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종 기자의 골목나들이] ② 삼송동 숫돌고개 서쪽마을
[고양신문] 오래된 마을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방법은 ‘길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새 도로가 어떻게 생겨나고 가지를 쳤는지 살펴보면, 마을이 변모해 온 자취를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흥미롭게 실감할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덕양구 삼송동 구도심이다.
지금은 사라진 지명인 ‘고양군 신도읍’의 중심지였던 삼송 구도심은 3호선 삼송역을 중심으로 가로축과 새로축이 마을 지도를 4등분 하고 있다. 남북 방향으로 통일로가, 동서 방향으로 삼송로~지축로가 교차하기 때문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삼송 구도심 지도의 1/4분면에 해당하는 삼송로 북쪽, 통일로 서쪽 마을을 중심으로 ‘길의 변천사’를 짚어보려 한다.
조선시대 한양~의주 잇던 ‘의주로’
마을에서 오랜 정취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길은 지도에서 ①번으로 표기된, 구도심 상점가거리에서 시작해 숫돌고개 언덕까지 이어지는 삼송로193번길이다. 신도읍 시절 큰길가에 형성된 상점가가 오르막을 타고 골목길 위쪽까지 이어져 있어서 ‘시장길’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는데 지금은 방앗간과 쌀가게, 음식점 몇 곳만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했던 과거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이 골목에는 가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오래된 집들과 담벼락 벽화들을 살피거나 사진을 찍는 방문객들이 지나곤 한다. ‘경기옛길 의주길 제1길 벽제관길’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의주길은 조선시대 한양을 출발해 고양~파주~개성~평양을 지나 평안북도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의주로 이어졌던 길이다. 한양도성을 출발해 중국으로 올라가는, 또는 그 반대로 내려오는 양국의 사신단이 걸었던 길이라 국가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골목 꼭대기 숫돌고개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원근을 이끌고 온 이여송 부대가 전투에서 패하고 칼을 갈았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미군 공병단 주둔하며 군부대마을 형성
하지만 마을 토박이들에게 이 골목길은 ‘군부대마을’이라는 이름으로 각인돼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공병부대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가 주둔한 지역에는 어김없이 부대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됐고 마을 경제가 돌아갔다. 일반 주택가와 달리 대문과 마당을 생략하고, 문을 열면 바로 골목으로 연결되는 건물 구조가 경기북부 군부대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삼송역에서 바로 이어지는 이 골목길은 벽화마을을 만들고, 의주로 탐방로를 조성하고,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는 등 새로운 모습으로 정비하는 시도가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곳이 한때 군부대 마을이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공간 스토리텔링의 기원을 먼 조선시대, 또는 일제강점기에서만 찾으려는 경향이 우리나라 문화 행정의 습성인 것 같다. 실제로는 한국전쟁 이후의 근과거가 현재의 풍경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결정적인 요인인데도, 그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간과하거나 의도적으로 생략하곤 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신작로 ‘1번 국도’
①번 길이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골목길이라면 ②번 길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신작로다. 일제는 한반도를 종횡으로 잇는 간선도로를 만들고 번호를 붙였는데, 남쪽 끝 목포에서 출발해 전주~대전~서울을 거쳐 평안북도 신의주를 잇는 길이 ‘1번 국도’가 됐다. 그 1번 국도가 창릉천을 건너 숫돌고개로 올라간 흔적이 바로 지도에서 ②번으로 표기된 삼송로 205번길이다.
사실 경기북부는 의주로를 기반 삼아 1번 국도를 만들었고, 이후 1번 국도를 정비해 통일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세 길이 겹쳐지는 구간이 많다. 지도의 ②번 신작로 역시 ③번과 겹쳐져 고개 넘어 신원리로 이어졌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간별로 과거 길의 흔적이 남아있어 골목 나들이에 재미를 더해준다. 통일로가 정비되기 전 버스가 다니기도 했다는 ②번길을 걷다 보면 오래된 가축병원, 종묘상, 삼송4·5통 마을회관과 경로당 등을 만날 수 있고, 통일로와 만나는 끝부분에는 삼송의 랜드마크 종교건물인 삼송교회의 새 건물과 옛 건물이 사이좋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70년대 대통령 지시로 닦은 ‘통일로’
지도의 ③번 길은 1972년 완공된 통일로다. 자유로가 생기기 전 고양의 대표 도로였던 통일로는 반세기 넘도록 서울~고양~파주를 남북으로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도로로 기능하고 있다.
통일로의 탄생을 짚어보려면 1970년대 초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린 남북적십자회담을 언급해야 한다. 당시 체제경쟁에 목숨을 걸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남한이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북한 대표단이 지나는 길을 확장·정비하라고 지시했다.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1년 만에 서울역에서 판문점까지 직선으로 시원하게 뚫린 57km의 대로에 박 대통령은 친히 ‘통일로’라는 휘호를 남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기에 놓은 신작로가 전부일 만큼 열악했던 고양과 파주에서 통일로의 개통은 도로망의 획기적 진일보였다. 삼송 구도심도 이때를 계기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마을 규모가 확장되며 비로소 읍소재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통일로 주변의 주택 정비도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삼송 구도심에는 똑같은 면적(50여 평)의 대지에 똑같은 설계로 지어진 삼각지붕 단독주택들이 많은데, 1970년대 후반에 주택정비사업을 통해 지어진 이른바 ‘문화주택’들이다. 마을에서 만난 토박이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통일로변의 삼송주택과 공무원주택은 남북회담을 의식한 전시주택으로 지어졌고, 삼송 구도심 안쪽의 주택들은 주말마다 한양CC로 골프를 치러 다녔던 박대통령이 “마을 경관을 개선하라”는 지시를 내려 당시 고양군수의 주도로 200여 호가 동시에 지어졌다고 한다.
90년대 시원하게 뚫린 삼송로~지축로
삼송에서 원당 방향으로 이어진 삼송로(지도 ④번)가 넓은 도로로 정비된 것은 1990년대 초의 일이고, 이어 지축에 지하철 3호선 차량기지가 생기고, 삼송역이 개통한 후 1990년대 말에 삼송로와 지축로(지도 ⑤번)가 횡으로 연결된다. 신호 없이 통일로를 건널 수 있도록 지하차도가 뚫린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오늘 살펴보고 있는 지도에서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도로는 통일로 직선화 작업을 통해 2019년 개통된 ⑥번 도로다. 이 길이 뚫리면서 왼쪽으로 포켓처럼 남은 구간은 ‘통일로 옛길’로 흔적을 남기게 됐다. 현재 이 길은 미군 공병대의 역할을 이어받은 육군 공병부대인 독립문부대와 군 관사단지가 거의 전용도로처럼 사용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삼송 구도심 도로변천사를 일별해보면, 마을의 주 도로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숫돌고개 경사면을 깎아 들어가며 점점 직선화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통수요의 증가와 토목기술의 발달이 도로의 변천사 속에 배어있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는 오랜 풍경들
사실 삼송 구도심은 2010년대 초 삼송지구 택지개발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면 재개발이 시도됐었다. 하지만 보상을 둘러싼 주민들과의 입장차로 인해 결국 삼송지구 아파트단지와 주상복합 빌딩들은 구도심 주변부를 둘러싸는 형태로 들어섰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누군가는 도시 기능적 관점에서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도 많고, 반대로 과거의 흔적이 남아 다행이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후에도 여러 번의 재개발 시도가 있었는데, 과거와 여건이 달라진 지금 구도심 전체의 재개발은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토지주가 개별적으로 새 건물들을 지으며 삼송 구도심 골목의 오랜 풍경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다. 자주 찾아가서 좀 더 많이 사진을 찍어두고 싶은 이유다.
▶삼송 구도심 골목에서 만난 풍경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