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무덤 찾아내 상소 올린 낙촌 박충원

▲ 낙촌 박충원의 묘가 있는 능골 일대는 밀양박씨의 묘역이 넓게 산재해 있어 일명 박재궁이라 불린다. 사진은 말양박씨의 재실인 추원재.

원당의 고양시청에서 벽제 방면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능골이란 표지판과 함께 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길을 따라 약 50여m 쯤 들어가면 1988년 중건한 밀양박씨의 웅장한 재실인 추원재가 있고 뒤편 야산을 따라 이 문중의 묘역으로 넓게 산재하고 있어 일명 박재궁이라 부른다.
밀양박씨의 오랜 세거지로서 고양시청 뒤 마상공원까지 넓게 마을과 선산이 있어서 지금도 매년 음력 시월 초하루가 되면 전국 각지에서 4000여명의 후손이 모여 시제(時祭, 시향時享)를 지내는 일대 장관을 연출하곤 한다.
추원재 뒤편 야산에 낙촌 박충원의 묘가 있는데 고양시 향토유적 26호로 지정된 박충원 신도비의 비문과 강원도 영월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는 설화를 보면 이때 영월에서는 부임하는 군수마다 원인도 모르게 죽어나가 요담(妖談, 유언비어)이 흉흉해 모든 사람이 이곳에 부임하기를 꺼렸으나 낙촌선생은 초연히 처신하니 요언(妖言)이 무산됐다고 하여 여기 그 일화를 소개한다.
/취재·사진 김한담 전문기자(전통예술문화원 하누리 대표)

▲ 조선 6대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고 이후 박충원 공이 무덤을 찾아내 상소를 올려 봉분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세조정난으로 단종이 임금 자리를 물려주고 동쪽으로 갔다가 얼마 후 후명(귀양살이를 보낸 죄인에게 다시 사약(賜藥)을 내림)이 있어 돌아가시니, 백성들이 모두 그 일을 슬퍼했지만 장사조차도 제대로 지내지 못했다. 오직 그 고을의 아전이었던 엄흥도가 밤중에 몰래 시신을 등에 지고 가서 깊은 골짜기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엄흥도가 죽자 끝내 단종이 묻힌 곳을 알 수가 없게 됐다.

그 후로 부임해 온 수령 7명이 계속해서 갑자기 죽는 일이 발생했는데 바로 이곳에 낙촌 박충원 선생이 간사한 무리들에게 배척을 당해 고을 수령으로 오게 된다. 당도한 날, 고을 아전은 집에 머물지 말고 다른 곳으로 떠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선생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명에 달려 있다”며 옷을 단정히 입고 바른 자세로 앉아 촛불을 밝힌 채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 때 꿈인지 생시인지 하는 어렴풋한 사이에 사자가 나타나 선생을 수목이 무성히 덮여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 곳에는 단정한 옷차림을 한 여섯 명의 선비가 빙 둘러 서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 사람은 충성스럽고 덕이 두터운 어른이니 용서하고 돌려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라고 하자 또 다른 사람이 박충원 공의 손을 붙잡고 “나는 박팽년이오. 우리 임금께서 이곳에 묻혀 계신데 나무꾼이 함부로 들어와서 함부로 나무를 할 뿐만 아니라 돌보는 사람 하나 없으니 그대가 잘 가꾸어서 우리 임금의 원한을 풀어 주시오”라고 말했다.

박충원 선생은 꿈에서 깨자마자 수레를 탈 겨를도 없이 한걸음에 달려가 그곳을 다시 찾아보니 과연 초목이 어지럽고 잡초가 무성한 것이 꿈속에 본 광경과 같았다.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곧 무성한 잡초를 베어낸 후 그 무덤의 봉분을 만들고 주위에 터를 닦아 소나무와 회화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왕실의 맏아들이며 어리신 임금께서 불운의 명을 만나 외진 이곳으로 쫓겨나셨네. 작은 이 청산에 계신 만고에 원통한 혼이시여, 부디 강림하시어 이 음식을 흠향하소서’라는 제문을 손수 지어 올렸다.
그 후 묘지기를 두고 해마다 제사를 드리니 그 고을의 재앙이 이때부터 그쳤다고 한다.

원혼 달랜 민간설화로 발전

▲ 관풍헌과 더불어 옛 객사(客舍) 근처의 건물로, 관풍헌에서 동쪽으로 약 7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단종이 이곳 객사에 거처하면서 누각에 올라 자신의 고뇌를 子規詞(자규사) 및 子規詩(자규시)로 읊은 것이 계기가 되어 누각의 이름이 자규루(子規樓)가 됐다.

이는 전해지는 설화이지만 실제 낙촌선생은 영월군수로 부임해서 그 이전까지 위치조차 불분명했던 단종의 무덤을 찾고 상소를 올려 중종 11년(1526), 왕명에 의해 봉분을 만들었다. 이 일로 낙촌선생은 영월 군민에게 무한한 칭송을 들었으리라 보며 이것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원혼을 달래주는 현명한 수령 이야기와 결합해 민간설화로 확대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공(公)은 영월군수로 고을을 다스린 지 5년 동안 매일같이 밤마다 독서하고, 백성을 대하기를 한 집안 식구 대하듯 해, 임기를 마치고 떠난 뒤 영월군민들은 합심해 송덕비를 세웠고 후대에 건립한 정려각이 장릉 인근에 있다.

어머니가 행주기씨인 낙촌 박충원은 고양 팔현의 한 사람인 외숙 복재 기준(奇遵)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사림의 활발한 중앙 정계 진출이 이루어졌던 조선 중종 때 벼슬을 시작, 벼슬의 꽃으로 불리는 청요직인 이조정랑, 사간원정언, 이조좌랑, 헌납·홍문관부교리를 거쳐 영월군수로 발령됐다.

고양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박충원 신도비는 비문은 유근(柳根)이 지었고 글씨는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그리고 오석의 새로 세운 신도비는 정조 19년(1795) 1월에 세운 것으로서 이수의 두부와 귀부를 갖추고 있다. 화강암 재질의 대좌는 비바람에 의한 부식으로 인해 무늬의 흔적만을 볼 수 있을 정도며 대리석 재질의 비신 역시 마모가 심한 편이다. 특히 전면의 비문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비의 전면 윗부분의 전서에는 ‘이조판 밀원군’ 그리고 후면에는 ‘박공신도비’가 새겨져 있다.

신도비 고양시 향토유적으로 지정

▲ 영월 객사의 동헌(東軒) 건물.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됐다가 홍수 때문에 이곳으로 옮겨와 머물던 중 세조의 명으로 1457년 10월 24일 이곳에서 사사됐다.
1564년 명종이 ‘대제학병조판서박충원(大提學兵曹判書朴忠元)’이란 10자를 친필로 하사하였고 1567년(선조 1) 대종백(大宗伯)으로 전직되었을 때, 중국에 국사를 검토하는 일로 빈상(?相)의 명을 받아 기대승(奇大升), 이후백(李後白), 이산해(李山海)를 종사관으로 삼아 중국에 다녀왔다. 그 뒤 여러 중직을 거쳐 정승에 이르렀는데 신사년(1581)에 우연한 감기로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는데, 향년 75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 임금께서 조회를 그치고 부의와 세가를 내려 주었으며 4월 경신일에 옛 지명인 고양군 두응촌 자좌오향의 언덕에 장례 지냈다라고 비문은 전한다.

진원군(晉原君) 서경(西坰) 유근(柳根)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공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풍부하고 학문과 덕을 닦음이 매우 깊어, 그 모습은 매우 의젓하고 말소리는 우렁찼다. 부지런한 성격은 노년에 이르도록 변함이 없었고 직책이 낮은 관리나 종들에게도 욕하거나 꾸짖지 않았다. 주량이 보통은 넘었으나 난잡하게 취하지는 않았다.

마음에 통하는 지기를 만나면 흉금을 터놓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고금(古今)의 역사에 해박하여 듣는 사람들의 시간 지나는 줄을 몰랐다. 부인의 성품이 곧고 간결했고 자녀들에게 의를 가르쳤으며, 집안 살림을 알뜰히 하고 내외 친척에게도 예에 맞게 대했다. 박충원 공이 돌아가신지 3년 뒤인 계미년(1583) 봄에 돌아가시니 향년 77세다. 박충원 공의 산소 왼쪽에 합장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며, 저서로 <낙촌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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