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하고 책을 가까이 하던 조상 성품 그대로 이어와

청렴한 것으로 유명한 기계 유씨는 조선조 중기 서인이 정국을 장악하던 시절에도 청렴한 남인 가문으로 인정받은 집안이다. 기계 유씨는 병조참판 유대정(1614년. 광해7년)으로부터 덕이동 지역에 그 후손들이 번창하고 있다. 고양 3진사의 하나로도 꼽히는 기계 유씨는 지금 젊은 종인들에 대한 교육 등으로 그 뿌리를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다방면으로 기울이고 있다.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들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들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9월 11일 기계 유씨를 찾았다. <편집자>
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⑪ - 기계 유씨 집성촌 덕이동
취재조사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
도움말 |기계 유씨 덕이동 종친회
청남(淸南)의 대표 가문
고양시에 거주하는 기계 유씨는 덕이동에서 가장 많은 가구가 밀집해 살았다. 덕이동 이외에도 법곳동과 설문동, 내유동, 행주동 등에서도 기계 유씨가 살고 있다. 이영찬 씨족협부회장은 “기계 유씨는 고양에서 지역과 나라를 위해 많은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고 소개했다.
덕이동 기계 유씨는 유대정이 1615년(광해 8년)에 당시 고양군 벽제관지 옆 관산동에 은거하다가 1615년(광해군 8년)에 그 묘를 유대정의 사패지였던 덕이동에 쓰면서 그의 자손들이 현재 덕이동에서 18대까지 번창해왔다.
유대정은 1552년(명종 7년)에 태어났으며 1615년(광해조 8년)에 항년 64세로 별세했다. 그는 1614년에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됐고 1614년에는 병조참판으로 발령 받게 된다. 이 즈음은 광해군의 폭정이 시작되던 시기로 사회 혼란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유대정은 병조참판이라는 벼슬도 버리고 벽제로 내려오게 된다. 유대정의 성품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돼 있을 만큼 강직하고 청렴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쓴 소리를 서슴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유대정의 차남 유시증은 고양군수를 지냈고 그 송덕비가 현재 고양동 벽제관 앞에 건립돼있다.
유대정은 원래 그의 할아버지가 반송방(지금의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유대정도 그 곳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곳은 1413년(태종13)에 한성부 고양현이었으며 1471년에는 고양현에서 한성부 고양군으로 개편됐다.
기계 유씨 덕이동 종친회 관계자는 “유대정공이 지금의 서대문구인 반송방에서 태어났지만 그 곳도 결국은 고양땅이기 때문에 유대정공은 덕이동 기계 유씨의 입향조인 셈이다”라고 설명했다.

기계 유씨는 청렴한 가문으로 유명한데 유대정의 증손자이며 당시 남인의 영수로 유명한 유하익은 형조, 공조, 예종의 3개 판서를 지냈다. 그의 묘소가 김포 양곡에 있었으나 도시 개발로 덕이동으로 옮겨왔다. 서인이 국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다른 당파들이 힘을 쓰기 어려웠던 시기에 남인으로서 3개 판서를 지냈다는 사실이 그의 청렴함을 나타낸다.
조선시대 명제상으로 꼽히는 체제공이 영조에게 보고를 할 때 “남인을 모두 부정적으로 평가하나 남인 중에서도 청남과 탁남으로 구분되는데, 유하익은 청렴한 남인(청남)의 대표적 인물이다”라고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경의선 타고 서울로 통학

과거 덕이동 일대는 농사를 많이 짓던 지역이었다. 송포의 쌀은 고양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맛이 좋기로 유명할 정도였다. 특히 이 일대는 하천을 이용한 농사가 발달했는데, 보를 막아서 물을 공급하다보니 농업용수에 대한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벼, 보리, 콩이 주요 작물로 농가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별다른 특산물은 재배하지 않았다. 지금도 기계 유씨 가문에서는 이 지역에서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있으나 대부분은 도시화로 인해 지역이 개발되면서 다른 업종에 많이 종사하고 있다.
유재성씨는 “여기는 지대가 낮아서 추수를 해도 낮은 지역의 벼들은 물에 젖고는 했다. 지대가 낮다보니 물이 안 빠지는 곳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곳의 벼는 추수 후 지게로 벼를 짊어지고 산에 올라 벼를 넓게 펼쳐서 말리고는 했다”고 밝혔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지역에 경의선이 놓여 서울까지 하루 2회 기차가 다녔다. 당시 중학생들은 고양 지역에 고등학교가 없어 이 철도를 타고 서울로 통학을 했다. 당시 학생들은 중동, 서울, 양정, 덕수, 배제고등학교에 많이 진학했다.
종친회 관계자는 “당시에 기차는 지금보다 속도가 많이 느렸다. 마을 인근의 고개에 올라가면 멀리서 기차가 오는 것이 보였고, 그러면 친구들과 잽싸게 고개를 뛰어 내려가 기차에 올라탔다. 차표를 구입하지 않고 무임승차한 것이다. 이렇게 하루 2번 운행되는 기차를 이용해 통학을 하고는 했는데 기차 승무원이 열차표 검사를 할 때 걸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며 그 때를 회상했다.
그 당시에는 일본이 전쟁 물자를 만든다며 집안에 있는 놋그릇과 쇠붙이들을 모조리 뺏어가기도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집에서는 제기들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기계 유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재용 씨는 “당숙모님이(진주 강씨) 종부로서 5대 봉사를 했다. 옛날 며느리들은 모두 고생했지만 우리에게는 특히 그 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이 분은 제사 때 놋그릇을 정말 정성스럽게 닦았고 일제 강점기 때도 일제가 군수물자에 사용한다며 놋그릇을 뺏어갈 때 안 뺏기려고 잿가리 밑에 숨기는 등 끝까지 지켜냈다고 한다”고 말했다.
기계 유씨는 6·25에 대한 상처가 크다. 6·25 때 종가가 소실되면서 직계에서 내려오던 사료, 교지, 족보가 불에 타 사라졌다. 그래서 지금 사용하고 있는 족보도 대동회에서 준 것을 이용하고 있다.
또한 6·25때 가문 사람들이 북한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거나 전쟁에 나가서 상이군이 된 사람들이 많다. 이에 대해 유재영 종인은 “6·25 당시 유경식 씨가 추석을 맞아 조상님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북한군이 쳐들어와서 얼른 도망쳤다. 그러나 결국 벌판에서 붙잡혀서 난도질을 당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우리 집안에는 그 당시 군대에 가서 공을 세우거나 부상을 입고 돌아오신 분들도 많았다”라고 설명했다.
기계 유씨는 6·25당시 태극단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6·25가 발발하자 고양, 파주 지역에서는 자생적으로 유격대가 만들어졌다. 태극단은 원래 경의선의 중심인 일산에 본부를 둔 지역 유격대였는데, 수색에서 문산까지 흩어져 있던 조직들이 태극단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그 규모가 커졌다. 240여명 가량이 대원들은 주로 경의선으로 통학하던 10∼20대 학생들이었다.
젊은 종인들 교육 강화
덕이동 기계 유씨는 도시화가 진행되고 집성촌이 축소된 지금도 종중 행사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조상에 대한 고마움을 기리고 뿌리에 대한 생각을 잊지 않고 있다.
유훈 기계 유씨 덕이동 종친회장은 “우리 종중회 종민들의 시향과 벌초 등 종중 행사 참여율이 높다. 7월 말 벌초 행사에 75명이 참석했다. 특히 종중회 활동이 그 동안 남성 중심의 전유물로 인식된 것과 다르게 여성 종인들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벌초를 할 때도 여성 종인들이 다수 참석하고 젊은 세대의 참여도 눈에 띈다. 이처럼 앞으로도 종중회 행사에 젊은 사람들의 참여가 늘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뿌리에 대한 중요성을 잊지 않고 있는 어른들이 종중 행사에 자식들의 동참을 권유하면서 기계 유씨 가문의 위상도 교육시키고 젊은 사람들도 함께 할 수 있는 행사로 변모해 가고 있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의 참여 강화를 위해 문중에서는 명절 등을 이용한 단합대회를 적극 활용하거나 벌초 때에도 소정의 교통비를 지급하기도 한다. 이처럼 가문에 대한 소중함을 생각하는 마음은 현대에도 이어져 유재봉 씨의 부인 김영숙 씨는 2002년에 고양시장으로부터 효부상을 타기도 했다. 또 유재영 종인이 문중 행사에 참여한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계 유씨 가문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기도 한다.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유재영 종인은 “근대까지도 5대 봉사, 3대 봉사를 하는 집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감소되고 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조상숭배 정신이 쇠퇴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래서 종중 어른들도 이런 정신을 회복하려고 노력 중이며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온고지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일종의 스킨십이다. 종중 행사에 젊은 사람들의 참여와 활성화를 위해서는 생각이 아닌 행동과 실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계 유씨는 자손들의 교육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지금 덕이동 기계 유씨가 사당으로 쓰고 있는 곳의 이름이 경휴재다. 경휴는 입향조인 유대정의 호다. 해방 전까지도 기계 유씨에서는 유동식이 마을에서 ‘경휴당’이라는 이름의 글방을 운영했고, 이 곳에서 여러 가지 한학을 자손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이영찬 고양시씨족협의회 수석부회장은 “고양 3진사로 불리는 분들이 있다. 글을 좋아하지만 정쟁이 싫어서 벼슬도 안 지내고 지역에 사신 분들이다. 유씨 가문이 그 중 하나인데 이 분들의 문장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송포 백송 ‘유하겸식재설’ 표기된다
문중, 다년 간의 노력 끝에 문화재청 인정

송포동은 550년 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나무, 송포 백송이 유명하다. 천연기념물 제60호인 송포 백송은 그 동안 조선 세종 때 최수원 장군이 심었다는 희귀한 나무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기계 유씨 사람들은 이 나무가 조선 인조~숙종 때 중국 사신으로부터 소나무를 전달받은 유하겸이 송포에 심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이에 따라 기계 유씨에서는 나름의 조사를 거쳐 문화재청과 고양시 등에 유하겸 식재설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고, 지난 5월 문화재청으로부터 최수원 장군 이야기와 함께 유하겸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표기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문화재청은 기계 유씨에 대한 답변에서 “유하겸식재설에 대한 현장의 문화재안내판 표현은 제한된 표기공간 등으로 인하여 최수원식재설만 표현되고 있으며 현재 문화재청 홈페이지 등 다양한 안내문에서 2가지 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기계 유씨 문중은 “조상님의 행적을 확인 받게 된 것 같아 문중에서는 뜻깊게 생각한다. 문화재청 등에 4~5년 간 요청하는 등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결코 다른 가문을 깎아 내리기 위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문중 조상님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하고자 한 것뿐이다”라고 밝혔다.
송포 백송은 나무 껍질이 희고 넓은 조각으로 이루어졌으며 벗겨져서 흰빛이 되는 특성이 있으므로 백골송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이며 높이 11.5m, 가슴높이 둘레 2.39m에 이른다. 백송은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소나무로 중국과의 문화교류를 알려주는 나무로 역사적·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