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중에서 송이가 나고 산삼이 나듯이 북한산에는 문화재들이 난다. 여느 산과 달리 정기가 깊이 서려있는 이 산에는 곳곳에 문화재들이 유달리 많이 산재되어있다. 태고사원증국사탑비, 태고사원증국사탑 등과 같은 문화재들이 험난한 역사의 현장과 자연재해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 오늘, 우리에게 찬란한 역사를 선사해주고 있다. ‘내가 사는 곳이거늘 나도 모르는 이 암자/깊고도 깊은 산중이나 막힌 곳이 없고/하늘과 땅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맞물려 앞뒤도 없으니/동서남북 어느 한곳에 머물러 있다 할 수 없구나.’이 시는 태고 보우국사(普愚;1301∼1382)가 지은 ‘태고암가(太古庵歌)’의 첫 부분이다. 중흥사를 일으켜 세운 보우선사는 1341년(충혜왕 복위 2) 동쪽 소나무 언덕 터에 암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태고암’이라 했다. 여기에서 5년간 안거하면서 초탈한 삶을 읊고 있는 시이다. 그의 시에 이끌려 태고사로 오르는 길목이었다. 등산객들이 힘차게 오르내리는 가운데에 한 노승이 떠듬떠듬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태고사 주지 청암스님이었다. 다리가 아파 병원에 가서 침 맞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93세의 노인이, 그것도 다리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험준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41년 전, 안동에 있는 서악사 주지로 있다가, 다 찌그러진 암자 한 칸 밖에 남아있지 않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눌러 앉아 살면서, 매일 같이 보우선사의 향취를 맡으며 지낸다고 한다. 길이 가파른 정도가 심해질 무렵에 중국에서 모국의 품이 그리워 찾아온 공양주 김연옥(68세)씨가 마중을 나왔다. 청암스님은 아직도 밤 10시가 되면 늦도록 공부를 하신다고 한다. 태고사와 태고사원증국사탑비 그리고 태고사원증국사탑태고사는 원래 중흥사에 딸린 암자였던 것을 청암스님이 증축해서 1988년 7월 28일에 대한불교태고종 제37호로 지정 받았다. ‘철불’과 ‘동기와’로 유명한 이 절은 구암봉 기슭의 긴 계단 위에 대웅전이 서향으로 서 있고, 그 옆에 1385년(고려 우왕 11)에 세운 태고사원증국사탑비(보물 611)와 비각이 서 있다. 비석에는 보우국사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이색이 짓고, 명필 권주가 글씨를 썼다. 비각 왼쪽에 돌로 지은 산신각이, 산신각 뒤에는 부도탑 3기가 남아 있다. 절 마당 한켠에는 수령 150년 북한동 귀롱나무(마을나무 5-18-1-6-7)가 서있다.10월 23일에 보우국사 탄생 추모제를 봉행또 원증국사 부도탑인 태고사원증국사탑(보물 749)이 보존되어 있는데, 하대가 넓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단정하다. 문양과 조식이 고려 후기의 뛰어난 제작 솜씨임을 단적으로 알게 한다. 부도탑은 넓은 석단으로 이루어진 부도전에 세워졌는데, 사각형 지대 위에 사각형 하대를 놓고, 8각 꽃모양을 조각한 중대와 귀꽃문을 새긴 상대를 놓아 탑신을 받치고 있다. 전체의 높이는 4m이다. 오는 10월 23일에는 태고사원증국사탑에서 보우국사 탄생 추모제를 봉행한다. 작년에는 200여명이 참석 했는데 올해는 300여명이 참석할 걸로 보고 있다.우리나라 최대의 석성_북한산성북한산성은 사적 제 162호로 고양시 효자동과 서울 북부지역에 걸쳐있는 산성이다. 길이는 8㎢, 평균 높이는 7m으로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할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축성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의 외곡성으로 축성론이 일어나고 1711년 숙종 3년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가 시작되어 7,620보의 석성이 완성되었다. 당시 성의 규모를 보면 대서문과 동북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시단봉상에 동장대, 나한봉 동북쪽에 남장대 중성문 서북쪽에 북장대가 있었다. 그리고 성내에는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 숙종 때 군제를 보면 수성대장에 영의정이 겸하고 훈련어영금위의 삼군문이 모두 배치되었다. 지금도 대서문이 복원되어 남아 있고, 최근 대성, 대남, 대동문 등의 외곡성을 비롯해 내성인 중성문도 복원되었다.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 유형문화재 제 87호(경기)이다. 금위영 건물을 보국사(輔國寺) 아래로 옮기게 되자 이를 기념하여 건립하였다. 현재 이 비는 태고사와 대남문 사이의 대성암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금위영은 소동문 안에 있었으나 그 지세가 높아 비바람이 몰아치면 무너지기 쉬우므로 보국사 아래로 옮기게 되었다. 비의 재료는 화강암으로 비의 뒷면은 땅에 묻혀 있고, 옥개는 장대석에 앞면에만 낙수면을 새겼다. 즉, 와비의 형식으로 비문의 끝부분에 ‘을미즉 대명숭정 갑신후 칠십이년야 도제조이이명지’란 명문으로 보아 숙종 41년(1715)에 도제조 이이명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북한산성행궁지북한산성행궁지는 기념물 제 160호(경기)이다. 행궁은 유사시 왕의 행재소이다. 「북한지」에 의하면, 행궁 규모는 내전이 좌·우 상방 각 2칸, 대청이 6칸, 사면퇴 18칸을 합한 총 28칸이었다. 이 정전 외에 또 좌·우각방·청·대문·수라소 등의 부속건물이 35칸이나 되었다. 외전 역시 내전과 같은 규모의 정전 28칸, 내행각방 12칸을 위시한 루(樓)·청·고간(庫間)·대문 등 총 33칸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 이 모든 건물을 합치면 모두 약 3천여 평에 총 124칸의 건물이 북한산에 들어서 있었다. 북한산중흥사지북한산중흥사지는 기념물 제 136호(경기)로 이 중흥사는 본래 30년여 칸 규모의 작은 사찰에 불과했으나, 조선 숙종 39년 외적에 대비하여 북한산성을 축성하였는데 성이 완성된 1715년에 중흥사를 증축하여 136칸의 큰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중흥사는 도총섭이 머물던 북한산성의 승영이었다. 승영 당시에는 삼존불을 봉안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누각인 만세루와 나한전을 두었고, 동쪽에는 산신당이 있었다고 하며, 동구에는 "중흥동문"이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또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중요한 약재를 조련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한다. 이 대사찰은 고종 대에 2번의 화재를 당한 후, 1915년에는 대홍수까지 겪어 허물어진 석축과 터만 남아있던 중흥사가 최근에 복원공사 중이다.산영루 터비석거리 옆 계곡에 돌기둥이 3열로 10개가 나란히 서 있는 곳이 산영루 터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암반 위를 흘러 내려가는 이곳의 고요한 물길을 보며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이규보, 정약용, 김정희 등이 유람하며 시를 읊었고, 박지원은 독서를 한 곳이라고 한다. 특히 시인들의 아회 장소로 널리 이용되기도 했다.북한산3·1운동암각문향토유적 제 32호로 지정된 이 암각문은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봉 정상의 화강암 바위에 새겨져 있다. 기록문은 독립운동가인 정재용(鄭在鎔)이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가로 150cm, 세로 270cm 정도의 평평한 바위 위에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네 글자를 새기고, 그 안에 “독립선언문은 기미년 2월 10일 최남선이 작성하였으며 3월 1일 탑동공원에서 자신이 독립선언 만세를 도창했다.”는 내용이 정자체로 새겨져 있다박태성정려비및 묘향토유적 제 35호로 지정 된 박태성 정려비(효자비)는 북한산성에서 의정부로 이어진 63번 지방도로 제청말 입구에 세워져 있다. 오석 재료로 된 비에는 ‘조선효자 박공태성 정려지비’라 표기되어 있다. 비문은 증손 박윤묵이 썼다. 대좌까지 갖추어진 이 비는 조선조 후기 효자로 널리 알려진 박태성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북한산 사찰국녕사(國寧寺)1713년(조선 숙종 39) 청철(淸徹)과 철선(徹禪)이 창건했다. 창건 때는 총 86칸에 이르는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고 하며 1991년 화재로 모두 불에 탄 것을 능인선원에서 1998년 10월부터 중창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대웅전과 산신각·종각·요사채가 있다. 부근에 한월당(漢月堂) 대선사의 부도가 전하고 있다. 상운사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고양시의 경계를 이루는 북한산 원효봉 남쪽 중턱에 있다. 신라 때 원효대사가 삼천사와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무량사1895년(고종 32) 고종의 후궁인 순빈 엄씨가 창건하였다. 순빈은 이곳에 산신각을 짓고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를 모신 뒤 백일기도를 올려 아들을 낳았다. 그 뒤부터 이 절은 백일기도를 올리면 소원을 들어 주는 사찰로 알려져 원당이라고 하였다.노적사선조, 숙종 당시 팔도도총섭(승병관리기구)이었던 성능 화상이 창건하여 사찰명을 진국사라 하여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하고 북한산성 축성, 삼각산, 북한산성에 대한 역사지리서인 북한지를 편찬하고 불교문화와 군사시설 확충에 많은 업적을 남기었으나 그후 소실되어 빈터만 남게 된 것을 무위스님이 사찰을 복원해 노적사라 하였다. 2002.6.16.화재로 인하여 요사체 및 종각 건물이 전소되었다. 현재 다시 복원 중이다.무형문화재음력 8월초하루에 황소 한 마리 잡아서 의상봉 밑에서 산재를 지낸다. 북한동 이장 봉종옥(73세)씨는 작년부터는 마을 사람들이 경기가 안 좋아 소머리로 지낸다고 한다. 10월 초하루에는 돼지 한 마리 잡아서 노적봉에서 지내는 산재가 있다. 그리고 3년마다 한 번씩 연 도당굿이 있다연간 300여만 명이나 찾아든다는 북한산. 그 봉우리들을 잇는 북한산성을 비롯해 많은 문화재들이 방치되어 있다. 정동일(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은 “북원을 하다가 중지된 북한산성이 등산객들에 의해 훼손되고 있는 상태를 하루속히 막아야 한다”면서 “각 행정기관과 문화재청, 전문가 등이 통일된 복원대책을 효율적으로 세워 북한산성은 물론 산영루, 수문 등 역사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를 복원해야한다.”고 했다.북한산 산성 14성문와 장대 대서문가사당암문부왕동암문청수동암문대남문대성문보국문대동문용암문위문북문시구문수문중성문동장대북장대남장대미지정 문화재북한산성선정비23기(조선시대) 북한산승도절목명문(조선시대 철종6년) 국녕사 한월당 대선사 부도탑(조선시대)백운동문 명문(조선시대)노적사 석사자상(조선시대_추정)용암사지 석탑(조선시대_추정)부황사지(조선시대)봉성암 성능 부도탑(조선시대)훈련도감 유영지(조선시대)용학사 암각 진장상(고려시대_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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