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래 고양시 최대 집성촌 형성

김녕 김씨 충의공파 송포종친회는 고양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비록 지금은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옛 자취는 찾을 수 없지만 400여 년을 송포 지역에 정착하며 살아온 김녕 김씨는 조상에 대한 예와 도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난 7일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는 김녕 김씨 충의공파를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는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매주 고양 지역 내 집성촌을 취재, 보도하고 있다. - 편집자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⑥ - 김녕 김씨 충의공파 송포종친회 취재 | 박기범 기자사진 | 한진수 부장도움말 | 김녕 김씨 충의공파 송포종친회 사진글1. 지금은 아파트가 건설돼 옛 자취를 찾을 수 없지만 과거 이 일대는 김녕 김씨가 고양시 최대 집성촌을 이루며 살던 곳이다. 아파트 앞에 송포호미걸이 기념비가 보인다2. 김녕 김씨 충의공파 송포종친회 사람들이 송포 호미걸이 기념비 앞에 모였다. 좌측 맨 뒷줄부터 김진혁, 김진복, 김계규, 김돌규, 김상섭, 김진선, 김용규, 김종일, 김미화, 김화규, 김송규, 김윤규, 김긍규, 김득규, 김영규, 김우규, 김후규, 김보규, 김부규, 김형상3. 올해 4월에 열린 경로효친행사. 김녕 김씨는 경로 효친 행사를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해오고 있다. 공공기관에 토지제공 할 만큼 문중 번창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경기도 임진강변 장단지역에서 내려온 김춘수 공이 처음으로 고양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김녕 김씨는 고양시 최대 규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된다. 김녕은 김해의 옛 이름으로 김녕 김씨의 시조는 고려조에 평장사를 지낸 김시흥 공이다. 조선조까지도 크게 번성하던 가문은 조선 단종 때 화를 당하게 된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사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문기 선생은 단종복위운동을 펼치게 된다. 그러던 중 누군가의 밀고로 1456년 6월 8일에 순절한다. 이처럼 단종 복위와 관련해 당시 공조판서였던 충의공 김문기 선생이 사육신의 한 분으로 순절하면서 가문이 멸문지화의 위기를 당하게 된 것이다. 당시 죽음을 면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본향을 김해 등으로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대화동 김녕 김씨도 한동안 김해를 본으로 삼다가 1970년대 초 김녕으로 본향을 전환하게 된다.김문기 선생은 김녕군의 9세손으로 충복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태어났다. 10세가 되었을 때 대의에 능통해 신동이라 불리었다. 어려서 모친상을 당해 매일 성묘하였고 또 부친상을 당해 시묘했다. 그런 그를 가리켜 사림에서는 효자라 칭했고, 그로부터 백지리는 효자동으로 불리고 있다. 이렇게 충과 효의 표본이 된 김문기 선생의 후손이라는 점은 김녕 김씨에게는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김녕 김씨는 1970년대 초반 300여 세대가 대화동 일대에 살고 있었다. 이후 차츰 줄어들어 1980년대 중반에는 약 200여 세대만이 남게 된다. 또 일산 신도시 개발 직전에는 180여 세대 600여명만이 마을을 지키게 된다. 이 규모는 고양시 집성촌 중 최대의 규모로 대화동 일대에는 마을 이름이 김동, 김서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김녕 김씨가 사는 동쪽마을, 서쪽 마을이라는 의미로 당시 집성촌의 규모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우규 종친회장은 “사람이 많은 만큼 문중도 번창해 대화동에 공공기관이 들어설 때면 무상으로 토지를 제공하며 지역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경로 행사, 마을지 창간 준비 등 높은 뿌리의식“시제를 지낼 때면 문중에서 70~80명의 사람들이 모였지. 그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서 벌초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봐. 한 마디로 예술이었어.”김형상 종친회 전 회장은 “그 때를 회상하며 예술이라는 표현을 썼다. 많은 사람들이 화합하는 모습이 그 만큼 가치 있었다는 의미다. 이처럼 화합과 결속력이 뛰어난 김녕 김씨는 화통하고 적극적인 기질을 지녔다. 김녕 김씨가 살고 있는 마을을 지나가려면 문중 사람들에게 술을 사야 지날 수 있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런 기질은 일제 시대에도 유감 없이 발휘된다. 전국적으로 3·1 만세운동이 펼쳐지자 김녕 김씨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이후 가문의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숨어 다녀야 할 정도로 김녕 김씨는 치열하게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김녕 김씨에는 또 힘이 장사인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 특히 김귀선 선생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김귀선 선생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농깃대를 들고 춤을 추며 백운대까지 오르고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농깃대를 자유자재로 돌릴 만큼 강한 힘을 자랑했다. 어느 날은 몇 몇 마을 젊은이들이 김귀선 선생이 농깃대를 돌리는 것을 보고 해보겠다고 도전했으나 모두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 하고 포기했을 정도다.1990년대 초반에 일산신도시 개발과 이후 대규모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이제는 과거 집성촌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그렇지만 김녕 김씨는 대화동을 떠나지 못하고 고향에 대한 향수를 지닌 채 여전히 50여 가구가 아파트와 농촌지역에 그대로 머물고 있다. 김부규 종친회 감사는 “난 이제 뱀개 마을을 떠나서 살지만 아직도 이 곳에 대한 꿈을 꾼다. 집성촌을 이루며 다같이 모여서 살 때가 참 많이 그립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외롭다”라고 말했다.이처럼 전통적 가치에 대한 의미를 소중히 여기는 김녕 김씨의 모습은 연천에 건립한 사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도시 개발 전 고양시에는 각 문중들의 선산이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개발로 선산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문중에서 대신 보상금이 지급된다. 이에 몇 몇 가문은 유골을 화장한 뒤 보상금을 나누어 갖거나 파주나 연천에 선산을 따로 마련한다.그러나 김녕 김씨는 조상에 대한 은덕을 기리고 후손들이 혈연의식을 갖게 하기 위해 10억 정도의 예산을 들여 연천 지역에 선산을 마련해 묘소를 이장하고 또 보기 드문 사당까지 건립해 다른 문중의 모범사례가 된 것은 유명하다. 이 사당에 대해 오수길 고양문화원장은 2004년도 행주얼 38호에서 “사당의 모습이나 규모는 경탄을 자아내게 했다. 전통적 건축양식과 제대로 채색된 단청 그리고 사당 뒤편으로는 잘 배열된 조촐하고 단아한 석조들의 묘와 묘비가 있었다. 또 앞날을 위해 마련한 납골묘와 마련은 시대적 흐름에 따른 가문 화합의 구심력이 되게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고 밝히고 있다.김녕 김씨 충의공파 송포종친회에서는 또 1992년도부터 경로 효친 행사를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해오고 있다. 이 때는 문중의 효자 효부와 모범이 되는 종친을 선정하기도 한다. 400년 간 집성촌을 이루어 살다가 개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그 아쉬움에 마련하게 된 것이다. 2008년 4월에는 주엽동에서 종친회원 170명과 초청 내외빈 40명 등 200여명이 참석한 경로잔치를 성대히 거행하기도 했다. 뿌리와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이 가득한 김녕 김씨는 2009년 상반기를 목표로 또하나의 사업을 준비중이다. 바로 뱀개마을 마을지를 만드는 일이다. 이는 마을이 급속도로 개발되면서 뱀개 마을에 새로이 이사온 외지 사람들이 송포 호미걸이는 물론 마을에 대해 잘 모르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해 추진하게 된 사업이다.종친회 관계자는 “수 백년의 역사를 가진 이 마을과 김녕 김씨의 뿌리와 가문에 대한 사랑을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대화동 뱀개 마을 마을지 책자를 발간하고자 한다. 우리 고장의 어린 학생들이 배워야만 오늘 우리 흔적 남길 수 있다”고 밝혔다. 박스고양시 민속 문화의 중심지송포호미걸이 선공감 김감역 호상 상여소리 등 계승김녕 김씨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송포호미걸이’다. 송포호미걸이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22호로 전문가들도 고양시가 꼭 보존하고 계승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수 백년 전부터 전래돼 오던 송포호미걸이를 지금처럼 틀을 잡고 체계화시킨 것이 바로 김녕 김씨 출신의 동관 김현규 선생이다. 본래 목수 생활을 하던 동관선생은 1970년대부터 소리와 민요 등에 관해 1980년대 중반 호미걸이로 전국대회에 출전하는 등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그 후 호미걸이는 물론 용구재 이무기재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는데 이 구성의 주축이 바로 이곳 뱀개 김녕 김씨 사람들이었다. 이 문중에서는 호미걸이 이외에도 쌍그네 놀이, 멩개안 사줄놀이, 십이지신 불한당 놀이 등 많은 민속놀이 풍습이 전해오고 있어 고양시 민속의 메카라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2004년 갑자기 김현규 선생이 돌아가자 김녕 김씨 문중에서는 그의 업적과 호미걸이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대화동 마을 공원에 호미걸이 전수비를 세워 후대에 전하고 있다.김현규 선생의 장녀이며 송포호미걸이의 이수자인 김미화씨는 “아버지는 집에서는 과묵한 편이었다. 그러나 늘 인정이 많아 주변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아버님을 찾아서 교수들이 집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화가 시작되면 늦은 밤까지도 좀처럼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또한 뱀개마을 김녕 김씨 문중을 크게 일으킨 인물 중에 조선조 후기의 김성권 선생이 있다. 그는 선공감의 감역과 중추원의 의관직을 지낸 인물인데 그의 장례식이 고양시의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진행됐다. 당시 그 행렬이 가히 보기 드문 것으로 이를 고증해 재현한 것이 선공감 김감역 호상 상여소리다. 동관 김현규 선생에 의해 연출된 이 작품은 경기도 청소년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해 개인 대상을 받는 등 뛰어난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소리는 고양시에서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상여 호상 소리로 그 보존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박스김녕 김씨네 사람들김용건 - 의금부도사를 지내고 정삼품통정대부에 오름김유봉 - 효행이 극진해 나라로부터 효자정려 수여 김형철 - 대한제국 당시 현 경찰서장에 해당하는 경시청 경부판임관에 오름김흥규 - 송포면장 10년 근무김서규 - 초대 송포면의원 역임김보규 - 고양농지개량조합과장 역임김우규 - 김녕 김씨 중앙 종친회 부회장, 선공감 김감역 호상 상여소리 보존회장김후규 - 고양 송포 의용소방대장 역임김용규 - 행정학 박사. 고양시 기획재정국장 역임김진용 - 고양시 자치행정과장 김긍규 - 정보통신부 정보통신기장김진원 - 고양시 주엽1동장, 고양시의원 역임김형상 - 고양시 송포농업협동조합장 2대 역임김형로 - 서울 초등학교장 역임김진의 - 고양 일산농업협동조합전무, 상임이사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