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차사와 박순(朴淳), 순절한 부인의 애틋한 사연

고양 황룡산자락에는 ‘함흥차사’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명신록> <노봉집> <오산설림> <국역 연려실기술> 등 많은 옛 책이 함흥차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숙종 대에 좌의정을 지낸 문충공 민정중(閔鼎重)이 지은 문집 <노봉집(老峰集)>에는 고양 황룡산자락에 있는 용강서원에서 위패를 모시고 있는 판승추부사(判承樞府使) 박순(朴淳)과 그의 부인 임씨의 이야기를 자세히 전하고 있다.
/취재·사진 김한담 전문기자(전통예술문화원 하누리 대표)
태조에게 보낸 문안사(問安使)가 한 사람도 돌아온 이가 없었다.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누가 갈 수 있는가”하니 응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판승추부사 박순이 자청해 갔는데, 하인도 딸리지 않고 스스로 새끼 달린 어미 말을 타고 함흥에 들어가서 태조 있는 곳을 바라보고 일부러 그 새끼 말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 어미 말을 타고 나아가니, 어미 말이 머뭇거리면서 뒤를 돌아보고 서로 부르며 울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태조를 뵈오매, 태조는 말의 하는 짓을 보고 괴이히 여겨 물었더니, 그가 아뢰기를 “새끼 말이 길 가는데 방해가 되어 매어 놓았더니, 어미 말과 새끼 말이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비록 미물이라 하더라도 지친(至親)의 정은 있는 모양입니다”하고, 풍자하여 비유하니, 태조가 척연히 슬퍼하고 잠저(潛邸)에 있을 때 사귄 옛 친구로서 머물러있게 하고 보내지 않았다.
하루는 태조가 박순과 더불어 장기를 두고 있을 때 마침 쥐가 그 새끼를 껴안고 지붕 모퉁이에서 떨어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박순이 다시 장기판을 제쳐놓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더욱 간절하게 아뢰니 태조가 이에 서울로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박순이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태조의 허락을 듣고 곧 그 자리를 하직하고 떠나니 태조를 따라와 모시고 있던 여러 신하들이 극력으로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
태조는 그가 용흥강(龍興江)을 이미 건너갔으리라고 생각되므로 사자에게 칼을 주면서 이르기를 “만약 이미 강을 건넜거든 쫓지 말라”했다. 그러나 박순은 병이 나서 중도에서 체류했다가, 이때에 겨우 강에 도달해 배에 오르고 아직 강을 건너지 못했으므로 그 허리를 베였다. 그 때에 ‘반은 강속에 있고 반은 배속에 있다(半在江中半在船))’하는 시가 있었다.
태조가 크게 놀라 애석하게 여겨 이르기를, “박순은 좋은 친구다. 내가 마침내 전날에 그에게 한 말을 저버리지 않으리라”하고, 드디어 서울에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태종은 박순의 죽음을 듣고 곧 그의 공을 생각하며 벼슬을 증직했으며, 또 화공에게 명해 그 반신을 그려서 그 사실을 나타냈다. 그 부인 임씨(任氏)는 부고를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박순의 옛 마을은 고양과 교하의 경계에 있다. 지금까지 그 마을을 이름하여 부사문(附事門)이라 한다.
실록에는 없으나 <노봉집>기록 인정

<조선왕조실록> 숙종 13년에는 영의정 김수항이 “대사헌(大司憲) 이선(李選)이 고(故) 판부사(判府事) 박순(朴淳)에게 준 시호(諡號)를 도로 거두는 일로 차자(箚子)를 진달하고, 다시 국가의 사책(史冊)을 고찰하도록 청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러나 채수(蔡壽)가 지은 비문(碑文)과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박순의 아내 유씨(임씨?)의 묘표(墓表)는 전하여 믿게 할 만한 글이니, 박순이 국가의 일로 죽은 것은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관직이 대장군(大將軍)이었기에 마땅히 법례대로 명칭을 바꾸어야 하니, 이미 준 시호를 도로 거둘 필요가 없을 듯하며, 신(臣)의 생각에는 그 때의 일을 이제 와서 글에 써 놓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비록 실록 초기 문서에는 기록되지 않아 논란이 있었으나 <노봉집>의 기록을 사실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순절한 부인 임씨에는 열녀문 하사
용강서원은 이러저러한 논란 속에 숙종 12년(1686)에 편액을 하사받고 세워진 사액서원이다. 본래 박순이 죽은 함경도 용흥강 변에 세워져 있던 것을 한국 전쟁으로 인해 더 이상 제를 올릴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후손과 고양지역 사림의 발의로 1980년 성석동에 중건했다. 해마다 고양 유림이 모여 성대한 제를 올리고 있으며 박순의 고조이자 고려 때 명장인 충장공 박서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
용강서원 뒤편 오솔길을 따라가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작고 소박한 비석과 낮은 석인상,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무덤을 수리하고 세운 비석이 있는 부인 장흥 임씨의 묘가 있다. 부인 장흥 임씨는 남편의 죽음 후 목을 매 그 뒤를 따랐다. 박순과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태종은 부인 장흥 임씨에게 산을 하사하고 묘를 쓰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황룡산이다. 또한 열녀문도 하사해 부사문촌(婦死門村)이라 불렀는데 열녀문은 없어지고 지금은 무덤과 옛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다.
태종과 함흥차사의 배경
고려 충선왕의 만권당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도입된 주자성리학은 여말의 이제현, 이색, 정몽주, 권근으로 이어지는 신흥사대부를 길러냈다. 이들의 개혁은 필연적으로 고려 왕조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함경도 지방에 군사적 기반을 가지고 원나라와 홍건적, 왜구를 물리치면서 등장하는 과정에 서울(개경)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를 통하여 개경의 무인세력인 강씨, 신씨와 연결하여 간다. 그리고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인 이방원은 당시 주자성리학자인 권근, 이색, 민제 집안 등과 연결해 신흥사대부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한다. 이렇게 형성된 정치세력을 기반으로 우왕 14년(1388) 6월 위화도회군으로 역성혁명을 주도하고 마침내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그후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 강씨의 막내아들인 방석을 왕세자로 추대, 자신의 아들 사이에 칼부림의 서막을 올리게 된다.
다양한 정치세력간의 갈등으로 진행된 방석의 세자 추대는 조선 건국의 명분도 빈약한 상태에서 그나마 주자성리학의 법도라고 할 수 있는 종법제에 따른 적장손 복근의 세손 추대가 무산되자 반대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태조 1년 7월 30일 이색을 유배 보내고 한 달 후 이숭인, 이색의 아들 이종학, 최을의, 우홍수, 김진양 등을 이어서 유배 보내게 된다. 또한 태조 3년 4월 고려 공양왕이었던 공양군 부자 및 왕씨를 모두 살해한다. 이런 와중에 신덕왕후 강씨가 승하하자 갈등은 더욱 첨예해지고 태조 7년 8월 26일 제1차 왕자의 난(정도전의 난)으로 방석은 쫓겨나고 정안군 방원이 실권을 잡으면서 태조는 아들에게 쫓겨나는 비애를 맛보게 된다.
이후 태조는 이방원이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함흥으로 보낸 문안사(問安使)를 죽이거나 가두고 보내지 않았고 여기서 한 번 가면 깜깜소식이라는 뜻의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기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