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방학
[고양신문] 국민의 대표를 뽑는 총선이 끝났습니다. 사회 교사의 숙명처럼 중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우리 지역에 필요한 정책을 함께 토론하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업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유권자가 아닌 학생들에게 이 시간은 어쩌면 때가 되면 늘 하는 민방위 훈련 같은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학생 자치를 담당했던 중 겪었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선거 수업 5분을 남기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2016년 7월, 학생회장 입후보 마감이 끝나 2팀의 경선이 확정된 다음 날 아침 교무실 문이 열렸습니다. 얼굴이 온통 붉게 달아오른 당선 확실 K가 들어왔습니다. 러닝메이트로 입후보한 1학년 부학생회장 후보가 사퇴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말이지요. 후배의 집으로 달려가 새벽 2시까지 설득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거의 울먹이기까지 했습니다. 게임 끝이지요. 선거 규정상 러닝메이트 후보의 사퇴로 K는 입후보 자격이 상실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학생회를 학생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또 다른 입후보자 S의 시대가 열리게 된거지요. 한 팀만 단독 입후보로 처리되어 찬반투표를 하면 끝나니까요.
그런데 다시 문이 열리고 행운의 주인공 S가 들어왔습니다. “선생님…” 잠시 뜸을 들인 S는 K가 다시 1학년 러닝메이트 후보를 찾을 때까지 선거를 연기해달라는 예상 밖의 말을 했습니다. 정정당당한 경쟁을 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고, 어쩌면 결과에 상관없이 과정이 아름다운 후보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S는 완강했습니다.
다음날부터 선거운동이 시작되고 속마음은 칼퇴를 하고 싶었던 저는 마지막 카드를 던졌습니다.
“후보 등록을 다시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너도 사퇴를 하는 길 뿐이야.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지? 네 마음 충분히 알 것 같아. 이제 이 문제는 여기서 정리하자.”
아! 정말 기가 막힌 3점 슛이었습니다. 이제 S가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하면 게임 끝입니다. 그런데 정말 귀가 막힌 S는 3점 슛에 파울까지 얻어 추가 자유투를 던졌습니다.
“사퇴서 양식 주세요. 바로 여기서 사퇴할께요.”
우여곡절 끝에 선거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과정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S가 과연 결과에서도 승리할지가 많은 이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선거 과정은 정말 일방적이었습니다.
역시 작년 부학생회장이었던 K는 프로였습니다. 선거운동원 숫자도 2배였고 선거 방식도 규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양적으로 질적으로 완벽했습니다. 선거운동원을 통한 저인망식 면대면 소통. 세련되고 감각적인 공약 포스터. 기성 정치인들의 선거운동을 뺨칠 정도의 아침등굣길, 하교길 선전전.
S는 그때 그 문을 열고 나가야 했습니다. 안쓰러울 정도의 선거운동원 숫자. 투박한 후보 포스터와 전략이 없는 아침, 점심, 저녁 선전전. 너무 비교되어 중립을 지켜야 하는 제가 각종 문구류를 뒤로 제공할 정도였으니까요.
이제 남은 반전의 기회는 전체 유권자들이 체육관 강당에 모여 진행하는 후보자 간 토론회뿐. 혹시라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학생회가 온전하게 학생들의 품으로 돌아가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연설이라도 준비하면 승리할 수 있을까요? 7년 전 일이라 두 후보자의 연설과 상호 간 토론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최면요법을 통해 기억 속의 먼 그대를 소환하자면 K는 학생들이 선호하는 행사 진행과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자판기 설치, 체육복 등교 등 건의 사항 몇 가지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S는 대의제의 문제. 학생회의 관료화를 지적하면서 인권이 교문앞에서 멈춘다는 현실을 비판했습니다. “주인이 건의하는 건 있을 수 없다”라는 말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 보니 저에게 S의 연설은 꽤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선거는 끝났고 결과를 들고 선관위원장 Y가 교무실로 들어왔습니다. 이때, 종이 울렸습니다. 저는 결과를 알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아이들을 두고 교실을 나왔습니다.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정치철학자 토크빌의 말을 남긴 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