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에 얽힌 재미있는 우리 풍속

세시풍속 중 ‘설’은 가장 남성적인 명절이다. 여성적인 명절 ‘정월대보름’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수평적인 명절풍습이라면 항렬에 의거한 가부장적이고 가족 중심적인 세배 문화는 다분히 남성 중심적이다. 이번 호에는 수직적인 ‘설’풍습에 대해 알아봤다.
/취재 김한담 전문기자(전통예술문화원 하누리 대표)
차례
정월 초하룻날 아침은 차례를 올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같은 종족은 모두 종가에 모여 차례를 지냈다. 설날에는 타향에 나가 있던 사람도 모두 돌아와 생존하신 분들에게는 세배를, 돌아가신 분들에게는 차례를 지내기 때문에 일가가 이때에는 거의 다 모이게 된다. 번성한 집에서는 모두 모여야 했기 때문에 12시 가까이 되어서야 지내는 집도 있었다. 4대조의 차례는 윗대에서부터 차례로 지내는데, 사당문을 열고 신주를 모셔다가 지내거나, 신주가 없는 집은 지방을 써서 붙이고 지냈다.
설날 아침은 떡국 등 더운 음식을 준비해 차례상을 차렸다. 떡국을 낼 때 꿩고기는 구하기 어려워 닭을 많이 사용했는데 여기서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감모여재도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 조선 65.3×89, 성균관대학교
이 감모여재도를 보면 매우 입체적으로 품격을 갖춰서 그렸는데 중앙에 필요한 위패를 모셨고 위패 앞에는 제사에 필요한 과일이나 향, 향합, 촛대, 수란 그리고 꽃병을 배치했다. 제상위에 놓인 과일은 하나같이 씨가 보이도록 단면을 그려 자손번창을 염원하는 소망을 담았다.
도소주
차례가 끝난 다음에 ‘음복’이라 하여 제사에 쓴 술이나 다른 음식을 제관들이 나누어 먹
는다. 특히 정월 차례 뒤에는 ‘도소주’를 마셨다. 도소주는 술에 산초, 방풍, 백출, 밀감피,
육계피 등을 조합해 만드는데, 이것을 마시면 일년 동안의 사기를 없애고 오래 산다고 믿었다. 모두 둘러앉아서 마셨는데, 특이한 것은 ‘송곳은 끝부터 들어간다’고 해 나이 어린 사
람부터 마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배와 세뱃돈
차례 후 술과 그 밖의 제물로 간단히 음복하고 상을 물린 후 웃어른께 차례로 세배를 드렸
다. 일가 친척 중에서 나이가 많고 항렬이 높은 어른부터 시작해 나이 차례, 항렬 차례로 세배를 한다. 이때 나이는 어리나 항렬이 높은 사람이 세배를 하면 항렬 낮은 어른은 앉은 채 절을 받지 못한다.
일가나 친척으로 내외할 필요가 없을 때에는 안팎 세배를 모두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남자 어른들에게만 했다. 옛날에는 하인과 같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마당에서 허리만 굽혀 세배를 했다.
지금은 세뱃돈주기가 일반화돼 있으나 원래 우리 나라에서는 음식 등을 주고받았고 돈을 주는 풍습은 없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유래됐다고 보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원래 돈을 주고 받는 것을 꺼려 어른에게는 주식을, 아이들에게 밤, 대추, 약과 등을 집어주는 정도였다.
세배가 끝나면 모여 떡국으로 아침 식사를 하는데 식사 때의 좌석 배치는 아직까지 가부장
제의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성묘
생존한 어른께는 세배를 하지만, 이미 사별한 조상에게도 생존시처럼 인사를 드렸다. 가장 윗대 산소에서부터 차례로 성묘를 한다. 성묘는 차례상에 쓰지 않은 음식을 따로 준비해 예전에는 남자들만 참여했다.
눈이 왔을 경우에는 모두 산에 올라가 산소에 덮인 눈을 치웠다. 최근에는 정초보다 8월 추석에 성묘하는 추세로 변화되고 있다.
세화

옛날 궁중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도화서에서는 세화를 그려 이를 임금에게 바쳤다. 세시에 화원들이 세화를 그려내면 등급을 매겨 그에 따라 업무의 근속여부와 녹(祿)을 주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회화적 수준도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세화는 임금이 신하들에게 한 해의 건강과 상서로움을 빌어주는 선물이었다. 민가에서 붙이는 문배는 궁중에서 붙이는 문배에서 유래했으며, 궁중에서는 한 길이 넘는 문배를 대궐문에 붙였다.
설빔
설빔은 대체로 설날 아침 일찍 세수하고 미리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말한다. 가을부터 옷감을 준비했다가 미리 정성껏 옷을 장만해 두었다. ‘설비음’이라고도 했다. 여유가 있는 집안은 두루마기를 비롯해 갓, 도포, 버선, 대님, 행전(발목에서 장딴지 위까지 바짓가랑이를 둘러싸는 물건)까지 마련했으나 형편이 여의치 않을 때는 댕기나 대님이라도 새 것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 선비들은 잘 손질한 한복에 까치대님(오색의 조화를 맞춰 호화스럽게 만든 대님)을 하기도 했다. 신은 어른은 징을 박은 가죽신, 또는 미투리를 신었고, 여자는 꽃신 또는 꽃미투리를 신기도 했는데, 중류 이하에서는 새 짚신을 만들어 신는 것이 통례였다.
머리카락 사르기

않았다. 옛날 여자들이 모두 머리를 빗을 때에는 얼레빗으로 긴 머리를 대강 빗고 참빗으로 곱게 빗는데 머리를 빗을 때 빠지는 머리털을 차곡차곡 빗접에 모아두었다가 정월초하루날밤 이것을 사르면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속설을 믿었다. 의학의 발달과 미용실이 일반화되면서 이 풍속은 자연히 사라졌다.
문안비
옛날에는 중류 이상의 가정에서는 부녀자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금지돼 있었다. 즉 남존여비의 풍습은 부녀자의 외출을 금했고, 설이 돌아와도 세배하기 위하여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었다. 이때 정초 3일부터 15일 사이에 여종을 잘 꾸며 일가친척에게 보내어 새해의 문안을 드리게 했는데, 이러한 여비를 ‘문안비’라 불렀다. 부녀자들은 출입의 자유는 없었으나 예의는 갖추어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안비가 생긴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정월 초삼일 안에 여자들은 문밖 출입을 삼가고 남의 집에 가지 않았다. 아직까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초하루 날만은 남의 집 방문을 안 하고 아침에 전화하는 것을 예의 없는 일로 여긴다.
연초의 점복

는데 이를 ‘청첨’이라 했다. 까치 소리를 들으면 풍년이 들고 행운이 오며, 참새 소리를 들으면 흉년이 들고 불행이 올 징조라고 믿었다.
신수점을 칠 때 삼재가 들었으면 그 액을 면하기 위해 옷을 사르거나 물고기 모양의 떡을
버리기도 했다. 삼재운이 든 첫째 해를 ‘들삼재’, 둘째 해를 ‘누울삼재’, 셋째 해를 ‘날삼재’라 한다. 부부 중에 ‘들삼재’가 든 사람이 있으면 그 해에 사람이 들어와서는 안되고 ‘날삼재’가 든 사람이 있으면 사람이 나가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부모나 조부모의 삼재 든 해에는 자녀의 혼사를 피하고 합가하지 않았다.
칠교놀이

양반가에서는 놀이를 겸해 자녀의 두뇌를 가늠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누구를 과거 시험을 보게 하고 누구를 집안을 지키게 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능이었다. 예나 지금이나공부 뒷바라지에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지혜판’을 통해 자식의 운명을 결정했던 것이다.
칠교도에는 무려 5백12개 형상이 있다고 한다. 주변에서 널리 쓰는 생활용품부터 사물의 이치와 우주의 원리같은 추상적인 것까지 형상화했다.
투호놀이
고려 때부터 궁중이나 양반집에서 손님 접대용으로 행해져 왔던 것으로 마당 한복판에 항아리를 놓고 편을 갈라 화살을 던져 넣던 놀이다. 본래는 중국 당나라에서 성행되었던 것인데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졌다고 한다. 양반이나 귀족들의 놀이여서 예(禮)가 엄격했다. 일반에서는 도구를 마련하는 일이며 절차가 복잡해 감히 엄두를 못 내던 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