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가구까지 모여살다 가좌지구 개발로 흩어져

▲ 택지개발이 시작되기 직전에 촬영된 여주이씨 집성촌의 모습

여주이씨 집성촌 가좌동 음송곡
 
2005년 현재 우리나라의 평균 가족수는 2.9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자녀가 없거나 1명뿐인 가족이 대부분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 대 동안 한 지역에 머물러 살고, 같은 성씨끼리 모여 사는 집성촌의 개념은 현대인들에게는 낯설다.
그러나 도·농 복합도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고양시에는 여전히 집성촌들이 존재한다. 이에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들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들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그 첫 번째로 여주 이씨를 찾았다. - 편집자 주

취재·촬영 | 박기범 기자
도움말|이영찬 (고양시씨족협의회 부회장), 여주이씨 현감공파 종중회

현감공파 정착하며 집성촌 이뤄

고양시에 거주하는 여주(驪州) 이(李)씨는 대다수가 현감공파다. 이들은 400여 년 동안 고양 지역에 살아오면서 삶의 터전을 가꿔왔다. 이들이 처음 고양을 찾은 곳은 지금의 가좌 5단지, 6단지 아파트 부근인 옛 음송곡이다. 이때가 약 162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2000년경부터 이 지역에 택지개발이 시작되면서 여주 이씨는 400여 년 동안 지켜온 삶의 터전을 잃고 만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집성촌이 사라지고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도 많아졌지만 아직까지도 가좌동 부근에는 3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여주 이씨는 한 때 이 지역에서 100여 가구가 모여 살기도 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사회상이 변화되면서 고양을 떠나는 가구가 많아졌고 아파트가 개발되기 직전까지도 4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며 함께 모여 살았다.
여주 이씨는 고양에 정착하기 전에 오랜 세월을 파주에서 생활했다. 중시조인 문순공 이규보 선생 10세조인 ‘봉열대부 제주목사 증통정형조참의’ 상노공이 파주군 지석면 지석리에 정주 했다. 이로부터 여주 이씨는 14세조까지 파주에서 정착해 생활한다.
이후 주부공의 부인 ‘전의(全義) 이(李)씨’가 두 아들과 함께 고양으로 이주를 하게 되면서 여주이씨 현감공파의 고양에서의 역사가 시작된다. 전의 이씨와 함께 고양으로 온 두 명의 아들 중 큰 아들에 대한 행적은 알 수가 없으며 작은 아들인 민형의 자손들이 고양 지역에 번창하면서 집성촌을 이룬다.
이후 여주 이씨 15세 이민형의 딸이 음송곡 동남면 얕은 고개 넘어 소당이라는 마을의 파평 윤씨와 결혼해 소당에 정주 한다. 당시 이곳에는 파평 윤씨가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이들 부부의 묘가 현재 송포초등학교 뒷산에 위치해 있으며 그 후손들이 번창해 여기에 집성촌을 이루기도 했다.

학당 송산제 설립하고 인재양성

▲ 가좌지구 개발 이후 아파트가 들어선 현재의 모습
존경받던 문인 이규보의 후손답게 여주 이씨는 고양 지역에 정착하면서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여주 이씨는 지역에 ‘송산제’라는 학당을 설립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종중의 자제들은 물론이고 인근 주민들의 자녀들까지 함께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하면서 인재 양성에 많은 힘을 쏟게 된다.
아이들은 ‘송산제’에서는 연령에 따라 천자문, 소학, 대학, 명심보감과 4서 3경을 가르치며 한학의 기본을 다졌다. 송산제의 운영은 종중에서 학답을 마련하고 이를 경작하면서 얻는 소득으로 충당했다. 송산제는 이렇게 주민들과 지역과 함께 교육기관으로 성장하게 된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는 인근 고개 넘어 지역에 이영운 선생이 한글 강습소를 마련하면서 송산제와 더불어 지역의 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이후 송포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지역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은 송포초가 이어가게 된다. 문중에서는 송산제 이후 70년대 초 ‘경모제’를 설립, 조상들의 은덕을 기리기도 한다.
이처럼 지역의 인재들을 육성하며 교육기관의 시초를 닦아온 송산제의 위치는 지금의 송산중학교 후문 부근이다. 송산 중학교 옆에는 가좌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으니 교육을 위한 송산제의 기운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듯하다.
여주 이씨의 지역 교육에 대한 애정은 송포초등학교가 설립된 이후에도 계속된다. 송포초등학교가 설립됐으나 교실이 부족해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어려워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면장이던 여주이씨 이상욱씨와 부면장이던 윤우현씨(당시 여주이씨 아내와 결혼함)가 이 일대에서 살림이 꽤 넉넉했던 조영계 여사를 찾아가게 된다. 두 사람은 조 씨에게 아이들이 원활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을 한다. 조 씨는 두 사람의 진실한 모습과 간절한 부탁에 논 4천 평을 제공했고, 이에 송포초는 학교를 증축해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지역은 여름이면 홍수가 빈번해 농사를 망치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1932년에 둑을 쌓는 공사를 시작한다. 이 때 조영계 여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며 지원을 하기도 했다. 이런 조영계 여사를 기리는 비석이 현재 송포초등학교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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