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숨결 따라 걷는 북한산> 307년 역사 품은 고양의 보물 북한산성

동장대 능선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삼각 영봉. 험준한 산세를 지혜롭게 활용해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며 이어진 산성의 곡선이 장엄하다. <사진제공=이재용>

 

[고양신문] 숨가쁘게 돌아가는 현대인의 일상에서 시간은 그저 손가락 사이의 모래알처럼 ‘흔적 없이 새어나가는’ 무엇이다. 무감각해진 시간의 결을 시각과 촉각으로 더듬고 싶다면, 북한산성을 찾아가자. 성역 전체가 온전히 고양땅에 자리한 북한산성.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터전 바로 곁에 307살 나이를 먹은 성곽이 여전히 든든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고맙고도 신비한 일이 아닌가.

위기에서 나라를 지킬 보장처를 마련하라

북한산성은 숙종 37년(1711년)에 약 6개월에 걸쳐 축성됐다. 산성의 둘레는 11.7km로 축성 당시의 단위로는 7620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중 험준한 산세의 암반을 그대로 천연 성벽으로 사용한 구간이 3km에 이른다. 품고 있는 너비는 약 200만평이다. 이토록 장대한 성채를 짧은 기간에 완공했으니 날림공사가 아닐까 생각하면 오산이다. 축성 이전에 30여년이 넘는 긴 시간을 투자해 논의하고, 설계하고, 기술적 준비를 갖춘 세월이 있었기에 그토록 짧은 기간 안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 전체 구간을 3개 구역으로 나눠 훈련도감과 어영청, 금위영 등 3개 군문에 각각 책임을 지고 축성을 진행하도록 한 것도 효율적이었다. 3군문은 또다시 구간을 세밀하게 나눠 각각의 책임자로 하여금 공기와 공정을 담당하게 했다. 엄격한 공사실명제를 적용한 것이다.

북한산성은 크게 세 가지 목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산성이다. 전란이 일어나면 임금와 왕실의 안전을 도모하는 보루이자, 도성 주민이 전란을 피해 지낼 수 있는 대규모 피난처로서의 요건을 충족시켜야 하며, 더불어 적과 대항해 싸울 방어전투용 요새의 역할을 해야 했다.

북한산성 축성의 첫 번째 원칙은 북한산의 험준한 봉우리들 자체를 자연 성벽으로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었다. 대서문과 수문처럼 지대가 낮은 곳부터 높게는 해발 700m의 봉우리 능선까지 이어졌다. 또한 고도와 경사도에 따라 성벽의 높이를 달리해 경사가 낮은 곳은 성벽을 높이 쌓고, 경사가 기운 곳은 비교적 낮게 쌓았다. 이처럼 북한산성은 숙종 당대의 토목 기술과 군사 방어전략을 집대성한 결과물이었다.

분업화·전문화로 난공불락의 성채 완성

성곽 축조의 과정은 크게 터 닦기, 채석, 석재 다듬기, 운반, 체성 쌓기, 여장과 치성 쌓기, 그리고 성문 올리기의 순서로 진행됐다. 터 닦기는 말 그대로 성벽을 지탱하는 지반을 다지는 공사로, 북한산성의 경우 화강암반을 다듬어 터를 잡았는데, 토질이 약한 부분에선 점토와 돌을 사용해 지반을 다지기도 했다. 터 닦기를 담당하는 책임자를 치도패장이라 불렀다.

성벽 쌓을 돌을 떼어내고 다듬는데는 바위산인 북한산의 풍부한 석재를 사용했다. 북한산의 지질을 형성하는 화강암층은 성벽 축성에 가장 적합한 건축재였다. 지금도 북한산 곳곳에서는 석재로 사용하기 위해 돌을 떼어낸 흔적들이 발견되곤 한다. 돌을 떼어내고 다듬는 전문가는 각각 부석패장과 석수편장이었다.

석재를 운반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맨몸으로도 오르기 숨찬 산악지대를 사람의 힘으로 무거운 돌덩이를 날라야 했다. 성돌 하나의 무게는 자그마치 270kg에서 480kg에 이르렀다. 이 돌들을 운석패장의 책임 아래 8명에서 16명에 이르는 인원이 한 조가 돼 작업을 진행했다.

돌이 날라졌으면 본격적으로 성곽을 쌓을 차례. 성곽은 크게 본체인 체성과 군사 방어용 돌담인 여장으로 구분되는데, 체성은 바깥쪽은 석축으로 쌓고, 성체 안쪽은 돌과 흙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쌓았다. 물론 지형과 경사도에 따라 다양한 응용방식이 적용됐다. 여장은 군사들이 몸을 은신하며 전투를 벌일 수 있도록 1m 높이로 체성 위에 쌓은 돌담이다. 여장에는 총구 역할을 하는 원총안과 근총안을 뚫었고, 상단부는 넓은 판석을 겹겹이 덮었다. 여장은 비교적 작은 돌로 쌓은 까닭에 석회와 황토를 혼합해 접합면을 메우기도 했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전투에 유리하도록 만든 시설을 말한다. 대체로 성문과 성문 사이에 한두개씩 치성을 배치했다. 마지막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에 대문을 그 사이에 암문을 배치했다. 대문에는 웅장한 문루를 올려 비로소 외형 공사를 마무리했다. 완성된 성곽은 이전 시대에 쌓은 성들과는 규모와 견고함에서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을 보여준다. 숙종 시대의 발달된 축성기술이 밑바탕이 되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양대 전란 이후의 전쟁 양상과 무기 체계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방어 개념의 전환이었다.

무기 발달에 따른 성곽 축조의 변화

‘성곽 국가’ 조선의 성곽을 알려면 각 시기를 대표하는 4개의 성을 살펴야 한다. 건국 초기에 축조된 한양도성, 인조 시대에 증축된 남한산성, 숙종때 완성된 북한산성, 그리고 후기 정조 시대의 수원 화성이다.

각각의 성들은 그 시대의 문화와 기술력은 물론, 당대의 전쟁 양상과 방어전략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대체로 후기로 갈수록 성돌의 크기는 커지고 체성의 구조는 견고해졌다.

건국과 함께 만들어진 한양도성은 방어용 요새라 하기에는 많이 허술했다. 몇 차례 중건이 이뤄졌지만, 그 자체로 안심할 수 있는 도성민의 보장처가 되지 못했다.

조선 초기의 군사 방어기조를 살펴보면 전쟁이 나면 왕과 왕실이 식량을 싸들고 안전한 성으로 피신해 적들이 돌아갈 때까지 버티는 게 기본 작전이었다. 왕실만 보전되면 나라는 지켜지는 것이란 생각이었던 것. 그래서 선택된 곳이 남한산성과 강화도였다. 남한산성은 활을 주력무기로 사용하는 전쟁에 대비한 산성이라 성벽의 두께보다는 높이에 신경을 쓴 성이었다.
 

청수동암문 부근의 산성. 골짜기를 돌로 메워 터닦기를 한 후 체성을 쌓아올렸다. <사진제공=이재용>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방어 개념에 변화가 온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가자 백성들의 강한 이반이 일어났고,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쓰라린 치욕을 겪어야 했다. 왕실만 보전되면 나라가 존속된다는 이전의 개념은 이제 효력을 상실한 것이다. 동시에 백성과 왕실이 함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크고 견고한 피난지가 필요했던 것. 그러한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성이 바로 북한산성이다. 북한산성은 당시 15만 명이던 한양 인구의 절반 이상이 함께 피난 올 수 있도록 계획된 성이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북한산성이 화약이 전쟁무기로 사용된 이후에 축성된 성이라는 점이다. 당시 중국에는 홍이포, 서양에는 불랑기라는 화포가 발명돼 전쟁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주력 무기가 활에서 대포로 바뀐 것이다.

무기 변화는 산성 건축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꿨다.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큰 성돌을 써야 했고, 축석 방식도 두껍게 쌓은 체성 사이사이에 긴 돌을 질러 넣어 견고하게 했다. 높이는 낮아졌지만 두께를 두껍게 쌓아 적들의 화포 공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축성한 덕분에 지금까지도 북한산성의 체성은 300년의 세월을 이겨 내고 거의 대부분의 구간에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경사가 가파른 지형에서는 자연석을 최대한 활용했다. <사진제공=이재용>
성벽이 곡성을 그리며 돌아가는 부분에서는 정교하게 깎은 성돌이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견고함을 더했다. <사진제공=이재용>

 
하지만 후기로 들어서며 군사 편재와 방어 시스템에 또다시 변화가 생긴다. 영토 수호 개념이 형성되면서 국경지역의 직접적인 방어 체제로 바뀌면서 북한산성의 군사적 용도가 애매모호해지고 만다. 그토록 견고하게,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쌓은 북한산성이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편으로 일찌감치 물러선 것은 어쩐지 섭섭하다.

돌덩이 하나하나에 밴 민초들의 눈물

하지만 북한산성의 구조와 형태적 특징을 살피는 것만으로 북한산성에 대해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북한산성을 만든 공로가 숙종, 또는 소수의 토목 전문가들의 몫으로 돌아가선 안된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밑바닥의 힘은, 그것이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결국 민초들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 북한산성의 축성도 마찬가지여서 산성의 축성에 수많은 백성들이 땀과 피를 흘렸다. 북한산성을 쌓는 노역에는 전문기술자, 삼군문의 군사, 도총섭 성능대사 휘하의 승군과 함께 도성에 사는 양민의 집에서 각 호당 1명에서 3명까지 장정을 징발해 부역에 참여토록 했다. 약 4만명의 인력이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들은 매일 아침 각자 먹을 것을 싸 들고 축성 현장으로 출근해 힘겹고 위험한 노역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자부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저 아름답고 든든한 성곽의 돌 하나하나에는 무명옷과 짚신 차림으로 허리끈 졸라매고 목숨을 내 건 노동의 현장을 버텨 낸 선조들의 희생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북한산성을 다만 ‘숙종의 성’이라 부를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현재 북한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서는 잘 보존된 유형의 문화재가 있어야 하고, 역사적 기록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문화유산과 긴밀히 소통하며 현대적 의미를 생산해야 한다. 소통과 의미의 핵심에 민초들의 땀과 눈물이 자리하도록 하는 게 우리들의 과제가 아닐까.
 

▲ 도움말 : 박현욱 - 북한산성 유적을 연구·발굴하며 가치와 의의를 알리고 있는 북한산성문화사업팀 연구원.
▲ 사진제공 : 이재용 - 8년째 북한산성과 관련된 사진을 찍으며 다수 전시를 연 북한산성 전문 사진작가.
 

지난 8일 고양신문 테마산행 참가자들이 산성으로 이어지는 바위길에서 문무에 싸인 의상능선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사진제공=이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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