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부터 이룬 마을 지금까지 이어져

 이곳 흥도동에는 모두 3곳의 법정동이 있다. 우선 시청이 있는 원당에서 구파발, 삼송동 방향에는 원흥동(元興洞) 마을이 있다. 그리고 다시 이곳에서 화전 방향에는 도내동(道乃洞)이 있으며 원당과 도내동 사이의 성사동(星沙洞) 일부 지역이 흥도동에 속해 있다. 이 세곳 모두 개발제한구역 (그린벨트)에 묶여 있어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이 흥도동에는 아파트는 물론 3층 이상의 건축물을 찿아보기 어렵다.

*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자연촌락의 마을

흥도동의 여러 마을들은 대부분 산기슭 아래에 자연촌락의 형태로 주택이 자리하고 있다. 시청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원흥동의 경우 최고봉인 건지산 기슭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산 위에서 보면 마을 전체가 산과 숲에 둘러싸인 모습이다.
원흥동에는 서삼릉 입구의 솔개(송현동)마을과 나무드머리 마을, 가시골 마을이 있다. 마을에 곳곳에 자리해 있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무덤과 유적을 통해 볼 때 원흥동은 고려조 이전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도내동의 경우도 봉제산과 서촌 도당산에서 보면 마을의 앞으로는 창릉천이 흐르고 그 사이에는 마을과 논ㆍ밭이 있는 농촌마을 모습이다. 도내동은 석탄촌 마을  동촌 서촌  샛말 서재동 은못이 방성뫼의 자연촌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선시대의 이석탄(이신의)장군 유적으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성사동은 대부분의 주택이 성라산 국사봉 남ㆍ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일명 다른 지역에서는 베라산이라 부르는 곳이며 흥도동의 동사무소도 이곳에 위치해 있다. 

*조선 영조 때 200여 호

조선조 후기 영조 때 발간된 고양군지를 보면 당시 이 흥도동 지역의 집(호)수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지금의 원흥동 지역에는 총 81호가 , 도내동 지역에는 총 86호 그리고 성라산촌에 대략 35호가 있어 총200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마을 이름도 지금과 큰 차이가 없어 이들 자연촌락 마을의 오랜 역사를 문헌기록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이곳의 기록 중에서 비중있게 기술하고 있는 것은 이신의 장군의 장대가 있다는 도내동의 기록을 비롯하여 이축 선생의 은지 , 그리고 장해익이 쌓은 창릉천의 제방기록에 관한 내용이다.

*문화유산과 집성촌 마을 곳곳에 있어

 흥도동 내에는 여러 문화재가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우선 원흥동의 옛 도자기 가마터는 고려시대의 역사와 문화수준을 알 수 있는 유적이며 김전의 묘와 신도비, 그리고 한규설 묘역, 심희수 선생의 교지와 묘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외에 성사동의 익령군 이치 묘소도 최근 고양시 문화재 심의에서 지정이 의결되었다. 도내동의 유적으로는 먼저 이신의 선생의 장대비와 묘소가 있고 은못이 마을의 이축 선생묘소와 은지 연못이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동족이 함께 사는 집성촌의 경우 원흥동에는 경주정씨, 연일정씨, 전주이씨 등이 있으며 성사동에는 인동장씨. 의령남씨가 그리고 도내동에는 인동장씨, 김해김씨, 원주원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삼송신도시에 원흥동 일부 포함돼
원흥동의 솔개 마을과 가시골 마을 일대는 최근에 발표된 삼송신도시 개발 지역에 포함되어 앞으로 큰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오랜 기간동안 자연촌락의 모습을 유지하여 오던 이곳 원흥동의 마을을 비롯한 흥도동의 여러 마을은 계속되는 개발의 압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마을의 변화에서 이 마을들이 주민들의 땅이며 고향인 만큼 이들이 바라는 대로 고향을 떠나지 않고 합의된 개발로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변화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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