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전복 입에 대지 않은 청백리로 추앙

정무공 기건(奇虔)은 조선 세종 때(1443년) 제주목사로 왔던 문신이다. 제주에 부임했던 조선시대 약 320명의 목민관 중에서 백성들로부터 청백리로 인정받아 추앙을 받았던 목사는 사실 몇 안 된다. 그러나 기건은 해녀(잠녀)의 고단한 삶을 목격하고 전복, 미역, 소라를 평생 입에 대지 않았고 최초로 나병을 치료하는 국립보건소를 창설해 제주인에게 선정을 베푼 몇 안 되는 청백리로 기억, 전승되고 있다. 원당 덕양서원 뒤편 포근한 산자락에 자리한 기건의 묘소를 찾았다.
기건은 아버지 공조전서 기면과 어머니 청풍 김씨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천품(天稟)이 영발(英發)해 학업에만 몰두했으며 어려서도 책읽기를 좋아하고 한번 눈에 스쳐간 것은 다 암기했다고 한다. 나이 들어 성가하여서도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도성 밖 청파 만리재 언덕 아래의 집에서 경전을 읽기에만 전념했다. 그의 이러한 문망과 덕행이 널리 알려지자 세종 임금의 귀에 들어가 포의발탁(布衣拔擢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특별히 관리를 임용하는 제도)되어 벼슬길에 나아갔다. 오위도총부 경력을 제수받은 기건의 공무원 생활은 그가 세조정난에 항의하는 선비정신인 청맹(靑盲)을 빙자, 사직하는 1457년까지 꾸준히 계속된다.
제주에 부임한 기건은 제주민을 위한 장례풍습 제도정비와 해녀(잠녀)의 고단한 삶을 목격하고 미역과 전복, 소라를 평생 동안 입에 대지 않았다는 등 다양한 선정을 베풀어 아직까지도 역대 제주목사 중에 가장 많은 설화를 남겼으며 또한 그의 행적은 가장 비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긍휼함이었다.
세계 최초 국립한센병치료소 ‘구질막’

이때 기건 목사가 시행한 나병환자에 대한 격리수용시설, ‘구질막’은 이른바 세계최초의 국립한센병치료소인 셈이다. 그리고 당시 그가 조치한 바닷물 목욕법은 매우 신빙성이 있는 치료법으로 알려져 있다. 21세기인 현재에도 나환자요양원이 우리나라의 소록도를 비롯, 모두 바닷가에 위치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또한 고삼(쓴너삼)은 악성 피부병의 천연적인 치료제로서 그 효과가 탁월했다.
나환자수용시설은 인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바닷가에 지어졌으며 나환자들은 철저히 격리됐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뭉크러지고 온몸에서 진물이 흐르는 나환자들은 가족에게서조차 버림받아 죽을 길밖에 없었는데 기건 목사는 이들에게 구세주인 셈이었다. 목사는 군역을 살던 중(僧)들로 하여금 나환자들을 돌보도록 조치했다. 바닷물을 끓여 날마다 목욕시키고, 제주 산야에 지천으로 나는 고삼이란 식물의 뿌리를 캐다 달여서 그 물을 먹이기도 하고 상처 부위에 바르게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것을 고삼원이라 하고 있다. 이렇게 치료를 하면서 중앙에 이에 대한 보고를 올리고 방책을 내려줄 것을 건의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제주 안무사가 아뢰기를 본주와 정의·대정에 나병이 유행해 만일 병이 걸린 자가 있으면 그 병이 전염되는 것을 우려해 바닷가의 사람 없는 곳에다 두므로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바위벼랑에서 떨어져 그 생명을 끊으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신이 군역으로 종사하는 중(僧)들로 하여금 뼈를 거두어 묻게 하고 세 고을에 각각 병을 치료하는 장소를 설치해 병자를 모아서 의복 식량과 약물을 주고 또 목욕하는 기구를 만들어서 의생과 중(僧)들로 하여금 맡아 감독하여 치료하게 하는데 현재 나병환자 69인 중에서 45인이 나았고 10인은 아직 낫지 않았으며 14인은 죽었습니다. 다만 세 고을의 중(僧)은 본래 군역에 있사온데 세 고을의 중(僧) 각각 한 사람을 군역에서 면제하여 항상 의생과 더불어 오로지 치료에 종사하게 하고 의생도 또한 녹봉을 허락하여 권장하게 하소서”라고 기록돼 있다.
이 장계를 보면 나병환자에 대한 치료가 많은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환자 수용시설이 있던 장소는 현재 제주시 도두동 해안도로변으로 방사탑이 2기 서 있다.
재임 기간은 물론 한양서도 전복 입에 안대
기건은 제주목사 재임기간은 물론 한양으로 가서도 평생 동안 제주해녀의 물질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하며 전복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무릇 목민관이란 백성들의 사정을 헤아리고 백성의 고통을 해결해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소임일 것이다. 일찍이 세종이 그를 일러 사람과 그릇이 상당하다고 평가하였거니와 그는 임금의 그러한 안목과 기대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선정을 펼치고 3년 후 병조참의로 승진돼 제주를 떠난다. 제주목사 이후 그가 거친 관직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1446년 세종 28년 6월 병조참의
-10월 첨지중추원사
-1447년 세종 29년 4월 형조참의
-5월 이조참의
-1447년 세종 29년 7월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
-1449년 세종 31년 호조참판
-1450년 세종 32년 명나라 세종고부사(世宗考府使) 부사(副使)
-1451년 문종 원년 개성부 유수
-1452년 단종 즉위년 한성부윤
-1453년 단종 원년 3월 사헌부 대사헌
-10월 평안도 관찰사
-1455년 세조 원년 판한성부사
-1457년 세조 3년 중추원사. 명나라 사은사
단종 폐위와 세조 등극 후 비록 소극적인 투쟁의 방법이지만 청맹(靑盲)이란 지조와 절개

“중추원사(中樞院使) 기건이 졸하였다. 기건은 기현의 후손인데,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정고하여 작은 행실도 반드시 조심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연안(延安) 군수가 되었는데, 군민들이 붕어를 바치는 것 때문에 그물질하여 잡기에 피곤해 하니 3년 동안 먹지 않고 또 술도 마시지 않았다. 체임(遞任)하여 돌아올 때에 부로(父老)들이 전송하니, 기건이 종일토록 마시어도 취하지 않았다. 부로들이 탄식하기를, ‘이제서야 우리 백성을 위하여 마시지 않은 것을 알겠다’하였다. 또 제주를 안무하는데 백성들이 전복을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기니, 역시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 두어 도의 관찰사(觀察使)와 대사헌(大司憲)을 역임(歷任)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시호를 정무라 하니, 청렴하고 결백하여 절개를 지키는 것이 정(貞)이요, 백성에게 모범 되게 하여 복종시키는 것이 무(武)이다.”
정무공 기건의 묘소는 덕양서원 뒤편 언덕 위 포근한 산자락에 둘러싸여 있다. 묘소 양쪽에 서있는 문인석은 5백여 년의 세월에 풍화돼 이목구비의 마모가 역력하고 봉분을 둘러싼 호석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어 향토유적 제22호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묘역의 조성 당시 석물은 일부는 분실됐고 나머지는 땅에 파묻혀 그 아쉬움을 더한다. 행주 기씨 문중이 원래의 석물 전체를 본뜬 후 그 위치에 세워 놓아 후손의 정성과 긍지를 읽을 수 있음이 다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