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칠정론의 발단 <천명도설> 저술한 고양팔현의 한 분

▲ 퇴계 선생의 친필.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은 공경의 대상이다. 홀로 있을 때야말로 더욱 삼가라.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간사하고 사악한 생각을 하지 마라’고 적혀있다.

고양시 내의 무수히 많은 묘를 찾아 그네들의 일평생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와 묘비를 보면 의외의 수확을 거두는 경우가 많다. 많은 묘들 중에는 석봉 한호의 글씨, 우암 송시열, 백사 이항복, 월사 이정구, 점필재 김종직 등 수 많은 조선의 명현이 지은 비문이 산재하고 있어 이들을 찾아 비문을 읽어보는 것도 또한 답사의 묘미가 있다.
이번 호에는 고양팔현의 한 분으로 평생을 야인으로 살며 조선시대 중기 사단칠정론의 발단이 된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한 추만 정지운 선생의 묘갈(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석) 비문을 쓴 퇴계 이황의 글을 소개한다.
/취재 김한담 전문기자(전통예술문화원 하누리 대표)


정지운 선생 묘는 일산2동 중산마을 고봉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배(配) 정부인(貞夫人) 충주 안씨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묘 앞에는 3기의 묘비와 상석, 향로석, 망주석과 문인석이 있으며 고양시에서 설치한 향토유적 제11호 안내문이 있다.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 선생은 사재 김정국, 모재 김안국 형제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정진했다. 그는 조선성리학의 형성기에 철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성리학의 체계를 수립하는 작업에 문제점을 제시했다. <천명도설>은 동생인 지림(之霖)이 성리학의 핵심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저술된 것이다. <천명도설>은 그림과 설명을 곁들여 인간과 자연의 관계, 천명, 심성, 음양오행, 경(敬), 이기, 사덕, 사단, 칠정, 존양과 성찰 등의 문제를 체계화한 것으로 자연철학과 인생철학 및 심성철학을 종합 정리한 것이다.

한국 유학에서 갓 입문한 초학자들에게 유학의 심오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방법 중 하나가 ‘그림’이었다. 권근은 <입학도설>을 지어 초학자들에게 경전의 의미를 가르쳤고, 정지운은 <천명도설>을 지어 아우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 이황 역시 17세의 나이로 등극한 어린 임금 선조를 위해 <성학십도>를 지어 군주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이처럼 그림과 해설로 어려운 철학 이론을 알기 쉽게 설명한 도서류(圖書類)의 제작은 한국 유학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다. 물론 도서류의 제작은 그 기원이 중국에 있긴 하지만, 중국이나 유학이 성행했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우리의 경우처럼 도서의 제작이 활발한 예는 없었다. 결국 도서를 이용한 성리학 탐구의 방법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크게 발전하고 적극적으로 이용된 학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림’ 설명은 한국 유학의 특징

 

▲ 퇴계 이황 선생의 초상.
<천명도설>은 성리학의 축쇄판으로 많은 학자들의 쟁점으로 부각됐으며 마침내 퇴계 이황의 정정을 받게 됐다. <퇴계연보>와 <천명도설후서>에 의하면 퇴계가 천명도를 정정해 준 것이 1559년 10월이다. 퇴계가 천명도를 얻어 보고 추만을 만나자고 청하여 이루어진 만남에서 추만은 “지난번 모재, 사재 두 선생 문하에서 배우면서 그 의논을 들었으나 원래 성리학은 미묘하기 때문에 어디 가서 질문하여 밝힐 곳이 없음을 근심하다가 시험삼아 주자의 학설을 가져다가 여러 설을 참고하여 한 도판으로 만들어 선생(모재, 사재)께 가져가서 그 그릇된 것을 지적해 줄 것을 청했더니 선생이 공을 쌓지 않고 가볍게 의논할 것이 못된다고 하셨으며 그 후에 그 그릇된 것을 자각하여 고친 곳이 많지만 아직도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퇴계는 “두 선생께서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 한 것은 반드시 깊은 뜻이 있을 것이나 오늘 우리들이 학문을 강구하다가 타당하지 못한 데가 있으면 어찌 구차하게 동조하거나 억지로 감싸주며 그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지 아니 하겠는가?”하고 둘이서 정정한 후에 다시 교정하여 완결했다. 이 과정에서 퇴계와 교분을 쌓게 되어 선생의 사후에 퇴계 선생이 비문을 짓게 된다.
명종 17년(1562) 5월에 건립한 묘갈(墓碣)에는 ‘추만거사정지운지묘’라 새겨져 있는데 비문은 퇴계 이황이 짓고 송인(宋寅)이 썼다. 비는 높이가 157cm, 폭 61cm, 두께 32cm 크기로 아담하며 마모가 심하여 현재는 판독이 어려운 상태라 <고양금석문대관>에서 이를 발췌, 소개한다.

 

 

▲ 유교철학을 열 가지 도설로 작성해 이황 선생이 선조 임금께 올린 ‘성학십도’. 이처럼 그림과 해설로 철학이론을 설명한 도서류의 제작은 한국 유학의 특징이다. 사단칠정론의 발단이 된 정지운 선생의 <천명도설(天命圖說)> 역시 그림과 설명이 곁들여진 책이다.
나의 벗 정군 지운은 자(字)가 정이(靜而)이다. 그의 선조(先朝)는 경주에서 고양의 사포(巳浦)로 옮겨와 살았다. 증조부인 하(夏)는 통례원 인의(引儀)였고 조부인 한숙과 부친인 인필은 모두 은거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군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보통사람과 같지 않았고 큰 뜻으로 학문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다. 마침내 사재 김정국 선생이 고을의 망동(芒洞)에 물러나와 살게 되자 정지운 군은 거기에 가서 선생을 따라다니며 배웠다. 정지운 군은 성리의 설에 흥미가 있어서 성현의 말씀을 반드시 믿어야 될 것으로 여기고 세속의 비루한 풍속에 빠지지 않았다. 정지운 군이 선생의 문하에 있은 지 여러 해가 지나자 선생은 그를 지극히 칭찬했다. 후에는 또 모재 김안국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의심나는 것들을 물었다.

정지운 군은 효의(孝義)에 독실하여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슬픔이 예(禮)에 지나쳤고 몸소 밥 짓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재 선생이 돌아가시게 되자 또 선생을 위한 마음으로 상주(喪主)와 같이 한 것이 3년이었다. 정지운 군은 가난해 집이 없어 경성(京城) 서문(西門) 안에 임시로 살았는데 처와 첩이 길쌈하여 번 돈으로 생활했으므로 이따금 곡식이 끊긴 일도 있었으나 이 때문에 근심한 적은 없었다.

정지운 군은 용모가 수려하고 마음이 평탄했다. 옛것을 좋아하고 선(善)을 즐겼으며 악(惡)을 미워하고 의리(義理)를 두려워 할 줄 알았다. 성안에 살고 있었으므로 사대부 간에 서로 좋아하는 자들끼리 유유상종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정지운 군을 좋아하지 않은 자들이 다투어 정지운 군을 지목해 헐뜯었다. 이때 동몽학(어린이 교육을 위한 학교)이 신설됐는데 이 직책을 맡은 자는 녹을 얻고 벼슬길이 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정지운 군을 천거하여 이 직책을 맡기려 하는 이가 있었으나 정지운 군은 하지 못하겠다고 사양하고 더욱더 이름을 감추고 자취를 숨겼다.

내가 정지운 군과 더불어 같은 마을에 잠시 살았으나 서로 알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다행히 서로 보고는 정지운 군과 더불어 <계몽(啓蒙)>, <심경(心經)> 등의 책을 읽었다. 무릇 내가 예전부터 의심을 품었던 것을 정지운 군이 계발(啓發)시켜 준 것이 많았다. 군은 또 일찍이 <천명도설>을 짓고서 나에게 틀린 곳을 바로잡아달라고 요청했다. 정지운 군의 학문은 처음에 순서를 밟지 않아서 정밀하게 연구하고 거듭 익히는 방법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 때문에 볼 곳에 끝까지 도달했으면서도 간단하게 넘어간 곳도 또한 있었다.

그는 세상의 변화를 겪으면서 혹 환난을 피하려는 생각이 지나쳐 술에 의탁해 숨고자 했다. 그러나 정지운 군은 이와 같이 행동한 것을 스스로 깊이 뉘우치고 노년에는 자신의 행동을 경계하고 힘쓸 것을 함께 기약했다. 몇 년이 못되어 내가 병 때문에 동(안동)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이별은 많았고 만남은 적었으며 정지운 군도 병이 들었다.
풍덕군수 안홍이 정지운 군의 처남으로서 매형 정지운 군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신유년(1561) 봄에 정지운 군이 안홍 군수를 찾아가 함께 천마산에서 놀았는데 얼마 뒤 정지운 군의 병이 갑자기 심해져 돌아오다가 승천부의 강어귀에서 죽었으니 향년 53세였다.

정지운 군은 아들은 없고 딸이 둘 있는데 이학명과 송대운이 그의 사위들이다. 염하고 장사지내는 일은 안홍이 유감없이 맡아 처리했다.
정지운 군은 도성이 숨을만한 곳이 못된다고 생각하여 고양(高揚)의 강가에 땅을 보아두고 가옹(稼翁)이라 칭하고 몸소 경작해 소원을 풀려는 뜻을 보였는데 결국에는 재산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지운 군의 궁핍함이 이와 같았으나 끝내 대수롭지 않은 녹(祿)에 뜻을 굽히지 않았으니 그를, 묘(墓) 사이에서 술과 고기를 구걸하여 만족을 구하려는 자와 견준다면 어떠하겠는가? 만일 정지운 군으로 하여금 시종 엄한 스승과 외우(畏友) 사이에 주선해 그 학문을 확충하게 했다면 그의 학문 수준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 사단칠정론의 발단이 된 <천명도설(天命圖說)>로 교분을 쌓아 사후에 이황 선생이 직접 비문을 짓게 된다. 명종 17년(1562) 5월에 건립한 묘갈(墓碣)에는 ‘추만거사정지운지묘’라 새겨져 있는데 비문은 퇴계 이황이 짓고 송인(宋寅)이 썼다. 비는 높이가 157cm, 폭 61cm, 두께 32cm 크기로 아담하며 마모가 심하여 현재는 판독이 어려운 상태다.
정지운 군을 장사지내고 나서 벗들은 그가 평소 자호한 것을 따라 그 무덤을 ‘추만거사지’묘라 표했다. 검열(檢閱) 정자중이, 안홍이 쓴 행장(行狀)과 응교(應敎) 박화숙이 쓴 묘지명을 가지고 와서 명(銘)을 써달라고 청하므로 내가 정(情)으로는 차마 하지 못하되 의리(義理)로는 사양할 수 없어 울음을 참고 명을 쓰니 다음과 같다.

옛날 학문하던 사람들 스승과 벗 없는 이 누구였으리오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어려서는 스승이 있으나 크면 없네
간혹 있다 하더라도 저버리지 않은 자 적으나
스승이 있으되 저버리지 않음을 내 군에게서 보았네
스승의 상을 부모상같이 하여 종신토록 했고
기이한 품성을 타고나 덕의 훈향(薰香)이 있어
스승의 뜻을 높이 걸고 그 들은 것을 넓혔고
궁구(窮究)해 이른 것이 뛰어나고 공을 끼친 것이 성(盛)하도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나 사람들은 미워해 헐뜯누나.
크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니 착잡하고 마음이 아팠도다.
만년에 서로 만나 나와 느낌을 같이 했도다.
도서(圖書)는 윤택하게 하고 성리학으로 단련하여
서로 공부하기를 기약했더니 갑자기 떨어지게 되었도다.
어찌 알았으리오 한 번 이별이 황천의 일별일 줄이야.
기대가 허사가 되니 벗들이 애석해 하도다.
고양(高揚)의 선영(先塋)이 그대의 잠든 곳이로다.
명을 써 후인에 고하노니 이 무덤에서 나무하거나 소 먹이지 말지어다.


 

<천명도설> 저술하고 이황 만나 서로 논증

이상이 퇴계 이황이 쓴 비문으로, 선생을 아끼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오는 문장이다. 또한 사후 약 10여 년 후 조선왕조 명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명종 16년(1561 신유 / 명 가정(嘉靖) 40년) 3월 9일 사관이 기록하길 ‘처사(處士) 정지운(鄭之雲)이 졸(卒)했다. 그의 자(字)는 정이(靜而)이고 자호(自號)는 추만(秋巒)이다. 성품이 활달하고 효의(孝義)에 독실하였으며, 양친의 상을 당하여서는 예에 지나치게 슬퍼했다. ……<중략>…… 그 행동은 진실하였고 분수를 지켰으며 피아의 한계를 초월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보기에 절제가 없는 듯했다. 그러나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타고난 천성이었으며 세상의 험한 일을 많이 겪었어도 조금도 꺾인 적이 없었다. 젊어서부터 성리학에 전심하여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고 깊은 이치를 연구하였는데 뒤에 이황(李滉)을 만나 서로 논증하며 바로잡았다. 그 내용은 모두 성현(聖賢)에 근본하였고 표절하거나 이것저것 모아 놓는 논설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자들이 이를 보면 개발되는 바가 많았다. 나이 53세로 졸하니 식자들이 애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며 애도하고 있다.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