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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 태실은 세계 유일의 문화재나라 잃은 이씨왕조의 슬픈 역사 담겨
   
 
   
 

비공개 지역으로 일반 시민들 잘 몰라

박물관 조성과 이벤트로 관광자원 가능성 높아                                        

편집자주
태실(胎室)이 아이가 태어날 때 달고 나오는 태를 보관하는 장소라고는 짐작이 되지만 이것이 우리의 고유 문화로 이조말까지 이어져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런 태실이 고양의 서삼릉에 50여개가 넘게 모여 있다는 사실을 아는 시민은 더욱 드물다.
고양문화원이 발간하는 행주얼 42호(2006년 여름호)에 실린 문정조씨(전 고양문화원 이사, 엠스암연구소장)의 논문 ‘서삼릉 태실문화 재조명에 관한 연구’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그 주요 내용을 재구성해 보았다. 태실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독특한 문화라는 면에서 앞으로 서삼릉 태실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더욱 활발해지기를 기대하면서 그 주요 내용을 싣는다.

 

“진천현 태령산에 신라 김유신의 태를 묻고 고려 때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라는 내용은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그러나 태실의 풍습은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락국왕의 응달리 태봉, 울주 보은리 태봉 등도 오래된 태실의 흔적들이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태실문화를 갖추게 된 것은 조선시대 이후로 보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태는 그 사람의 지혜나 성쇠에 중요한 것으로 여겼고 다분히 금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태의 처리가 다음 왕자나 왕녀의 출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과 태실 자체가 왕실의 번영과 권위를 상징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반인들도 태에는 그 사람과 동기(同氣)가 흐른다고 생각해 명당을 찾곤 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후덕을 지방까지 미치게 한다는 생각으로 왕자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명당을 찾아 안치했다. 또 한편으로는 명당을 차지해 태실을 안치해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요인을 없애자는 의도도 있었다. 이 때문에 왕릉은 도읍지 100리 안팎에 모셔진데 반해 태실은 전국 도처의 명당을 찾아 조성되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에서는 태실의 관리에 정성을 기울였고, 백성들은 왕족의 태실을 자기 마을 부근에 모시는 것을 긍지로 여겼다.

그러나 태실의 불행은 조선이 망하면서 시작된다. 1930년을 전후해 일제가 전국에 있는 태실을 고양의 서삼릉에 무성의하게 모아놓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행위는 왕족의 존엄과 품격을 비하, 훼손시키고 백성들에게 조선의 멸망을 확인시켜주자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아직 태봉이라는 지명을 갖고 있을지라도 원래 안치된 태실이 그 자리에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게 되었다.


안태사라는 관리를 두고 태실 조성

태실은 일반적으로는 태옹(胎甕)이라 는 항아리에 태를 담아 안치하지만 왕세자 등의 경우는 석실로 만들어 보관하였다.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일단 태를 백자항아리에 넣어 길한 방향에 안치한다. 그 후 길일을 택해 태를 무려 백 번이나 씻고 엽전 한 개를 작은 내항아리 밑바닥에 깔고 그 위에 태를 올려놓았다.

작은 내항아리를 기름종이와 비단으로 밀봉해 좀 더 큰 외항아리에 넣었다. 내항아리가 깨지지 않도록 밑바닥과 공간을 솜이나 고운 흙으로 메웠다. 땅에 묻는 의식은 안태라고 하는데 이 의식을 위해 안태사라는 관리가 임명되었다.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나면 예조의 관중감(觀衆監)에서 태를 봉안할 장소를 물색하고, 선공감(繕工監)에서는 태를 봉송할 도로를 개보수해 지장이 없게 했다. 당상관으로 안태사를 정해 봉송 책임을 맡게 하고, 배태관은 태를 봉송하는 도중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게 했다. 그리고 상토관을 두어 태실이 길지인가를 재확인하게 했다.

이와 같이 완벽에 가까울 만큼 준비가 끝나면 고후토제(告后土祭), 태신안위제(胎神安慰祭), 사후토제(謝后土祭) 등의 제례를 치르고 태실 주위에 금표를 세워 접근을 금하는 한편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의 행위를 못하게 했다.


일제시대에 서삼릉으로 모여

   
▲ 8대 예종의 태항아리. 서삼릉에서 문화재관리국으로 넘겨져 궁중유물전시관에 보관중이다.
이렇게 정성껏 조성된 전국의 태실이 서삼릉으로 모이게 된 연유를 살펴보자. 서삼릉에 봉안되어 있는 태실은 총 54기이다. 그러나 태실의 태항아리와 지석을 옮겨온 시기와 이전하기 전의 기록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참고 자료로 1929년 3월1일자 동아일보의 보도 “조선총독부 이왕직(李王職)이 전국의 명당지에 있는 39기의 태실을 종로구 내수동의 임시보관소에 두었다가 추위가 물러가면 서삼릉으로 이전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이왕직 전사(典祀) 출장복명서」에 “1928년 8월5일부터 8월30일까지 숙명공주 숙경공주 태종대왕 세종대왕 인종대왕 태실을 조사해서 태항아리와 지석을 경성(서울)에 봉송하여 봉안하였다”라는 기록과 “1930년 4월15일부터 4월17일까지 3일간에 걸쳐 서삼릉 경내에 태실 49기를 이장했다”라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서삼릉 태실단지의 표비는 오석비군과 화강암비군으로 나눠지는데 오석(烏石;검은빛암석)비군은 철자형의 기단석을 설치하고 왕세자 태실을 비롯해 조선 역대 왕의 태실 19기 등 총 22기가 봉안되어 있다. 화강암비군에는 대군과 공주 등 총 32기가 봉안되어 있다.

원래 왕릉 경역 내에는 후궁, 왕자, 공주 등의 묘나 태실을 둘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망한 1910년 11월에 망조왕실을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이 설치되었고, 이왕직에서는 서울 경기 일대에 산재한 후궁 왕자 공주 등의 분묘를 집장 관리한다는 명목 아래 숙종의 후궁인 유씨묘 외 15기와 세종대왕의 딸 정소공주의 묘 외 18기를 서삼릉으로 집장했다. 이는 서삼릉을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비하?훼손하려는 일제의 책략으로 보인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서삼릉은 하나의 경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은 그 이후에 더 심해졌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시범낙농단지 조성을 시행함으로써 경역의 대부분이 낙농방목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경역은 예릉?희릉구역과 효릉구역, 후궁 왕자 공주묘역, 태실집단구역, 소경원구역으로 분할돼 각 권역은 서로 통행할 수조차 없게 만들어 놓았다.

서삼릉을 이 상태로 방치한다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하나의 경역으로 통합시켜 울창한 원래의 능림을 이루게 하고, 태실문화를 재정립해 세계적 문화관광 자원으로 가꾸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물관 조성되면 세계유일의 문화자원

태실문화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우리만의 문화형태로 보인다. 그리고 신비스러움도 한껏 깃들어 있다. 또한 태실문화는 자연적이고 주술적인 신앙의 힘을 빌려서라도 가족의 안녕과 번영을 바라던 원초적 사랑이 배어 있는 인간의 근원적 문화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세계적인 태실문화 상품으로의 부상도 가능함을 의미한다. 여기에 ‘태실박물관’, 시대별 형태별 ‘태실전시장’을 서삼릉 경내에 조성하고, 태실을 상징하는 캐릭터와 각종 이벤트를 준비한다면 유엔 세계문화유산 등재 조건에도 근접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관심 여하에 따라서는 서삼릉 태실이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소중한 자산으로 등록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탈리라 북부 소도시 베로나는 야외오페라로 유명한 세계적 명소이다. 여름 3개월간 이 도시에서 열리는 오페라 공연이 전세계에서 매년 50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여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에 들어간다. 서삼릉 태실단지에서도 숲속 야외음악 공연 등을 기획한다면 별빛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숲을 배경으로 문화를 즐기는 각별한 경험의 장이 되어 관광객들을 매료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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