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촌 마을 형성의 시작 … 실전된 묘소 되찾고 숭조의식 함양

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19) - 진주 강씨 집성촌 오금동
취재·조사 |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
도움말|진주 강씨 주부공파 참의공 종중
마두동의 대표적 마을인 강촌 마을은 진주 강씨가 번창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고봉산 일대에 입향한 진주 강씨는 강촌 마을, 후곡 마을, 오금동 등에서 오랜 세월을 고양땅을 지키며 살아왔다.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11월 19일 진주 강씨를 찾았다.<편집자>
고구려 명장 강이식 장군 후손
진주 강씨의 시조는 고구려 병마도원수를 지낸 강이식 장군이다. 그는 고구려 영양왕 시절 수 나라가 진나라와 중국을 통일한 후 수문제가 대군을 이끌고 침략을 하자 을지문덕 장군과 함께 출병해 대승을 거뒀다. 강이식 장군의 묘소는 중국 만주 봉길선 역전에 병마도원수강공지총이란 큰 비가 세워져 있을 정도다.
고양에 거주하는 진주 강씨 주부공파 참의공 종중의 입향시조는 고려시대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통계공 강회중이다. 그는 조선에 의해 고려가 멸망하자 “충신은 두 명의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조선 조정이 내리는 벼슬을 4번이나 거절하고 고양시 고봉산 밑으로 터전을 잡고 살아가게 된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지 몇 일 지나지 않아서다.
조선 조정을 거부한 통계공의 삶은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공은 초근목피로 연명하더라도 고려 충신으로서의 절개를 지켰다. 진주 강씨 후손들은 통계공의 절개를 기리며 그의 숭고한 뜻을 본받으며 오늘날까지 고양 땅에서 살아오고 있다. 현재 통계공의 묘소는 벽제 관산동 산82-1에 모셔져 있다.
통계공은 4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 둘 째 아들이 9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 9명의 아들이 고양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진주 강씨가 고양시 곳곳에서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다. 마두동의 강촌마을은 진주 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번창하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통계공의 후손인 참의공 종중은 고봉산 일대 후곡마을, 마두동 강촌마을, 오금동 등에서 주로 거주했다.
강촌마을에는 지금도 통계공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진주 강씨의 중심지, 오금동
현재 진주 강씨 주부공파 참의공 종중은 통계공으로부터 25세손까지 내려왔다. 처음 고봉산 일대에 정착하면서 종중은 고양 일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밭농사보다는 벼농사만을 집중적으로 했고 후곡 마을, 강촌마을보다는 오금동에 거주하는 종인들이 더 많았다. 그 당시 오금동에는 진주 강씨 이외에는 타성이 거의 없었다.
오금동에는 통계공의 둘째 아들 부인의 묘소가 있다. 9형제를 낳아 진주 강씨가 본격적으로 고양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한 인물이다. 또한 오금동에는 9형제 중 장남과 여섯 째 아들의 묘소가 있다. 막내아들의 묘소도 있었으나 개발 지역에 포함돼 당진으로 이장했다.
이처럼 종중의 시작인 조상들의 묘소가 위치한 오금동에는 인근 파주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진주 강씨들이 때가되면 찾는 곳이다.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진주 강씨의 시작이 통계공의 둘째 아들부터 크게 번창했기 때문에 진주 강씨에게는 그 의미가 남다른 지역이다.
또한 진주 강씨가 주로 살던 고봉산 일대는 일산 평야로 꼽히며 농사가 잘되는 지역이었다. 토지가 비옥했고 물이 좋아서 벼가 잘 자랐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후곡마을과 강촌마을 일대는 갈대가 많았다고 한다.
입향조인 통계공의 묘소가 실전돼 종중에서는 이 묘소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던 중 지난 1958년경에 관산동의 한 산에서 묘소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 때의 감격과 조상에 대한 소중함을 진주 강씨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강돈희 종중 이사는 “음력 10월 초면 시제를 지낸다. 묘소를 실전한 일이 있기 때문에 시제를 지낼 때의 마음가짐이 남다르다. 이번에 시제를 지낼 때도 전국에서 3백 여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고 말했다.

숭모정신의 모범 강재락 어른
진주 강씨는 강재락 어른을 숭모정신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 강재락 어른은 17살 때부터 72년 간 단 한번도 시향에 빠진 일이 없다. 6·25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도 강재락 어른은 홀로 조상들의 묘소를 찾아다니며 향화를 이을 정도로 조상에 대한 숭모 정신이 강했다. 더구나 통계공의 묘소를 찾는데도 주도적으로 참여해 종중 사람들과 함께 통계공의 묘소를 찾는데 큰 힘이 되는 등 종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종중에서는 이런 강재락 어른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강태희 종중회장이 종중회의에서 “강재락 어른에게 감사패를 수여하고 그 분의 정신을 받들고 후손들에게도 알리자”라고 제안했고 이를 종인들이 적극 찬성하면서 강재락 어른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감사패를 받아든 강재락 어른은 고맙다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전통교육 등 지역 발전 위해 고민
지난 19일 진주 강씨 주부공파 참의공 종중은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종중 회의를 가졌다. 오금동에 새로 짓는 제실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다. 이 회의에서 종인들은 각 자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며 보다 나은 제실을 건설하기 위해 고심했다.
이처럼 종중은 최근 오금동에 제실을 새로 짓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 제실에는 종중에 내려오는 교지들을 표구해서 전시하는 등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뿌리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려갈 예정이다. 참의공 종중에서는 이 제실에서 14대 어르신들부터 모실 계획이다. 이 밖에도 시민들과 지역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고민하고 있다.
강태희 종중 회장은 “지역 내 하나의 문중일 뿐이지만 시민들과 지역사회를 위해서 전통 교육 등 우리 종중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또한 종중의 젊은 인재를 육성해 후계 양성을 위해서도 노력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어렵게 되찾은 입향조 통계공 묘소“그 기쁨을 무엇에 비유할꼬”
진주 강씨 참의공 종중은 입향조인 통계공의 묘소는 긴 세월 동안 실전돼 있었다. 그 후손들이 가승에 나와있는 기록을 토대로 묘소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이 곳 저 곳 많은 곳을 다녔지만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통계공의 묘소로 추정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갔지만 번번이 허탕을 치고 돌아서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지난 1958년에 관산동 산 82-1번지에서 묘소를 되찾게 된다. 처음 그 곳을 발견하고 보니 산세와 묘소의 위치 등이 가승의 기록된 바와 유사했지만 봉분도 허물어져 없고 묘 자리에는 수목이 자라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고분의 흔적이 있어 집으로 돌아온 뒤 경기도 일원의 종인들에게 통지해 날짜를 정하고 다시 그 산을 찾았다. 이 때가 1958년 한식이었다. 통계공이 돌아가신지 537년이 되는 해였다.
종인들은 산에 올라 일단 소나무를 잘라내고 잡초를 베어서 묘소를 정돈했다. 그러나 아무리 땅을 파봐도 통계공의 묘소임을 알 수 있는 뚜렷한 증거를 찾을 수 없어 실망하고 있을 때 땅에서 지석이 나왔고 이 지석에는 의령 남씨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의령 남씨는 통계공의 부인이었다. 이 때 진주 강씨 종중 사람들은 조상의 묘소를 되찾은 기쁨과 뒤늦게 찾은 죄송함에 오열하기도 했다.
묘소를 되찾자 종인들 사이에서는 앞으로 통계공의 묘소를 잘 보전하고 가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면서 묘소 정비를 위해 힘을 모으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종인들에게도 묘소를 되찾은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 힘은 더욱 커지게 된다.
십시일반 모아진 힘으로 묘소를 정비하고 묘소 앞에는 신도비와 ‘경덕제’라는 이름의 제실도 갖추게 된다. 특히 이 제실은 당시 명성왕후의 생가가 철거되자 그 생가에 사용된 목재를 구입해 건축했다. 그 후 지금은 다시 개축된 상태지만 최초에는 명성왕후의 생가와 비슷한 모습을 유지했다고 한다.
강돈희 종중 이사는 “묘소를 되찾았을 때의 감격은 그 어떤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교통, 통신 수단이 열악했던 시대였는데 구전으로 이 소식이 몇 년에 걸쳐 전해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성묘를 왔다. 그 때 감격스러워하고 눈물짓던 어른들의 모습이 선명하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