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모당 건립하고 뿌리의 중요성 이어가

벽제동 담양 전씨는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소박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산과 물이 유명했던 이 마을 사람들은 성품이 온화하고 올곧은 것으로 유명하다. 2005년에는 영모당을 파주에 마련하며 뿌리에 대한 의식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들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들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8월 28일 담양 전씨를 찾았다. <편집자>
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⑨ - 담양 전씨 집성촌 벽제동
취재·조사 |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
도움말|담양 전씨 벽제 종친회
고려의 충절로 유명한 담양 전씨
담양 전씨의 시조인 전득시는 고려 때 현량으로 천거된 뒤 벼슬이 좌복사참지정사에 이르고 담양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담양을 본관으로 삼고 뿌리를 이어오고 있다. 전득시의 후손은 6세(世)까지 독자로 내려오다가 7세에 이르러 녹생, 귀생, 조생의 3형제가 태어났는데 이들이 ‘삼은전선생’이다.
녹생은 공민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평리(門下評理)등을 지내고 문신이면서도 무예에 뛰어나 ‘문무전재(文武全材)’란 칭호를 받았으며, 성품이 강직했다. 고려 말에 삼사 좌윤(三司左尹)과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한 귀생(貴生)과 참지정사를 역임한 조생(祖生)은 모두 문장에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3형제가 함께 명성을 날렸다.
이들은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고려에 대한 충심을 보여 칭송을 받았다. 귀생은 고려 멸망 후 두문동(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것에 반대하는 고려 유신들이 모여 살던 곳.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부근으로 전해짐)에 들어갔다.
조생은 깊은 산 속에 숨어서 절개를 지킴으로서 ‘두문동 72현록’에 올랐다. 이 때 세상 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가리켜 ‘삼은전선생’이라 부른다. 지금도 전라남도 담양읍 향교 앞에는 ‘삼은전선생유허비’가 전해지고 있다.
담양 전씨는 그 후에도 이들 3형제 후손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됐다. 녹생의 후손에서는 성리학의 대가인 우(愚)가 이율곡, 송시열 등의 학통을 이어받아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귀생의 아들 한(漢)은 중랑장(中郞將)을, 손자 묘(苗)는 소윤(少尹)을 역임하기도 했다. 조생의 후손에서는 보령 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어 ‘삼옥태수(三玉太守)’란 칭송을 들은 벽(闢), 임진왜란 때 아들 득우(得雨)와 함께 왕을 호종(扈從)하여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된 윤(潤) 등이 있다.
한양에 과거보러 왔다가 벽제 정착
벽제동 담양 전씨가 고양 땅에 정착하게 된 것은 영조시대에 황해도 해주에 살던 전석진부터다. 담양 전씨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황해도에 거주하지 않았지만 고려가 멸망하자 담양 전씨가 개성 등으로 이주하면서 해주에도 거주하게 됐다.
해주에 살던 전석진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에 들린다. 그러나 과거에 낙방하고 고향인 해주로 돌아가던 중 고양리 벽제관에 머물게 된다. 벽제관은 당시 과거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이 곳에 머물던 전석진은 벽제관 옆에 위치한 고양 향교에서 잠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돕는다. 과거를 준비한 사람이다 보니 한학에 뛰어나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렇게 고양과 인연을 맺게된 전석진은 차츰 고양 벽제에 정착하게 됐고, 그러면서 그 후손들이 지금의 벽제동에 번창하게 됐다.

쌀농사 보다 채소판매 가계에 큰 보탬
벽제동은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고장이다. 하지만 의정부나 서울과 가까워 장터에 물건을 내다 팔기 용이했다. 벽제동에서 담양 전씨들은 벼농사와 채소를 많이 키웠다. 여름에는 오이 고추를 심었고, 가을에는 배추 등을 길렀다. 이렇게 정성 들여 키운 채소들은 인근 의정부나 서울의 장터에 내다 팔면 쌀보다 큰 수입원이 됐다.
전주용 담양 전씨 벽제동 종친회 고문은 “지금은 농사 기술이 발달해서 논에서 수확할 수 있는 쌀의 양이 많이 늘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벼농사로 인한 수입보다는 채소 판매 수입이 더 컸다. 이렇게 장터에 채소를 싣고 다니기 위해 집집마다 마차가 있었고, 마차를 끄는 소가 농사를 하는 소보다 더 좋은 소를 쓰고는 했다”고 설명한다.
담양 전씨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때 고양 지역에서 가장 먼저 발달한 곳이 고양리였다고 한다. 그래서 길이 제일 먼저 정비됐고, 그 덕에 마차를 운행하기도 수월했다고 한다. 담양 전씨는 마차에 채소를 싣고 밤 9시나 10시경에 인근 장터로 출발한다. 그러면 의정부나 서울에 위치한 장터에 다음 날 새벽에 도착해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산 좋고 물 좋은 곳이 벽제동이었는데, 이 곳의 샘물과 지하수는 지금도 유명하다. 샘물이 워낙 맑고 깨끗해 인근에서도 부러워했으며 지하수는 지금도 식수로 가능하다고 한다. 산이 많은 탓에 좋은 나무들이 많아 겨울이면 나무 장사들이 판매용 땔감을 찾아 벽제동으로 오기도 했다.
6·25 전후로 해서는 전성태 종친회장의 할아버지가 마을에서 글방을 했다. 이 글방에서는 천자문부터 동몽선습, 사서삼경 등 한학을 가르쳤다. 그 덕에 지금도 벽제 2동 담양 전씨들은 시제 등에 사용되는 축문을 누구나 막힘 없이 써내려 간다. 또한 전영길 종친회 이사의 할아버지도 진관내동 등 인근 마을에서 글방을 통해 아이들을 가르쳐 주위의 존경을 샀다.
촌수 가까워 가족 같은 분위기

담양 전씨는 한 때 벽제동 일대에 최대 50가구 정도가 살았다. 지금은 25가구 정도가 모여 살고 있다. 종친회에서는 다른 집성촌과 달리 이 곳 담양 전씨들은 모두 촌수가 가까워 서로 한 집안 가족 같은 분위기가 있다고 설명한다.
담양 전씨는 종친회를 통해 다함께 벌초도 함께 하고 시향을 지내며 조상에 대한 음덕을 기리고 친목도 다지고 있다. 담양 전씨는 다른 가문과 달리 시향을 일찍 지내는 편이다. 대부분의 가문이 음력 10월경에 시향을 지내는데 담양 전씨는 5월경에 지내고 있다.
전주용 종친회 고문은 “예전에는 시향을 10월에 지냈으나 최근에는 봄에 하고 있다. 대종회에서 시향을 4,5월에 지내는 영향도 있고, 젊은 사람들을 좀 더 많이 참석하게 한 것이기도 하다. 내년에는 4월 3째 주에 해볼까 한다. 여기나 파주는 신도시가 생기면서 가족들이 흩어지게 됐다. 그래서 종친회라도 하면서 모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전후태 종친회 고문은 “군부대가 있다보니 젊은 사람들이 농사를 안 짓는다. 여러 가지 규제가 많다. 군단이 들어오면서 마을 발전이 어렵게 됐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벽제동 담양 전씨 종친회는 아직 문중 발전에 희망을 갖고 있다. 전세환 종친회 이사는 “영모당도 짓고, 시제에도 많이 참석하는 등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아직 살아 있다. 문중의 대소사를 앞두고 논의도 잘 한다. 이런 것들이 종친의 뿌리를 이어가는 희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담양 전씨는 2005년에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 팔일봉에 영모당을 마련했다. 이에 대해 담양 전씨 벽제 종친회는 “한 성씨 문중에서 납골당을 건립하는 것은 흔치 않다. 이를 선구적 또는 시범적으로 해냈으니 자랑스럽다. 이 영모당은 문중 여러 일가의 결단과 적극적인 협조로 이뤄냈다”고 전했다.
담양 전씨를 빛낸 인물 전야은 공
전야은 공은 1350년에 활동한 고려조의 인물이다. 그는 고려사 열전 등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문집은 고려대와 북한의 연구소 등에서 번역 노력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야은공은 또 ‘고문진보(古文眞寶)’를 엮은 것으로 유명한데, 고문진보는 조선시대 서당의 주요 교재로 사용됐다.
야은공의 작품은 성균관 대학교에서 고려문집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을 골라 만든 ‘고려명현집(1973)’ 20권 중에 작품들이 수록됐다. 또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유사이래 주요 문집을 추려 350권을 만들었는데 이 중에서 전수금 담양 전씨 종친회 고문이 야은 선생의 의미 있는 작품만을 골라 편찬을 했는데 3권 분량에 달한다.
전수금 담양 전씨 종친회 고문은 “야은공의 가치와 의미를 후손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 내가 다시 쉽게 정리하고 있다. 담양 전씨에 대한 연구만 개인적으로 30년째하고 있다. 혼자서 규장각도 뒤지면서 담양 전씨의 내력에 대해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한다. 그 동안의 족보들의 인물과 그 인물의 벼슬에 중점을 두고 집필됐다면 나는 철학, 사상, 인간사를 중심으로 쓸 것이다”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