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일산읍 일대 집성촌 형성 … 선조에 대한 자긍심으로 살아가

▲ 부윤공 류사원의 묘소.

문화 류씨는 국가와 사회를 먼저 생각하는 희생정신으로 유명한 집안이다. 자신은 끼니를 굶어도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아 왔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선조들의 그런 선비정신을 자긍심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들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들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10월 9일 문화 류씨를 찾았다. <편집자>

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⑬ - 문화 류씨 집성촌 밤가시 마을

취재·조사 |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
도움말|문화 류씨 부윤공파 문흥군 종친회

고려 건국 공신의 후예

문화 류씨는 고려 때 건국공신 류차달의 후예들이다. 고려 태조가 건국시 그 공을 인정해 문화 류씨 시조에게 ‘차달’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가문의 14세가 부윤공을 지냈고 15세부터 고양에서 거주하게 됐다. 15세는 휘가 ‘지’였다. 그래서 현재 고양에 거주하고 있는 문화 류씨는 부윤공파로 지금까지 36세손까지 뿌리가 이어지고 있다.

시조인 유차달의 14세손인 류신이 조정의 신임이 두터워 한성부윤에 오르게 됐다. 이로 인해 그의 아들이 한양 인근인 고양에 살게 되면서 그 후손들이 벽제면 설문, 성석리 지역과 일산읍(풍동, 백석동 일대)에 분포하면서 살아왔다. 문화 류씨는 이 일대에 6∼7개의 부락 마을을 형성하면서 최대 100여 가구가 생활했다.

문화 류씨에서는 ‘류사원’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가문의 20세손으로 선무공신을 지낸 류사원은 임진왜란에서 큰공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침입하자 조선 조정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적장인 가등청정은 북상하겠다고 큰 소리를 치며 공격을 해온다. 그러자 선조의 명에 따라 류사원은 서장관으로 명나라 수도인 연경(지금의 북경)에 원병을 청하러 간다.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가 황제의 직인이 없는 서류를 발급해 주면서 병사를 지원하겠다고만 말했다. 그러자 류사원은 직인도 없는 서류를 믿고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명나라 조정의 고위 관료들에게 글로서 상신도 하고 직접 자금성을 찾아가 이마를 자금성 바닥에 대면서 원병을 청했다. 자칫 병부상서의 말을 거역한 것으로 류사원이 위험해 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국 류사원의 충심이 전해졌고 명나라는 군사 십만 명을 출동시켜 왜군을 물리치게 됐다.
당시 류사원이 고위 관료들에게 올린 글이 간절하고 긴박하면서도 명문이어서 명나라 관료들을 감동시켰다고 전해진다. 류사원은 이 공로로 아연리 땅을 하사 받고 가로 1.2m, 세로 2m의 크기의 영정도 하사 받게 된다.

훗날 1608년에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국장을 치를 때 류사원은 병중에 누워있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서 곡성 행렬에 동참하겠다고 한다. 이를 가족들이 말리자 류사원은 “임금님께서 승하하시는데 감히 집에 누워 있겠는가? 가령 몇 년을 더 살다 죽은들 무엇이 유익하겠는가?”라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곡성 행렬에 동참했다.
결국 류사원은 그로 인해 병세가 더 악화되고 선조가 세상을 떠나던 같은 해 6월 14일에 자택에서 돌아가시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장례는 고양 아연리에 모시게 된다.

류학선 문화 류씨 부윤공파 문흥군 종친회 사무총장은 “이분은 오직 나라와 국가에 대한 투철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가 위태했을 때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정신이 훌륭하다고 우리 후손들은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이런 내용은 류사원의 매부인 이항복이 쓴 묘비에도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 1960년대에 촬영한 문화 류씨가 선조들의 묘소를 정비하는 모습.

가족 간의 끈끈한 정

이영찬 고양시 씨족협의회 수석부회장은“이런 선조들을 배출할 만큼 문화 류씨는 대쪽같은 기질을 지닌 학자집안으로 문중의 사람들이 욕심이 없다”고 평했다.

국가와 사회를 먼저 생각할 만큼 강직한 성격을 지녔음에도 재물에는 욕심이 없다보니 가난한 삶을 이어가기 마련이다. 과거 충청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으면 누구나 문화 류씨라고 대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물질적인 삶은 가난했지만 문화 류씨는 국가와 사회를 먼저 생각할 정도로 마음만큼은 풍요로웠다. 이런 마음은 가족 간의 끈끈한 우애로 이어지며 가문이 번창하는데 큰 힘이 되기도 했다.

류학선 사무총장은 “문화 류씨는 형제간의 우애가 좋았다. 정월이면 일산에서 파주까지 60리 길을 친가마다 찾아다니며 함께 명절을 보내며 즐거운 시간을 갖고 인사를 다니는 등 친족간에 유난히 끈끈한 정을 과시했다”고 말했다. 류 사무총장은 집안의 우애를 보여 줄 수 있는 하나의 일화를 소개했다.

“밤가시 마을에 들판을 하나 사이에 놓고 두 형제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동생이 밖에 나와보니 들 건너서 형이 담배를 피고 있었다. 이를 유심히 보던 동생은 형님이 무슨 근심이 있어서 담배를 피우실 까라고 생각하고는 다음 날 쌀을 짊어지고 형님에게 전했다고 한다.”

류재만 문화 류씨 부윤공파 문흥군 종친회장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고양 지역 유일의 발동기 기술자였다. 농사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발동기는 각 마을마다 중요한 수단이었다.
지역 내 유일의 기술을 가졌음에도 류 회장의 아버지 또한 선조부터 내려온 기질은 피할 수 없었다. 발동기를 고칠 돈이 없다고 해도 무료로 고쳐주고, 수리비 대신에 술을 내주면 웃어 보이며 기꺼이 수리비를 대신해서 받을 만큼 넉넉한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유복자인 류재만 회장이 28세에 결혼 할 때 돌아가신 류 회장의 아버님 친구들이 결혼식에 참석한 것도 부모의 후덕함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들의 친구가 세상을 달리 한지 30년이 지났지만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던 류재만 회장의 아버지를 잊지 못하고 축하하러 온 것이다.

류학선 사무총장은 “벼슬을 해도 녹봉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임금이 직접 도움을 준다고 해도 한사코 거절하던 류관 삼희재 선생 등 청렴한 조상이 계셔서인지 자신보다는 사회와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기질이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오고 있어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며 사는 종인들이 많다”고 말했다.

문화 류씨는 고양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채소를 가꾸면서 살아갔다. 주로 농사에 전념했으며 채소는 주로 장에 내다 팔아 생활에 보태기도 했다.
문화 류씨는 후대에 와서 류광열이 지역 내에서 이름을 드높이게 된다. 류광열은 동아일보를 비롯해 조선일보, 한국일보, 자유신문 등 우리나라 신문의 창간 시부터 기자,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기자반세기’란 책을 쓴 언론계의 거목이었다. 그는 언론인이면서 고양 지역에서 민의원에 당선된 인물로 젊은 시절에는 왕성한 청소년 활동을 했다. 문중에서는 그가 6세에 공자와 맹자를 익히는 등 일찍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랐다고 평가한다.
그의 아버지가 고양과 파주 일대에서 서당에서 후학을 가르쳤는데 류광열이 아버지가 하는 서당에 드나들면서 어깨 너머로 학문을 익혔다는 것이다. 이처럼 총명했던 류광열은 지역을 떠나 서울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에 그가 만난 것이 소파 방정환이다. 류광열은 방정환과 함께 청년운동에 몰입하면서 YMCA 등에서 활동한다.
류광열은 ‘청년들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외치며 손병희, 최남선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열의를 이어갔다. 또한 그는 독립신문이 정간 됐을 때 속간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서울에서의 학비 마련에 어려움이 생기자 류광열은 고향인 고양 땅에 와서 중면 면서기로 일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들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국의 난민 등을 한국의 특정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며 탄압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에 류광열은 역둔토 사건으로 억압받는 한국인들을 대신해 부당성을 조목조목 따져서 역둔토를 되찾아 주기도 했다.
이처럼 나라와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활동하던 그는 신익희 당시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을 맡게 되면서 정치에 눈을 뜨게 된다. 민주당 후보로 지역에 선거에 여러 차례 나섰지만 자유당 시절에는 당선되지 못 한다.
당시 자유당은 일산에서 민주당이 선거사무실도 차릴 수 없도록 했고, 선거가 끝나면 류광열 후보측에서는 “선거에서는 이겼지만 개표에서 졌다”는 말을 할 정도로 당시의 부정부패 선거는 심각했다.
류광열은 이후 4·19가 일어나면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되고 다시 박정희의 5·16을 맞아 의원직을 박탈당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에서도 류광열의 청렴함은 인정받게 되고 그는 언론인상을 수상하고 광복심사위원, 한국일보 논설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나라와 국민을 위한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한편 청년시절 YMCA 활동에 열중했던 류광열은 자신의 땅 4만 8천 평을 YMCA에 기증하고 숨을 거두게 된다. 지금도 그의 묘소는 YMCA 부지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문화 류씨의 문흥군이 나라를 위하는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온 것처럼 그 역시 이 나라 젊은이들이 바로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다. 류학선 사무총장은 “그의 모습을 보고 문중에서는 선무공신을 지낸 류사원을 닮았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고 말했다.

문화 류씨 가문에는 그밖에도 여러 인물들이 지역 사회를 위해 많이 노력해 왔다. 경기도의원을 지낸 류영선 전 의원이 일산농협 조합장을 지내던 시절 일산농협은 전국 단위 농협 중에서도 우수한 곳으로 꼽히기도 했다. 또한 그의 아버지인 류재학 씨는 고양 향교의 전교를 지내고 성균관의 전학을 엮임 하기도 하는 등 지역 사회와 전통 문화 발전을 위해 많은 애정을 쏟았다.

▲ 문화 류씨 취재에 협조해 준 문화 류씨 종친회 류학선 사무총장, 류재만 회장, 류익선 감사, 류재현 이사(왼쪽부터)

숭조목조 정신으로 종인들 화합

나라에 대한 충절로 일관해온 선조들의 모습은 문화 류씨 종인들에게는 대단한 자긍심과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선조들에 대한 긍지가 높은 문화 류씨는 최근 조상들의 산소 등을 정리하는 작업을 올해까지 펼쳤다. 실전 된 산소들은 설단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종친회에서는 매년 다양한 사업을 통해 종인들의 소속감을 고취시키고 있다. 매년 7월 보름 전후에 벌초를 하고 10월에는 시향을 지내면서 조상들을 섬기며 산다.
또한 부모를 잘 섬기는 사람에게 효행상을 주기도 하며 종친회와 대종회가 함께 장학금을 마련해 종인들의 자녀들의 원활한 교육을 돕고 있다. 이 밖에도 65세 이상의 종인이 벌초에 참석하면 소정의 교통비를 주면서 어른공경의 효를 가르치고 있다.

류학선 사무총장은 “부모로부터 선조들이 충절을 지켰으니 우리도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교육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래서 우리도 가세가 어려워도 정직하게 살아 왔으며 지금의 우리 자녀들에게도 문화 류씨가 사회에 공헌을 했다는 점을 알고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 류씨에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나라에 대한 충심과 교육에 대한 열망을 이어가며 학문을 쌓은 사람들이 많다.

류재만 종친회장은 “숭조목조-조상을 잘 숭배하고 집안의 화목을 기린다-라는 문화 류씨의 정신은 종친회의 정관에도 명시돼 있을 정도다”라고 설명했다. 문화 류씨는 현재는 고향을 많이 떠나 서울, 당진, 제주 등에서 사고 있으며 고향에는 20여 호만이 아연리 문흥군 선조를 모시며 살고 있다.

문화 류씨는 고양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 그러나 시골 같던 고양시 지역이 점차 개발이 됨에 따라 선산이 모두 없어지는 등 위기에 놓이게 되자 문중에서도 고민이 많다. 하지만 문화 류씨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오래도록 고향을 떠나지 않고 지역 사회를 위해 애쓰며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한다.

<류익선 종친회 감사의 가보>
“생명처럼 소중하게 보관해 온 가승보”

▲ 류익선 문화 류씨 부윤공파 문흥군 종친회 감사가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아 보관해온 가승보

문화 류씨 부윤공파 문흥군 종친회에는 가승보가 전해져 내려온다. 세밀한 세필로 작성된 이 가승보는 류익선 종친회 감사가 보관하고 있다. 류익선 감사는 문화 류씨 부윤공파 문흥군 종친회의 장손이다.

“선친이 보관해 오시다가 내게 물려 준 것이다. 내가 7~9살 때 글방에 다니면서 한자에 눈을 뜨게 되자 선친이 내게 이것을 처음 보여줬다.”

가승보는 문중의 큰 발자취들을 담아 놓은 귀중한 자료다. 류익선 감사도 선친으로부터 가승보의 설명을 듣고 ‘정말 소중하고, 잘 보존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류익선 감사는 가승보를 직접 보관하면서 보관에 많은 애를 써왔다.

“정말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분실될까, 훼손될까봐 많은 신경을 썼다. 집안 깊숙이 보관하려고 했고, 여러 겹으로 싸서 족보 등 집안의 다른 고문서들과 함께 보관해 왔다.”

류익선 감사가 지금껏 보관해 온 가승보는 훗날 류 감사의 아들에게 전해진다. 류 감사는 “내 아들에게도 이 가승보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잘 설명해주고, 생명처럼 보관하라고 당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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