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숨결따라 걷는 북한산 3> 청장관 이덕무의 길

정통 성리학 견지하면서도 진취적 인사들과 벗삼아
자신의 자리 지키며 최선 다 한 '아름다운 삶'

 

염초봉 아래 자리한 상운사. 대웅전 왼편으로 수령 400년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향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양신문] 몇 해 전만 해도 낯설었던 단어인 ‘미세먼지’의 공습에 꽃다운 봄날이 맥을 못 춘다. 다행히도 고양신문 테마산행 세 번째 나들이를 나서는 날에는 파란 하늘이 반가운 얼굴을 보여줬다. 오늘의 인물은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덕무(李德懋)다. 호는 청장관(靑莊館), 형암(炯庵), 아정(雅亭) 등 여럿이다. 낯선 이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체적인 삶과 업적이 익숙하게 떠오르는 이도 아닌 그가 새삼 반가운 이유는 북한산에 대한 2박3일간의 답사 기행문인 ‘유북한기’를 남겼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전공한 이왕무 경기대학교 교양학부 교수가 산행길에 동행하며 도움말을 들려주었다.

신분 굴레에 갇힌 쓸쓸한 생애

세 번째 테마산행의 출발은 박태성 효자비가 서 있는 고양시 효자동 입구다. 온전히 고양시 구간만을 밟아 북문을 거쳐 원효봉에 올랐다가 목적지인 상운사로 향하기로 한다. 골짜기에는 물이 말라 계류 소리가 멈췄다. 미세먼지도 그렇지만 봄 가뭄도 심각해 산 전체가 갈증을 호소하는 듯하다.   

산길을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길라잡이인 이왕무 교수가 이덕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덕무는 18세기 영·정조 시기를 살다 간 인물. 1741년에 태어나 1793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일찍부터 뛰어난 학문과 아름다운 시문으로 이름을 알린 그였지만, 삶은 무척 빈한했나보다.

“이덕무의 생애를 생각하자면 안타깝고 쓸쓸한 마음이 앞섭니다. 왕가인 전주 이씨의 일족이지만 존재감 없는 조선의 2대 왕 정종의 가문이니 한미한 출신이 아닐 수 없지요. 게다가 서출의 후손이었습니다. 조선이 어떤 나라입니까. 한번 서출의 자손이면 후손 대대로 신분의 제약이 따라다니는 지독히도 견고한 혈통주의 사회였으니 아무리 머리가 좋고 문재가 뛰어난 이덕무라 한들 세상에 뜻을 펼칠 멍석조차 깔아보지 못했던 거지요.”

산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초청 강사로 모신 경기대학교 이왕무 교수로부터 이덕무와 북한산의 인연에 대한 개괄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다.
생태 해설사인 고양신문 독자산악회 임철호 대장이 거위벌레의 알집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다. 몸집이 작은 거위벌레는 참나무과 나뭇잎에 알을 낳은 후 자기 몸보다 훨씬 큰 나뭇잎을 기막힌 솜씨로 돌돌 말아 알집을 만든후 땅 위로 떨어뜨린다. 알은 부화한 후 알집 역할을 하던 나뭇잎을 갉아먹으며 애벌레로 자란다.

 
책을 벗하며 마음을 삼가다

이덕무에게는 특기할만한 스승도 없었다. 모든 공부를 독학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연행길에 동행해 중국의 지식인들과 필담을 나누며 정보를 교류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스스로 갖췄다. 결국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정조가 규장각의 검서관 자리를 그에게 맡긴다. 왕명으로 발간하는 모든 공식 책자를 검토하고 편집하는 일이니 책벌레인 그에게 맞춤이긴 하다.

말직을 얻었지만 생활고는 평생 그를 괴롭혔다. 그에게는 가난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이 따라다닌다. 동생이 영양실조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애끓는 심정을 참담하게 글로 옮기기도 했고, 겨울밤 추위에 잠을 이루지 못해 서가에 꽂힌 ‘한서’와 ‘논어’ 책자를 이불과 병풍 삼아 둘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식량이 떨어져 며칠을 굶다가 결국 가장 귀하게 여기던 책을 내다 팔아 한 끼 밥을 배불리 지어먹으면서도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마음을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오로지 책을 읽고, 스스로를 삼가며 마음의 평정을 흐뜨러뜨리지 않는 삶. 자의든 타의든 그게 이덕무가 평생을 견지한 인품의 풍경이었나보다.

2박3일 동안 발품 팔며 산행기 남겨

한참 오르막길을 오르다보니 비로소 사방의 시야가 트이며 북문에 다다른다. 북문에서 원효봉까지는 불과 10여 분 거리. 그늘에 앉아 점심을 나누며 이덕무의 북한산행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조선의 많은 문인들이 북한산의 명승을 노래했지만, 이덕무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다른 이들이 특정한 장소를 찾아 한나절 산세를 구경하고 개인적인 감흥을 읊은 작품을 남긴 것에 비해 이덕무는 21살 무렵인 영조 37년, 그러니까 1761년 9월 30일부터 2박3일동안이나 북한산성 안을 꼼꼼하게 답사합니다. 그리고는 ‘유북한기’라는 자세한 산행기를 남깁니다.”

등산장비도 없던 시절, 산속에서의 3일간의 일정을 어떻게 소화했을까. 정답은 절과 절을 거점 삼아 이동하는 것. 이덕무의 산행기는 어떤 면에서는 사찰 순례기에 가깝다. 당시 북한산성 안에 자리잡고 있던 대부분의 사찰과 암자를 들르며 휴식과 식사, 숙박도 절에서 해결했다. 다른 선비들이 세검정이나 평창동, 탕춘대, 기껏해야 진관사 정도를 찍고 돌아간 것에 비해 그의 북한산 답사는 무척 꼼꼼하고 바지런하다. 

원효봉 능선을 타고 오르면 어느 순간 시야가 트이며 북문이 나타난다. 문루가 사라져 조금은 쓸쓸한 느낌을 자아낸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

그렇게 오래 북한산에 머물며 구체적인 기록까지 남긴 이유는 뭐였을까. 아쉽게도 그 까닭은 직접적으로 감지되지 않는다. 산행기 내내 이덕무는 무척 담담한 어조로 풍경과 사실을 기록할 뿐이다. 개인적인 감흥이나 사적인 견해는 최대한 개입시키지 않으려 했음이 여실하다.
“당시는 겸재 정선으로 대표되는 진경산수의 시대였습니다. 진경산수는 단순히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시선과 경향이지요. 단원 김홍도와 고산자 김정호가 살던, 내가 누구인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고 싶어하던 시대였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땅의 참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림이나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 이덕무의 발걸음에도 깃들어 있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 볼 뿐입니다.”

사실 그는 보수적인 유학자이기에 자칫 불가에 대한 폄하의 심경을 드러낼 법도 한데, 그의 문장 어디에도 그런 편견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산중의 질서를 구성하는 불가의 예법에 대한 존중의 태도가 드러난다.

이덕무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발로 걸어 다녔다. 양반들이 대개 나귀나 하인들의 힘을 빌려 산행을 한 것에 비해 이덕무는 전형적인 뚜벅이 나들이꾼이다. 물론 빈한한 형편이 직접적인 이유였겠지만, 두 발로 쓴 산행일기야말로 세상의 모든 것을 직접 두 눈과 발로 밟아 이치를 궁리하는 이덕무의 학문적 태도에 더없이 어울린다.

전망 좋은 원효봉, 향나무 멋진 상운사

원효봉 정상에 서니 뒤편으로 염초봉과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이 저마다의 위용을 자랑하며 어깨를 걸고 서 있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뤄진 북한산의 우람한 봉우리들은 늘 그렇듯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남서쪽 풍광은 또 어떤가. 창릉천을 중심으로 한 물길과 바람길이 지축과 삼송, 도래울과 가라뫼와 능곡 들녘을 거쳐 멀리 한강까지 이어지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북한산과 고양땅이 하나의 생태적 띠로 이어지는 모습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더듬는 경험이야말로 다리품을 판 수고를 넉넉히 보상받고도 남는, 원효봉이 건네는 최고의 선물이다.

원효봉에서 조금 내려와 좁은 돌계단을 오르니 상운사가 나타난다. 상운사는 북한산성을 축성한 계파스님을 비롯해 많은 승군들이 머물렀던 사찰 중 하나였다. 무너진 절집을 다시 지은 까닭에 유서 깊은 건물은 없지만, 절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살아있는 유물이 나들이꾼을 맞는다. 수령 400년의 거대한 향나무다. 노거수의 피로감을 찾을 수 없는, 웅장하고 푸르른 기상을 당당히 유지하고 있는 향나무의 자태야말로 고양을 대표하는 나무로 손꼽아도 손색 없을 듯. 

상운사 주지 진만스님의 안내로 식당에 자리를 잡는다. 물맛이 주지스님의 정성인양 시원하고 달다. 이왕무 교수가 번역한 이덕무의 산행기 ‘유북한기’를 나눠 들고 본격적으로 이덕무의 동선을 상상속에서 따라가본다.

원효봉에서 바라본 북한산 암봉들. 왼쪽부터 백운봉, 만경봉, 노적봉. 이덕무는 ‘유북한기’에서 이 세 봉우리를 ‘삼각산’이라 일컫는다고 밝히고 있다.
상운사 향나무의 압도적인 풍채. 고양을 대표하는 나무 중 하나로 손꼽아도 손색 없을 듯.

  
붓을 카메라 삼아 풍경과 정보 남겨  

서두에서 이덕무는 산행기 전체의 여정과 함께 북한산이 백제의 고도이며, 조선 태조 이성계가 군사를 훈련한 역사적 장소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여정은 세검정, 소림암, 문수사, 보광사로 이어지고 태고사에서 첫 날의 일정을 마친다. 고양신문 테마산행 4월의 방문코스가 태고사였으니 5월 산행의 예습을 제대로 한 셈이다. 소림암을 언급한 부분에서는 이덕무가 10대 시절에 북한산에 이미 다녀갔음을 유추할 수 있는 문장도 발견된다. 아마도 북한산은 이덕무에게 시차를 두고 다시 찾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공간이었나보다.

둘째 날의 여정은 용암사와 중흥사를 거쳐 산영루, 부왕사, 원각사, 진국사를 차례로 들른 후 원효봉 중턱의 상운사에서 여장을 푼다. 이덕무가 북한산 나들이의 감흥을 가장 깊이 음미했을 시간과 장소인 상운사를 5월 테마산행의 종착지로 잡은 이유다.

고양신문 테마산행을 함께 한 일행들이 상운사에 들러 이덕무의 행적을 함께 공부했다. 상운사는 이덕무가 산행 둘쨋날 밤을 묵은 곳이다. 사진 왼쪽 세 번째가 이왕무 교수, 네 번째가 상운사 진만 주지스님.

 
둘째 날 산행기 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용암사에서 삼각산이라는 이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내용을 옮겨보면 이렇다. ‘…북쪽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큰 것이 셋이니, 백운봉, 만경봉, 노적봉이다. 그러므로 삼각산이라 부른다. 인수봉과 용암봉은 작은 것이다(이왕무 교수 번역).’ 삼각산의 세 봉우리는 모두가 백운대·인수봉·만경대라고 알고 있는데, 이덕무는 인수봉 대신 노적봉을 명토 박아 넣고 있는 것. 문장 하나, 글자 한 획도 허투루 쓰지 않은 이덕무가 인수봉과 노적봉에 대해 함부로 말하진 않았으리라. 이 대목에 대해 테마산행 참가자들이 의견을 주고받았다. 아마도 행궁을 중심으로 또 하나의 산속 영토를 이루고 있던 북한산성 내부에서는 만경대 어깨너머 정수리만 보이는 인수봉 대신 눈앞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노적봉을 삼각산의 한 축으로 일컬었던게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그렇다면 인수봉의 ‘작음’도 높이의 작음이 아니라 중요도 측면에서의 작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마지막 날 이덕무는 지금은 절터만 남은 서암사를 들른 후 대서문으로 나가 진관사에서 일정을 마무리한다. 

아름답고 거침없는 자유의 경지

이덕무는 편의상 실학자, 북학파로 분류되지만 사실 평생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하며 근본적인 가치를 보수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단다. 이왕무 교수는 그의 성향적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출신 성분으로 인해 출세의 길이 막힌 사람들이 오히려 보수화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사회적으로 취약한 신분이기에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심한다고 할까요. 하지만 그는 박제가, 유득공 등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인사, 그리고 무인 백동수 등 자기만의 실용적 기예를 갖춘 이들과 진한 우정을 나누며 평생 친구로 지냈습니다. 벗들을 통해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투영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개혁적인 인사들과 허물없이 소통하면서도 이덕무는 끝끝내 자신의 자리에 자족하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다. 평생 동안 받아들이기 힘든 신분제의 벽, 떨치지 못한 가난, 대가는 적고 책임은 막중한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늘 책을 읽고, 마음을 다스리며,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삶의 자세를 견지한 이덕무의 일생을 이왕무 교수는 한마디로 “아름다운 삶”이었다고 평한다.

다시 질문한다. 이덕무는 왜 북한산을 찾았을까. 어쩌면 세속의 세상이 선물해주지 않은 자유의 경지를 북한산의 영토 안에서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양반으로서의 허위의식을 다 털어버리고 맨발로 북한산의 구석구석을 누빈 2박3일의 나들이 여정이야말로 이덕무가 누린, 아름답고 멋진 생의 한순간은 아니었을까.  

산행코스 : 효자동 박태성 효자비 앞 - 원효봉 능선 - 북문 - 원효봉 - 상운사 - 북한산성계곡탐방로로 하산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원효봉 정상에서. 선인들의 숨결 따라 걷는 북한산 테마산행은 매 월 둘째 주 토요일에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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