번역

행궁지 후원까지 찾아들어가지 않았다면 숙종의 감회를 공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행궁터를 답사하고 있는 고양신문 독자산악회원들.


허망하게 무너진 행궁의 쓸쓸함

북한산성의 축성은 외적의 침략에 대비한 국방사업일 뿐 아니라, 나라 살림을 활발하게 촉진하려는 거대한 국책사업이기도 했다. 축성에 동원된 인력은 일반 백성들이었지만, 기술자들은 급여를 지급받고 작업에 동원됐다. 대규모 공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물류도 원활히 유통돼야 했을 터. 권력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당파들과의 팽팽한 줄다리기에서 우위를 점한 숙종은 북한산성이라는 숙원사업을 통해 강고해진 왕권을 만천하에 과시한 것이다.

하지만 강고한 번영을 꿈꿨던 조선 왕조는 이후 200년을 버티지 못하고 몰락을 맞는다. 산중의 왕국을 지키던 행궁도 ‘을축년 대홍수’라고 이름 붙여진 큰 비에 산사태에 휩쓸려 1925년에 무너지고 만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시절에 행궁이 무너져 내린 것이 다만 우연의 일치일까? 최경순 위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국권을 상실하니 북한산성의 관리도 무주공산의 지경이 되었어요. 백성들이 산성 안까지 들어와 마구 벌목을 해서 행궁 주변도 벌거숭이산이 돼버렸어요. 그러니 집중 호우를 견디지 못하고 산사태가 북한산 골짜기를 휩쓸어버린 것이지요.”

그렇구나. 아무리 축대를 견고히 쌓고 주춧돌을 단단히 놓아도, 행궁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이 튼튼히 땅에 뿌리를 박고 있지 않으면 무용지물. 국가를 지탱하는 것이 소수의 집권층인 것 같지만, 갑남을녀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지 못하면 결국 속절없는 게 아닐까. 황량한 행궁터에 서서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라는 동산에 심겨진 나무들의 뿌리는 과연 안녕한가를 잠시 생각해본다.

▶ 산행코스 :  북한산성입구 - 하창지 - 대서문 - 중성문 -산영루 - 호조창지 - 행궁지 - 남장대지 - 청수동암문 - 삼천사
 

대서문 안 옛 북한동 마을에 유일하게 보존돼 있는 가옥. 마당에 앵두가 붉게 익었다
남장대지 주변 언덕마루의 쉼터
남장대지에서 바라본 삼각산 봉우리. 성능대사의 '북한지' 지도에 그려진 백운봉, 인수봉, 만경대의 모습과 유사한 경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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