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③ 하동 정씨 문성공파 집성촌 설문동 2005년 현재 우리나라의 평균 가족수는 2.9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자녀가 없거나 1명뿐인 가족이 대부분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 대 동안 한 지역에 머물러 살고, 같은 성씨끼리 모여 사는 집성촌의 개념은 현대인들에게는 낯설다. 그러나 도·농 복합도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고양시에는 여전히 집성촌들이 존재한다. 이에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들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들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그 세 번째로 하동 정씨를 찾았다. - 편집자 주취재 | 박기범 기자사진 | 한진수 부장도움말 | 하동 정씨 문성공파 설문동 종친회.사진글1. 하동 정씨 문성공파가 살고 있는 설문동의 모습1617년 설문동에 오다- 하동 정씨는 본관을 같이하며 계통이 다른 3개 파가 있다. 그 중 설문동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 하동 정씨 문성공파는 삼한 말기에 하동으로 내려가 그 지방을 지키다가 고려 초에 호장으로서 향병을 이끌고 평장사에 오른 정도정을 시조로 한다.그 후 문성공파는 세계(世系)가 실전돼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후손 정석숭 공을 1세조로, 10세손인 정인지 공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설문동의 하동 정씨는 모두 정인지 공을 중시조로 하는 문성공파다.하동 정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상신 1명, 대제학 1명 등 문과 급제자 58명을 배출했다. 조선 전기에는 세종 때 ‘농사직설’을 편찬한 정초, 세종∼세조 때 학자 정인지, 세종 때 정수충, 성종 때 정여창 등이 유명한 인물들이다. 중기에는 광해군 때 정택뢰,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정봉수·정기수 형제, 당대의 뛰어난 서예가였던 정경흠과 정충엽, 지리학자로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한 정상기 등이 있다.2000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하동 정씨의 인구수는 15만 8396명, 가구수 4만 9440가구로 정씨의 7.9%를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시조인 정도정 공으로부터 16세손이며 중시조인 정인지 공으로부터 6세손인 정복일 공은 선조 때의 장군으로 부호군을 지냈다. 정복일 공은 1597년 태어나 1669년까지 생존했으며 6형제를 두었다.정복일 공은 파주 광탄면 용미리, 지금의 공릉 자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라에서 그 곳을 한명회 딸의 능을 쓰기 위해 하동 정씨 문중에 설문동을 사패지로 제공했다. 그러면서 하동 정씨가 고양 설문동에 오게 된다. 이로써 정복일 공은 설문동 하동 정씨 문성공파의 입향 시조가 된다. 이 때가 1617년 경 선조 때이며, 하동 정씨가 정착한 곳이 설문동 산 65-1번지다. 입향 시조인 정복일 공의 묘소는 지금도 하동 정씨 문성공파의 사당 뒷산에 마련돼 있다. 이렇게 고양 설문동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하동 정씨 390여 년을 고양에서 살아왔으며 문성공파는 현재 설문동에서 50여가구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주변 크게 개발되지 않아 옛정취 간직하며 생활하동 정씨가 살고 있는 설문동은 마을 형태가 지네처럼 생겼기에 ‘지네밭 동네, 지네혈, 지네발’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약 2km의 등성이 길을 중심으로 양쪽 골짜기마다 집들이 들어서 있는데, 이런 형상 때문에 언뜻 보면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문봉동과 파주 봉일천으로 이어지는 길이 지네 길이라 불리고 있다. 설문동은 또 고양시에서도 가장 늦게 전기와 전화가 개설되고 길도 가장 늦게 포장됐다. 또 이 곳의 흙은 끈기가 있고 영양분이 좋아서 예전부터 벽돌 공장이 많았다. 이런 땅이 비에 젖거나 눈이 내려 얼어버리면 이동이 어려웠다. 그래서 설문동에는 과거부터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전해져 올 정도다.또 정인지 공의 후손들인 만큼 설문동은 양반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주변에 알려져 누구도 이 마을을 지날 때면 말에서 내려 걸어다녔다고 한다.이런 지형과 주변이 크게 개발되지 않아 설문동 하동 정씨는 외부와 접촉이 적은 상태에서 생활해왔다. 이로 인해 하동 정씨는 심성이 순수하고 양반다운 품성을 유지해왔다. 하동 정씨의 그런 심성으로 인해 예전부터 이 곳은 ‘군자리’ 라고 불려왔다. 외지인들이 설문동에 정착하면 땅도 내어주고, 딸과 혼인도 시켜줄 정도로 넉넉한 심성을 자랑한다. 종친회 정대채씨는 “특이하게도 군자동은 6·25 당시 인근의 다른 지역들이 폭격 등으로 훼손되고 불에 탔으나 군자동만큼은 폭격이 피해 가는 등 전쟁으로 인한 아무런 피해가 없어 인근 주민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고 전했다.<박스 1>하동 정씨를 빛낸 인물 - 정인지 공훈민정음, 고려사 편찬하며 학문발전 기여사진글2. 정인지 공의 영정하성부원군 정흥인공의 장자 정인지 공은 하동 정씨의 10세손이다. 정인지 공은 1396년(태조 5년) 12월 28일에 태어났다. 조선조 3대 임금 태종(太宗)에서 성종(成宗)까지 무려 7대 왕조를 섬기며 예문관 대제학과 집현전 대제학을 지냈고 좌의정과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이는 효행을 대본(大本)으로 삼고 온고지신과 실사구시로 대의에 충실했던 강직한 성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평가받는다.정인지 공은 1414년(태종 14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1475년(성종 6년)에 원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기까지 60여 년 간 조선조 국기확립과 문화창달의 기반을 다졌다. 또 30여년 동안 과거시험 시관으로 문과와 중시 등을 통해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김담, 최항 등 많은 인재를 선발해 배출했다.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후학의 명망을 받아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고려사, 치평요람 등을 편찬해 우리나라 인문 발전에 지평을 넓은 인물로 꼽히고 있다.<박스1>종친회 매년 며느리들 여행보내주며 화합 도모2006년 파보집 만들며 씨족에 대한 기록 남겨사진글3. 하동 정씨 문순공파의 어르신들과 며느리들이 함께 사당에 모여 활짝 웃고 있다.하동 정씨는 설문동에서 6616.6㎡ (약2 천평) 규모의 쌀 농사를 지어 왔고, 한 때 최대 80가구 정도가 거주했다. 인근에서 ‘정씨 촌’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번성했으며 농사를 지을 때면 문중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힘을 모았다. 종친회 정건채 前 회장은 “과거에는 함께 모여서 농사를 지으며 서로 애환을 달랬으나 지금은 기계로 농사를 하다보니 그런 정이 없다. 과거가 그립다”며 그 때를 회상했다. 며느리들도 농경기면 많은 사람들의 음식을 마련하는 등 힘들었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서 좋았다고 한다.하동 정씨의 며느리인 장윤진씨는 “옛날에는 제사 때면 하루 제사를 지내기 위해 종갓집에서 몇 일씩 음식을 만들었다. 지금도 좀 수월해졌으나 여전히 집성촌 제사는 일손이 많이 간다. 집성촌에 살다보니 행동이나 말 하나 하나가 조심스러웠다”고 밝혔다.또 다른 며느리인 경화선씨는 “어른들이 많고 식구들이 많아서 든든한 면도 있었다. 식구들과 형님들이 많다보니 집안 행사 때도 다들 모여서 서로 돕고 의지할 수 있었다. 대가족 제도에서 어른들을 모시며 살다보니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예절을 배우고 어른들과 함께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됐다. 시집 간 딸들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며 어른을 공경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집성촌에서 자라서 다르다고 칭찬한다”고 말했다.하동 정씨 문성공파 설문동 종친회에서는 하동 정씨 며느리들에 대해 매년 1회 여행을 보내주고 있다. 종친회에서 이처럼 여행을 보내주는 것은 드문 경우로 정씨네 며느리들도 “하동 정씨에 시집 잘 왔다”라고 말할 정도다. 2006년 경 자연마을이 점차 줄어들고 뿌리에 대한 후손들의 관심이 줄어들자 종친회에서는 파보집을 편찬했다. 이 책은 하동 정씨 문성공파의 파보만 수록돼 있으며 총 5권으로 구성됐다. 2년의 시간이 걸렸으며 30년 주기로 보통 만든다.종친회 정찬영씨는 “자기 조상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씨족마을도 축소돼 편찬하게 됐다”고 밝혔다. 정동기 종친회장은 “종친회에서는 또 매년 정기 총회와 시제 등을 지내고, 함께 모여 입향 시조에 대한 벌초도 하는 등 종친들의 친목과 단합을 도모하고 있다. 시제는 매년 음력 10월 13일에 시행한다”고 밝혔다.총회 때는 100여명의 문중 식구들이 모이며 이 때는 외지에 나간 식구들도 모두 함께 한다. 종친회에서는 앞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설문동 하동 정씨의 묘소를 한 곳에 모으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다<박스 2>하동 정씨의 주요 유품들공인된 양자증서, 호패, 임금 하사 향로 등 보관사진글4. 하동 정씨 문성공파에 전해지고 있는 양자증서와 향로, 호패건융 33년에 정방림 공이 형 정덕림 공의 셋째 아들 정수성을 양자로 삼았다. 그 양자증서가 현재 종친회에 존재한다. 또 강희 24년에는 정세형 공이 정세장 공의 둘째 아들 정문빈 공을 양자로 삼는다. 그 양자증서도 현재까지도 종친회에서 보관되고 있다. 과거에는 가문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대를 잇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를 공식 문서로 남기고 보존돼 온 경우가 드물어 이 양자증서는 그 가치를 더 하고 있다. 하동 정씨의 문빈 공은 경북 운봉에 현감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임금으로부터 선물로 향로를 하사 받는다. 향로에는 용 모양이 조각돼 있어 문빈 공의 높은 위상을 짐작케 한다. 이 향로와 문빈 공의 호패도 종친회에 남아있다. 호패에는 출생연도와 과거에 합격한 내용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하동 정씨에서는 이 향로를 제사 때면 각 가구마다 돌려가며 사용했다. 지금은 사용을 안 하지만 20년 전까지도 이 향로에 직접 향을 피웠다고 한다. 상지 43년에는 당시 학자이던 정항령 공이 60세가 되면서 수기로 된 족보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항령 공은 61세에 이를 완성하고 눈을 감는다. 그가 병환이 들면서 앓게 되자 당시 임금은 어의를 시켜 탕약을 3번이나 항령 공의 집에 보낼 정도로 그를 극진히 생각했다. <박스3> 이야기 한 토막 나라도 탐복한 열녀 … 설문동 설씨는 어디 있나?1820년경에 설문동 하동 정씨 가문에 나라에서 내린 열녀문이 세워진다. 원시조인 정도정 공으로부터 22세손이며 1759년에 태어나 1815년에 돌아가신 정수태 공은 병환을 얻어 돌아가시게 된다. 정수태 공이 병석에 있는 동안 그의 부인은 지극 정성으로 그를 수발하고 그가 세상을 뜬 뒤에도 정수태 공을 기리며 열녀의 모습을 지킨다. 이에 나라에서도 그 모습에 탄복해 집과 묘소에 열녀문을 내린다. 종친회 정찬후씨는 “열녀문을 받은 그 분이 나의 할머님이신데 집 대문에는 ‘홍문’, 묘소에는 ‘홍살문’이라고 불리는 열녀문이 세워졌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열녀문과 교지가 소실돼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설문동은 흔히 설씨들이 많이 살아서 설문동이 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설문동에서 수 백년을 살아온 하동 정씨는 이 지역에 설씨가 별로 없다며 유래의 근거가 희박하다고 말한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이 지역 일대에서 살면서 설씨를 별로 못 봤다는 것이 설문동 하동 정씨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