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가장 아끼던 장군, 충경공 류형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차후 수군통제사 후임자로 지목했던 류형 장군에 대해 이덕형이 선조에게 고하기를 “제장(諸將)들 가운데는 오직 전라 수사 류형(柳珩)이 성심으로 나랏일을 하려하여 군졸을 아끼고 기계를 보수하며 군무 이외의 다른 일에 대한 호령으로 일호라도 각읍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므로 남방 사람들이 모두 칭찬합니다”했다.
비록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순신 장군의 부하장수로, 북방지역 국경선 인근의 회령, 경성 지역의 축성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충경공(忠景公) 류형(柳珩)장군의 묘가 있는 행신동 무원마을 단지 내 공원에서 그 인물 됨됨이와 공을 기려보고자 한다.
/취재 김한담 전문기자(전통예술문화원 하누리 대표)·사진 고양시청 제공
공의 본관은 진주로 조선조 명종 21년(1566) 아버지 회령부사 용과 어머니 선산 임씨 사이에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회령부사 용은 우봉현감으로 있으면서 국가의 대적이자 우리에게는 의적으로 널리 알려진 임꺽정 소탕으로 공이 큰 분이다.
류형 장군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호탕하여 의협심이 남달리 강했다. 자라면서 학문에 힘쓰기보다 병서탐독과 무예 연마에 더욱 정진했다. 또한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은 장군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또한 동기간의 우애가 남달리 돈독하여 조실부모한 생질과 종제를 데려다가 친자식 친형제와 같이 기르니 종제는 바로 병자호란 때 많은 공을 세운 충장공 류림 장군이다. 충과 효는 그 뿌리가 같아 효자의 집안에서 충신이 나온다는 말 그대로 류형 장군은 임진왜란 때 발군의 공을 세워 국난 극복의 명장이 됐다.
선조 25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분을 금지 못한 류형 장군은 의병장 김천일 장군의 휘하에 달려가 왜군 격퇴에 앞장섰다. 그 다음해에 음사로 선전관이 됐다가 선조 27년(1594년)에 무과 별시에 합격하여 다시 선전관이 됐다.
선전관으로 조정에서 실시한 사격대회에 참가했을 때 선조 임금이 조상의 내력을 물은 후 부조를 본받아 나라에 충성하라는 분부에 감격한 장군은 송나라 충신 악비의 충의를 본받아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 네 글자를 새기고 스스로 충성을 다짐했다. 그 후 선조 29년에 해남 현감으로 나갔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元均)이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막료가 되어 수군재건에 노력했다. 정유재란 2년 간의 주요 전투지역은 전라도 남해안과 경상도 해안선 일대로 압축됐고 지상전투보다 제해권 확보를 위한 해상 전투가 많았다. 류형 장군은 이런 시기에 해남현감으로 나가 지방 토호들의 방자와 횡포를 엄히 다스려 선정을 베푸는 한편 이 충무공 휘하 제일가는 선봉장으로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크게 용맹을 떨쳐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에 이 충무공은 휘하 제장 가운데 비록 품계는 낮지만 류형 장군을 가장 아끼고 신임하여 대소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항상 의논상대로 삼았다.
충무공이 가장 신임해 항상 의논
이충무공이 백의종군 끝에 재기용되자 류형 장군은 이충무공과 힘을 합하여 흩어진 병력을 규합하고 전선을 마련함으로써 저 유명한 명량대첩의 승기를 마련했다.
전쟁 중 병기, 병선, 군량미 확보 등 만전의 대비책을 갖추고 있던 류형 장군은 통제영에 군량미가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즉각 군량미 50석을 가져다줌으로써 이 충무공을 크게 감동시켰다.
전쟁이 종반전에 이르렀을 때 지금의 광양만에서 왜군 격퇴를 위한 조명 연합 함대가 해상 작전 중 명나라 전선(戰船)을 포함한 3척의 배가 썰물에 갇혀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류형 장군이 기지와 용기를 발휘하여 이를 구출했다. 이때 사지에서 살아나온 진린 제독은 류형 장군에게 큰 절로 엎드려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요, 나를 사지에서 구해준 것은 류형 장군이다”라고 하며 최고의 예로서 감사를 표했다 한다.
선조 31년(1598) 11월 19일 남해 노량 앞바다에서 출군하는 왜군의 퇴로를 막아 이를 섬멸하기 위한 임진왜란 최후의 격전이 벌어졌다. 이 해전에서도 류형 장군은 선봉장으로 나가 싸우다 온 몸에 무려 여섯 발의 적탄을 맞고 기절했다. 충무공은 이 상황을 접하고 “이제는 큰 일이 다 틀렸구나”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류형 장군이 깨어났을 때는 이 충무공이 독전 중 이미 적탄에 맞아 전사한 뒤였으며 적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서도 전사한 이순신을 대신해 전투를 지휘한 사실이 왕에게 알려져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에 발탁된다.
임진란 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

평소 이 충무공의 위대한 애국심, 고매한 인격, 신묘한 용병작전술 등을 진심으로 받들고 따른 류형 장군은 이 충무공 사후 가승과 유장을 모두 직접 정리하는 등 상관이자 구국의 영웅이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공을 보존하기 위해 진력했으며 자기가 세운 전공마저 모두 충무공에 돌렸다. 뿐만 아니라 이 충무공 가족을 마치 친부모 형제와 같이 대하고 물심양면으로 끝까지 돌봄은 물론 충무공의 묘비를 세우기 전에는 결코 내 비를 세우지 말라고 자손에게 유언까지 남겼다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충청수사 전라우수사를 거쳐 선조 35년(1602)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됐다. 이는 파격적인 승진으로 지난날의 전공과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로서 임진왜란이 끝난 지 불과 4년 뒤의 일이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장군은 지난날의 경험을 살려 용병(用兵)에 능하여 해상전투에 적응 할 수 있는 체력 연마와 선상훈련을 강화했으며, 특히 통제영(統制營)의 기계설비와 무기 및 군량 확보는 물론 이제까지의 적폐를 완전히 뿌리뽑아 수군의 면모를 일신시켜 놓았다.
이후 동북방 변경의 여진족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정보를 접한 조정은 류형 장군을 회령부사에 임명했다. 그런데 부임해 보니 회령부는 국경지대의 군사적 요충지임에도 불구하고 폐허로 버려진 채 모든 성곽이 허물어지고 마실 우물조차 없어 적의 침입을 막아낼 태세가 전혀 돼있지 않았다.
장군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장병을 독려하여 불과 수개월만에 성곽보수와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고 오랜 숙원이었던 우물을 수맥을 찾아 해결했다. 선조 40년(1607)에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전임됐는데 여기서도 회령에서와 같이 하여 함경도 지역의 국경선의 성곽과 진지를 개·보수하고 선정을 베풀어 김종서 장군의 6진 개척 당시보다 더욱 견고한 방어태세를 갖췄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여진족과의 분쟁과 충돌이 있을 때마다 이를 의연하게 처결하고 귀순자들을 너그러이 포용하는 등 모든 일을 위엄 있고 사리에 맞게 처리해 조정의 두터운 신임은 물론 이 곳 주민들이 송덕비까지 세워 그 고마운 뜻을 표했다.
풍수지리상 명당자리로 알려진 묘역
이와 같이 남북 변방을 전전하면서 격무에 시달린 장군은 광해군 3년(1611)에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졌다. 광해군이 “류형은 오랫동안 국경 지방에 있으면서 나랏일을 돌보느라 온갖 고생을 다했는데, 지금 병이 심하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매우 애석하다. 명의(名醫)를 뽑아 약을 지급하여 보내어 빨리 가서 치료하게 하라”라고 하교하며 전의를 보내는 등 각별한 은총을 베풀었다.
그 2년 뒤인 광해군 5년(1613)에 병이 나아 다시 황해병사로 임명됐다. 그런데 당시 명청교체기인 대륙 정세에 비추어 방어 전략상 황주성 축성의 필요성이 논의되는 가운데 찬반양론이 분분한 가운데 류형 장군은 축성에 대한 구상과 설계를 마치고 2년에 걸쳐 불철주야 쉬지 않고 공사를 직접 지휘 감독했으나 나날이 건강이 악화돼 결국 광해군 7년)1615) 2월에 공사장을 순시하다가 그만 혹한의 추위에 쓰러져 그 달 25일에 애석하게도 나이 50세를 일기로 진중에서 순직했다.
류형 장군이 가신 뒤 조정에서는 전 생애를 통해 나라에 바친 진충보국(盡忠報國)의 빛나는 전공과 업적을 기려 선무원종1등공신을 내리고 정헌대부 병조판서로 증직 추서했다.
인조 때에 이르러서는 자손들의 영달에 따라 영의정으로 추증함과 아울러 충경의 시호를 내렸다. 또 임진왜란 후 해남군민들이 해남읍에 오충사를 세워 충무공 이순신 장군, 충의공 이유길, 의민공 이억기 증병조참의 이계년 장군과 함께 모셔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류형 장군의 묘가 자리한 곳은 풍수지리상 예부터 명당자리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 초에는 왕릉을 쓰려고 유명한 국사나 지관들이 드나들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을 이곳에 쓰려했는데 지관들끼리 다투는 바람에 다른 곳으로 모셨다는 기록이 있고, 그 후에 태조가 승하하자 영의정 하륜이 이곳을 왕릉 자리로 추천했는데 무학대사에 의해 현재의 동구릉으로 결정이 나기도 했다.
인연은 따로 있는지 태조 7년 당시 학자였던 정평공 류 구 선생이 돌아가시며 이곳에 묘를 쓴 후 대대로 진주 류씨의 종산이 됐다. 1992년 고양시 도시개발 계획으로 이미 문화재로 지정된 몇 기의 무덤을 제외하고는 모두 천안으로 이장됐으며 그나마도 반으로 나뉘어 류형 장군의 묘는 길 건너 근린공원 안에 자리하게 됐다. 이 모습을 보고 어떤 이들은 무슨 명당이냐고도 하지만 우스갯소리로 도시 개발로 보상을 받았을 테니 후손들에게 명당 노릇은 톡톡히 한 것 아니냐고 하는 이들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