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사 느티나무 위로 달이 뜬다.이순신 장군이 고문 받을 때도, 안중근 의사가 거사할 때도달은 떠올랐지만, 느티나무는 한 번도보름달보다 더 둥근 달을 보지 못했다.사곡마을을 타고 내려간 사바모두들 이미 보름달인데도 더 둥글 수 없는데도더 둥글어지려고 서로 물어뜯고 울부짖는다.느티나무가 자기 속을 파내 팔만사천 법문을 적는다.상처를 동여매고 약사전 약사여래와 함께 잠시 카페에 들러차를 마신다. 찻잔 속에서 달이 떠오른다.창릉천을 건너 사곡마을을 거슬러 오르다보면 개울물소리를 머금은 꽃들이 반겨준다. 오래된 시골길에 대한 기억 하나가 주황빛으로 물이 든다. 흥국사 앞뜰로 접어드는 곳에서 그 물든 기억으로 맞닥뜨린 나무. 속이 텅 빈, 껍질로만 서있는 450여 년 된 느티나무. 그 형상은 틀림없는 부처였다. 앞뜰에 있는 연못에다 먹을 갈아 끊임없이 글을 쓰고 있는 듯 했다.흥국사(興國寺, 주지 대오스님)는 1300여 년 전인 661년(신라 문무왕 원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당대 최고의 고승인 원효대사가 북한산 원효암에서 수행하던 중 북서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자 이곳에 내려와 보니 서기를 발하는 석조 약사여래(藥師如來) 부처님이 계셨다고 한다. 원효스님은 인연도량이라 생각하여 본전(本殿)에 약사부처님을 모시고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이라 앞으로 많은 성인들이 배출될 것이다'며 흥성암(興聖庵)이라 일렀다.기록에 의하면 1686년(조선 숙종 12년)에 중창한 사실과 1758년(영조 34년)에 미타전 아미타불을 초 개금 중수(복장연기문)하였다고 한다. 1770년(영조 46년) 겨울에는 영조대왕이 생모 숙빈 최씨의 묘원인 소녕원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폭설을 만나 이곳에 들러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산천을 하얗게 뒤덮은 설경이 햇살에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비치고 있었다. 감탄한 영조는 단숨에 ‘조래심유희(朝來心有喜 아침이 돌아오니 즐겁기 그지없구나) 척설험풍징(尺雪驗豊徵 눈이 이렇게도 많이 내렸으니 올해도 틀림없이 풍년들겠구나)’라는 싯구(詩句)를 써 편액(扁額)으로 만들어 하사하고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한다는 뜻에서 ‘흥국사’로 개명 하였다. 고양시에서 가장 오래 된 사찰인 이 절의 문화재로는 경기문화재자료 제57호로 지정된 신라시대 사찰건축물인 약사전이 있다. 흥국사의 주불전(主佛殿)로 전내에는 약사여래상과 1792년(정조 16)에 제작된 약사후불탱화가 있고, 현판은 영조(英祖)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경기유형문화재 제143호로 지정된 흥국사 극락구품도는 전체화면을 9등분하여 극락세계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흥국사 요사채 안에 봉안된 가로 205㎝, 세로 146㎝ 크기의 이 극락구품도는 아미타(阿彌陀) 사상에 입각하여 극락정토의 아미타 회상 장면과 왕생 장면을 상품, 중품, 하품으로 나누어 상하좌우 각각 3등분한 9면에다 묘사하였다. 이 그림은 19세기 후반 양주 흥국사를 근거지로 활동했던 금곡당(金谷堂) 영난(永煖)의 유파가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그 외 고양흥국사목조아미타여래좌상(경기문화재자료 제104호)와 한미산 흥국사 나한전(향토유적 제34호) 등이 있다. 백운대, 원효봉, 의상봉 등 수려한 자연풍광으로 둘러싸여 있는 흥국사는 앞으로는 수령 450년 된 느티나무가 뒤로는 250년 된 상수리나무 두 그루가 양쪽으로 서서 나라의 부흥을 위해 천년 세월 동안을 기원으로 지내는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께 수발을 들고 있다.매년 ‘경로잔치’와 ‘산사 건강음악회’를 열기도 하고, 몸과 마음의 고요를 갈망하는 도시인에게 산사(山寺)에서 하룻밤 지낼 수 있는 템플스테이도 운영하고 있다. 주말 1박 2일간 참선, 발우공양, 다도, 암자순례 등 순으로 진행되며, 사찰음식 맛보기, 새벽 숲길산책, 치유명상, 참선, 다도, 발우공양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고찰의 여유로움 속에서 참나(眞我)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될 것이다.▶찾아가는 길구파발전철역-구파발검문소-제일여객구.종점-문석주택-싸리마을-삼천리골-백화사입구(북한산성온천)-흥국사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