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 이병희당시주소 :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지평리 3-1번지증언자 : 송기순관계 : 처남편은 손재주 많고 착실한 사람이었다. 서울에 있는 악기점으로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에 친정에 모내기를 하러 왔었다. 당시 친정이 농사를 짓던 땅 문제 때문에 지주와 좋지 않은 사이가 되었는데, 이 토지 문제를 남편이 나서서 해결했다. 한국전쟁이 나고 남편은 면사무소에서도 근무했다. 그런데 9·28 수복 후 지주가 치안대에 남편을 고발했다는 소리를 듣고 친정할아버님이 남편에게 피하라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당시 마을 여론이 인민 치하에서 일한 사람들은 공회당회관으로 모인다고 하여 자기가 직접 신평리 공회당 회관으로 갔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서 밥을 집에서 해서 날랐다. 당시 군인이었던 시동생이 남편과 함께 서울로 가겠다고 했으나 식구들이 별일 안했으니 괜찮다고 하며 만류하여 시동생은 혼자서 상경했다.공회당에 있던 남편이 다시 능곡 지서로 불려갔다. 당시 10살이었던 막내 시누이가 밥을 날랐다. 그러기를 며칠, 하루는 저녁에 시누이가 밥을 가져갔으나 오빠가 없다면서 울면서 돌아왔다. 그래도 식구들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일산서에 불려 가셔서 한 달 정도 갇혀 있다가 나오셨고,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우리 가족은 남편을 계속 기다렸다. 남편과 함께 잡혀갔던 유해영 씨(96년 사망)가 풀려 나와서 전해준 얘기로는 새벽 4시경에 누군가 남편을 불러서 데러나갔으나 그 뒤로 남편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딘가 살았을 것이란 굳은 믿음으로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그로부터 10년 후에야 일산서로 간 9월 15일을 기일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95년에 금정굴의 유골 발굴 시에 손재주 많았던 남편이 직접 깎아 만들었던, 아직도 남편의 이름이 선명하게 찍히는 도장이 발견되면서 남편의 사망을 확실하게 확인하게 됐다.당시 친정집이 있던 마을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쑥대밭이 됐다. 우리 집도 피난을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집이 없어 구덩이를 파고 살아왔다. 또 흉년이 자주 들었고, 당시 4살이었던 큰 아이와 유복자로 태어난 작은 아이, 12식구가 살기 위해서 좌판과 행상 등 안해 본 일 없이 어렵게 살아왔다. ---------희생자 : 안종건(형님, 당시 19세) 안복례(누님, 당시 17세) 할머니 정씨(당시 53세)당시주소 : 경기도 고양근 은평면 국말증언자 : 안종금관계 : 안종건, 안복례 씨의 동생일제 치하 당시, 우리 어머님은 만주를 오가시며 장사를 하셨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해 만주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어머님은 장사만을 위해 만주를 가셨던 것이 아니었고, 그곳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에게 독립자금을 조달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만주를 드나드신 것이다.그러나 그렇게 일제 치하에서 숨죽이며 독립운동을 해오면서도 별탈 없이 무사하게 지냈던 우리 집안이 망하게 된 것은, 오히려 해방이 된 후 같은 민족에 의해서였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그 때 우리가 살았던 집은 일본식 집이었는데 집이 널찍하고도 좋아서 동네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좋은 집이었다. 그러나 그리도 좋았던 그 집에 화근이 될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우리 근처에 살던 김 씨가 우리 집과 땅을 탐내어오다 우리 안씨 집안에 부역자가 있는 것을 기회로 하여 9·28 수복 후 부역자 처단의 바람이 불자 우리 가족을 치안대에 밀고한 것이다. 다행히 나는 치안대의 추적을 피해 무사히 몸을 피하였으나 그 때 치안대로 끌려갔던 우리 형님(안종건)과 누님(안복례), 그리고 할머님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우리 가족을 밀고했던 김 씨는 그 후 우리 집과 밭 1000여 평을 빼앗아 갔고, 우리 집안은 도저히 그 동네에서 살수가 없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어머님은 끝내 이 사건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시고 결국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셨다. 우리 어머님은 일제 치하에서도 직접 만주를 오가며 장사를 하면서 독립군을 지원하셨을 만큼 굳센 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어머님도 아무 잘못도 없이 하루아침에 생떼같은 자식을 둘씩이나 잃고, 살던 집과 땅마저 빼앗긴 채 거리로 나앉게 되는,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이 억울하고 기막힌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신 것이다.나는 외갓집에서 자랐는데, 그래도 고향이라고 다시 국말에 갔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는 빨갱이 자식이라는 비난과 따돌림만은 당할 뿐이었고, 그 후로는 차마 다시 고향에 가 볼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빨갱이 가족이라는 비난이 두려워 평생을 숨을 죽이며 살아야만 했다. 훗날 우리 외할머님은 당시 김 씨에게 빼앗겼던 그 집을 배가 달하는 가격을 치르고 되사들이셨다. 오죽하면 그렇게라도 가슴속의 울분과 한을 풀어보려 하셨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희생자 : 권혁길당시 주소 : 경기도 고양군 중면 장항리 438증언자 : 권희숙관계 : 딸우리집은 한국전쟁 당시에도 피난을 못 가고 있었다. 공산당 치하가 되고서 마을 사람들에게 자꾸 무슨 회의를 나오라는 독촉이 있었다. 피할 방도가 없었기에 회의에 나갔다. 거기서 한 일은 벼이삭과 수수이삭의 숫자를 세서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하신 부역의 전부였다.9.28 수복 후 치안대가 아버지를 연행하여 마을에서 큰집의 헛간에 가두었다. 그 헛간에는 당시에 부역을 했다고 하여 잡혀온 사람들이 헛간 가득히 갇혀 있었다. 헛간에서는 치안대들이 심하게 매를 때렸기 때문에 심하면 거동조차 하지 못한 상태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치안대는 우리집 식구들이 빨갱이 가족이라고 가족 모두를 잡아다 헛간에 가두고 매를 무척 많이 때렸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할아버지는 피로 옷이 들러붙을 정도였다. 아버지를 잡아갔던 치안대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데는 그것도 부족했는지 빨갱이랑 연락할지도 모른다고 억지를 부리며 밥만 집에서 해먹고 하루종일 헛간에서 꼼짝도 못하고 갇혀있게 만들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열흘 이상을 지내다가 치안대들이 집으로 돌아가라는 소리에 나올 수 있었다.이때도 아버지는 풀려나지 못하셨는데, 치안대들은 아버지가 구파발 지서로 심사를 받으러 갔다가 고양서로 가야한다면서 풀어주지 않았다. 그 얼마 뒤에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가 고양서로 돌아오신 줄 알고, 고양서에 있으면 밥을 못먹는다는 말이 많았기 때문에 밥을 해서 고양서로 가져갔다. 그래서 막막하기는 하였지만 어머니께서 15일 이상 밥을 하여 계속 가져갔다. 그러던 중에 이웃에 살던 사람의 동생이 군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 사람에게 부탁하여 고양서에 아버지가 계신지를 알아보게 했다. 그런데 고양서에는 우리 아버지가 없으니 밥을 해오지 말라는 대답만 해주었다고 전해주었다. 그러나 얼마 후 아버지와 같이 잡혀 있었다고 하는 사람을 알게 되어 이것저것 들어보니, 한 번은 불려나가서 죽도록 매를 맞고 들어왔는데 그 다음 번에 불려나가서는 들어오지 않았다며, 금정굴에서 죽은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엄청난 소리였다.우리 가족은 이런 한도 풀지 못하고 억울함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할아버지는 수복 당시에 54세 이셨는데, 그 때 헛간에서 맞은 몰매 때문에 거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시다가 후유증으로 고생만 하시고 돌아가셨다. 또 가을에 추수한 곡식들도 치안대들이 다 퍼 가는 바람에 그 해 겨울에는 죽되는 것은 무슨 풀이든지 절구에 찧어서 먹으며 겨울을 나야만 했었다. 그 이후로도 먹고사는데 어려움이 너무도 많았다.---------희생자 : 서정희당시주소 :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사리현2리 390당시 나이 : 33세증언자 : 이순남관계 : 처우리 남편은 일산 쪽에서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참 똑똑한 양반이었는데, 동네에서 문맹퇴치 운동을 한다면서 야학 같은 것을 열어 동네 사람들이 참 좋아하기도 했었다. 지금 우리 아들이 살고 있는 집도 그 때 동세 사람들이 고맙다고 지어준 것이다.남편이 음력 5월말쯤부터 무슨 모임이 있다고 나갔더랬는데, 음력 6월 9일(양력 7월 23일)날 나가서는 3일이 되도록 들어오질 않았다. 그러다가 아는 사람이라면서 기별이 왔었는데, 우리 남편이 고양리 읍사무소에 있다면서 밥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엿새 간을 고양리로 바가지 채로 밥을 해다가 날랐다. 그런데 이레 째 되는 날엔 밥을 가지고 갔더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때 나는 한 살 먹은 아들을 등에 업고 힘들게 거기까지 갔는데 아무도 없으니 힘이 빠져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행방을 물으니 어딘가로 전체가 이동했다고만 해서 이북으로 간 줄만 알고 있었다.그러다가 얼마 후 우리 동네에 살던 조대의 씨의 부인을 통해 남편의 소식을 듣게 됐다. 조대의 씨는 남편이랑 같이 갇혀서 함께 고양경찰서로 넘어갔었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온 분이다. 도망쳐 온 경위를 들으니, 함께 붙들려가서 묶여 다니면서 밤에 산 속으로 이동을 하길래 넘어지는 척 하면서 도망을 쳤다고 했다. 도망치는 그의 뒤로는 콩볶는 소리 같은 총소리가 났다고 한다. 남편이 그렇게 잡혀간 후 어느 날인가는 치안대원들이 남은 가족들마저 잡아가겠다고 집으로 쳐들어온 적이 있었다. 집에 있는 가족들을 모두 잡아가 빨갱이의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하는 것을 평소 우리 남편에게 도움을 받았던 동네 사람들이 극구 만류해 다행히 식구들은 무사했고 치안대원들에게는 대신 검은 돼지를 주어 보냈다.남편이 언제 어떻게 끌려갔는지 알지도 못한 채, 고양경찰서에 감금되어 있었다는 것만 알았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가 남편이 살았다면 61세가 되었을 해부터 생일을 기일로 해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희생자 : 최연당시주소 :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덕이리 1006번지증언자 : 최진관계 : 동생우리 집은 형제가 여덟이다. 그 중 첫째 오빠와 넷째 오빠는 한국전쟁 전에 대동청년단과 감찰대에서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막내 오빠의 친구들이 막내 오빠에게 함께 일을 안 한다면 다른 형제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래서 고민하던 막내 오빠는 할 수 없이 가족들을 위해 인민치하에서 일을 보게 됐다.9·28 수복이 되고 정권이 바뀌면서 태극단이 다시 들어왔고, 당시 정규적 민생보호 규제가 되어있지 못했던 때였기 때문에, 치안대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면서 온 권력을 휘어잡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치안대는 인민치하에서 일한 부역자들을 색출한다면서 막내 오빠를 찾으러 집으로 왔었다.당시 연이 오빠는 파주, 교하 쪽의 국민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부역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치안대는 막내 오빠가 없으니까 연이 오빠를 잡아서 일산서로 데려가고 말았다. 그리고는 막내 오빠를 내놓지 않으면 모두 죽인다는 협박을 하고 돌아갔다. 아버지는 할 수 없이 막내 오빠를 설득하여 다른 형제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니 자수하라고 권유하셨다.막내 오빠는 울면서 “식구들을 살리려고 일한 것이니 나 좀 살려달라”고 목놓아 우셨지만, 치안대는 그런 오빠를 끌고가 버렸다. 막내오빠는 등에 부역자임을 아타내는 종이를 붙이고 서럽게 울며 끌려 가셨다. 그 모습을 보시던 어머니는 목놓아 울 수 밖에 없었고, 아버지는 이 일로 너무 괴로워하신 나머지 끝내 돌아가시고 말았다.나 자신도 문맹퇴치를 위한 활동을 한 적이 있었는데, 여맹위원으로 잡힌 사람들이 내 이름을 경찰에서 말해 일산서로 불려 갔었다. 그곳에서 친천 최구영 씨가 5일 부역하고 잡혀와서 옆 방에 있다가 서울로 압송된다며 노예처럼 끌려나간 뒤 전혀 소식이 없어졌던 것을 본 적이 있었다.막내 오빠의 행방도 잡혀간 이후로 전혀 알 수 없었다. 연이 오빠는 일산서에 있을 때 오빠의 부인이 일산서로 몇 번 밥을 해서 가져갔다. 그러나 나중에 밥을 해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고, 오빠에 대한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다행히도 나는 문초를 당하고 매를 맞고는 풀려날 수 있었다. 그 때 경찰서에는 어린애와 함께 들어와서 죽으려고 목을 메었던 여자도 있었고, 물을 주지 않아서 오줌을 받아먹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그곳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처참하게 갇혀 있었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