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5공’의 서슬이 시퍼렇던 80년대에도 서울 중구의 미국문화원은 호시탐탐 운동권 학생들의 점거목표였다. 예나 지금이나 반정부 구호와 함께 따라 붙는 게 반미 반 외세 이어서, 특히 주한 미 대사관이나 미 문화원 등 주요시설의 경비는 철통같았으나 전광석화와 같은 그들의 점거시위를 막아내진 못했다.

85년 5월에도 그랬다. 진입에 일단 성공한 대학생 70여명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밤새 경찰과 대치하다가 다음날 새벽에야 2층 도서관 창문이 빠끔히 열리며 한 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은 잤느냐, 배고프지 않느냐” 기자들이 앞다퉈 요령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좀더 진지한 대화를 나누자” 학생이 문을 닫으려하자 어떤 기자가 소리쳤다. “당신들, 여차하면 미국으로 망명하려는 거 아냐?” 2층의 학생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타이르듯 말했다. “이 좋은 내나라 내 조국을 두고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냐!”

그는 ‘내 나라 내 조국’이라고 했고 조국을 사랑하기에, 광주 민주화운동 무력진압에 관련한 미국의 책임규명을 위해 그곳을 점거했다고 했다. 반미가 곧 민주화운동이냐 아니냐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젊고 순수한 그들의 열정과 조국애만은 찡하게 와 닿았던 것 같다.

IMF이후 끊임없는 화두는 ‘이민’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우리 땅을 비좁게 여겨 저 넓은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려는 기상이 있었다. 그동안 역사의 질곡 속에서 수백만의 동포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있지만, 그들은 우리를 버리고 떠난 ‘섭섭한 이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려는 자랑스러운 우리들의 핏줄이다. 해마다 수출이 늘고 유학생이 늘 듯 이민이 늘어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최근의 이민은 늘어나는 숫자보다 고국을 등지는 까닭이 석연치 않다.

“희망 없는 한국보다 외국에서 재기하고 싶다”?

물론 매스컴이 전하는 내용엔 ‘선정성’이 묻어난다. 이를테면 한국사회 전반에 염증을 느껴 떠난다는 얘기다. 게다가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이 실컷 뛰놀며 제 하고싶은 공부만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다는 것이다. 이민숫자도 집계가 들쭉날쭉 이어서 도무지 종잡을 수 없으나 대체로 해마다 10%이상 늘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이민사기도 그만큼 많아져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이민박람회가 열렸는데 끝없는 행렬이 이어졌고 홀 안은 발 들여놓을 틈조차 없었단다.

그들 모두가 ‘희망이 없는 한국’을 떠나려 한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모두가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의 본고장에서도 이민을 떠나는 사람은 많다. 좀 더 넓은 땅과 일자리를 찾아 호주로 떠나는 이민가족이 LA국제공항에서 눈물을 삼키며 미국 국가를 열심히 부르는 모습을 봤다. 더욱 놀라운 점은 미국이 그들의 고국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유럽에서 이민 와 몇 십 년 신세를 지고 간다는 최소한의 예의를 표한 셈이다.

“한국이 진저리가 나서 떠난다”고는 말하지 말자. 거긴 그래도 여러분의 부모 형제 친구들이 남아있지 않은가. 산하도 그렇고 역사와 풍습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인즉, 차라리 말없이 떠나는 편이 떠나 보내는 쪽을 위한 작은 배려도 되지 않을까.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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