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산 산신제 지내고 도시민과 함께하는 대보름 축제 매년 개최

순천김씨 판서공 휘 수렴공파 사람들은 1530년 경에 입향하며 성석동 진밭마을 일대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아왔다. 진밭마을에서도 ‘사당골’에 집성촌을 이루며 거주했던 순천 김씨는 성석초등학교 설립 등 지역 발전을 위해서도 다방면으로 노력해 왔다.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2월 20일 순천 김씨 판서공 휘 수렴공파를 찾았다.
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27) - 순천 김씨 판서공 휘 수렴공파 집성촌 성석동
취재조사 |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
도움말|순천 김씨 판서공 휘 수렴공파
1530년 경 김수렴 입향하며 번성
조선왕조실록 중종 15년(1520년)을 보면 당시 감찰기관인 대간(臺諫)에서 순천 김씨의 김수렴이 정5품 정랑 벼슬에 오른지 20일만에 4품에 올랐다며 이를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중종은 “무신(武臣)은 올려서 쓰며, 변방에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내려보내야 한다”며 개정 요구를 반대했다.
순천 김씨 판서공 휘 수렴공파에서는 이 내용으로 보아 김수렴이 벼슬을 하는 동안에는 서울에 거주하다가 노년인 1530∼40년경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고양 땅에서 시작된 성석동 순천 김씨의 역사는 판서공을 입향조로 삼고 그 막내아들인 병조 판서공 김지의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발전해 왔다.
입향조인 판서공은 평양 부원군 양경공의 고손(高孫)으로서 양경공은 본명이 을보(乙寶)였으나 태종 재위 시 기우제를 지내면 꼭 비가 내려 승주로 이름을 내렸다는 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입향조인 판서공은 통정대부 정주목사 겸 정주진관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증자헌대부 병조판서를 제수 받기도 했다.
입향조인 판서공이 묻힌 곳은 원래 그의 장인인 홍세필이 묘소를 쓰려고 했던 곳이다. 그러나 구전에 의하면 판서공의 부인인 풍산 홍씨가 이 땅에 밤새 물을 퍼부은 뒤 물이 나는 땅에 부친을 모실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 뒤 추후에 판서공을 모셨다고 한다. 이 곳이 명당임을 알고 자신의 남편을 모시고자 했던 부인의 지극한 사랑의 모습이다. 그 영향인지 판서공의 증손자인 김류는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2번이나 영의정에 오르기도 했다.
순천 김씨의 성석동 종중산에는 임진왜란 때 임진강에서 순절한 김여강의 묘가 있다. 그러나 이 묘에는 김여강의 시신 대신 갑옷이 묻혀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전투 중 김여강이 순절하자 그의 말이 김여강의 갑옷을 물고 돌아왔다고 한다.

마을 글방 만들고 성석초 건립에 도움
종중의 김상인 어른은 마을에서 글방을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어한 전 고양문화원장도 이 곳에서 글을 배우기도 했다. 김상인 어른은 성석초등학교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등 성석초 설립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김상인 어른이 돌아가신 뒤에는 그의 후손들이 ‘성재 김상인선생 추모장학회’(회장 김대연)를 결성해 지역의 인재 육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장학회는 지난 2월 12일 성석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장학생 2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순천 김씨는 이 밖에도 20여년 전 마을의 노인정이 건립될 때 토지를 희사해 노인정 건립을 지원하는 등 마을 발전을 위해 많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 왔다.
순천 김씨 판서공파는 고양 지역에서는 일산신도시와 화정지구, 원당, 본일산, 송포에 분포하며 거주하고 있다. 현재 성석동에는 9세대가 살고 있고 이 밖에도 서울과 인천에 몇 세대가 살고 있다. 과거 집성촌이 해체되기 전에는 최대 13세대가 성석동에 모여 살기도 했다.경기도의회의 김보연 도의원과 경기도4H지도자협의회 김대연 회장이 성석동 순천 김씨 출신이다. 문중의 대표인 김도연 종중회장은 인천에서 목재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순천 김씨는 성석동에서 농사를 생업으로 삼으며 생활했다. 그러나 과거 성석동 일대는 농지가 적어서 순천 김씨는 농사 이외에도 채소를 재배해 일산 장에 내다 팔거나 사방 공사 에 참여하며 수입을 늘려가기도 했다. 성석동은 농업용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가뭄이 들면 하천의 물을 용두레로 윗논으로 퍼올리는 어려움을 겪고는 했다.
김수정 종중회 총무는 “연탄도 없던 시절이라 어린 아이들도 농사를 돕거나 산에서 땔감을 구해오는 일이 중요한 일과였다. 중학교 때 소똥을 치우기도 했는데 어찌나 힘들던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비록 어려운 환경 속에서 농사를 지었지만 진밭의 쌀은 무거워서 그 쌀로 지은 밥을 먹고 죽은 송장도 무겁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쌀이 찰지고 무겁다”고 말했다.
이영찬 고양시 씨족협의회 수석부회장은 “성석동은 길이 안 좋고, 전기가 늦게 들어왔다. 매화정 마을이 일제 강점기에 이미 전기가 들어온 반면 성석동은 70년 대 초에나 전기가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기반 시설들이 부족해 전기나 도로가 불편하다보니 다른 지역의 친·인척들이 한번 방문을 하면 반드시 하룻밤을 묵고 가야했다. 그러다 보니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는 집안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끈끈한 우애가 형성되고는 했다.
벼슬지낸 조상 묘 잇따라 도굴되는 아픔
10여년 전 고양시에서 입향조의 아들인 김훈의 묘소를 고양시향토문화재로 등재시키기 위해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과 함께 충주에서 순절한 김여물의 아버지인 김훈의 묘소에는 왕릉에서나 볼 수 있는 크기의 문인석과 일반적인 묘소에서는 보기 드문 시녀석도 발견됐다.
고양시가 향토문화재 지정을 위해 조사를 진행하자 종중에서도 기대감에 부풀기도 했지만 현장조사 후 도굴꾼들에 의해 조상의 묘가 심하게 훼손당했다. 김훈의 묘소 이외에도 김지의 부인인 파평윤씨의 묘소와 입향조인 판서공의 묘가 도굴을 당했다. 그 밖에도 많은 묘소들이 도굴꾼들의 탐침봉으로 침해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상평통보 1점이 발견돼 현재 김수정 종중회 총무가 보관 중이기도 하다.

종중 어르신들 효도관광 보내드려
종중에서는 매년 9월 첫째주 일요일에 후손들이 모여서 조상들의 묘역을 벌초하고 음력 10월에는 시조묘소(1일)와 중시조인 양경공(3일)의 시제에 참석하는 한편 양경공 시제일이 지난 첫번째 일요일에 입향조를 위시한 조상들의 시제를 지내고 있다.
또한 시제에 참석하는 직계 후손 노인들에게 교통비를 지급하고 지난해에는 종중 어른들의 효도관광을 진행하는 등 효(孝)의 실천에 노력하고 있다. 순천 김씨는 또 설에 부부와 형제간에도 서로 세배를 하도록 해 상호 존중의 풍토를 형성하고 있다.
종중에서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묘역을 정비하고 시제를 지내는 윗대조 몇 분을 제외한 조상들을 납골묘에 안치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 밖에도 재정이 허락하는 한 현재 종중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는 것을 조금 더 확대할 것을 고려중이다.
이처럼 성석동 순천 김씨 종중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이유는 갈수록 도시화가 심해지는 사회에서 그 만큼 종중의 활동이 중요하고 뿌리를 통해 흩어진 가족들이 하나의 유대감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김수정 종중회 총무는 “개인주의 사상이 팽배해 종중의 역할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종중의 행사에 자주 참여하여 일가들과 가까이 지내며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고 훌륭한 조상의 업적을 기리며 뿌리가 같은 혈육임을 이해하게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이해와 자기 가문에 대한 긍지와 혈족에 대한 사랑을 느낄 때 극단적인 범죄도 사라지고 사회가 평온해질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김수정 총무는 또 고양시 씨족협의회가 종중간의 정보교류와 친목 도모를 통해 종중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제도에 대해 함께 대안을 마련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우리마을 지명유래]신라 고구려 공격 때 수레 빠져, 김씨들 전답 많아 김밭서 유래
성석동의 마을 이름은 진밭이다. 진밭의 유래는 신라가 고구려를 쳐들어갈 때 이곳을 지나다가 수레가 빠져서 내려서 끌고 가던 소동이 벌어지자 그때부터 진밭이라고 불렸다는 설과 이 마을에 김씨들의 전답이 많아서 김밭이라 불리다가 진밭으로 음이 변했다는 설이 전해져 온다. 그 만큼 순천김씨의 전답이 많았던 지역이다.
진밭 마을은 사당골, 함못이, 아랫말, 벌말, 진밭, 오래골, 뒷골, 구석말 등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에서 순천 김씨가 집성촌을 이뤘던 곳은 ‘사당골’이다. 김수정 종중회 총무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순천 김씨의 큰 사당이 마을에 있다고해서 사람들이 사당골이라고 불렀다”고 설명했다. 지금도 마을 입구의 버스 정류장에는 정류장 이름이‘사당골’로 표기돼 있다.
순천 김씨에 따르면 과거 마을 한가운데에는 동네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이 무척 시원해서 여름에는 마을 사람들이 찬물을 길어다 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도로 개설로 사라진 상태다. 이 우물 뒤쪽에 400여년 이상 된 참나무가 있었는데 단오 때면 그네를 묶어서 그네 뛰기를 하기도 했다. 또 마을 인근 산에는 참나무가 많았는데, 나무에서 떨어지는 도토리가 많아서 한 번 줍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정도였다.
진밭 마을은 또 고봉산 산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김수정 총무는 “지금은 많이 축소되고 나이 드신 원주민들만 참여하고 있지만 과거에 산제사 때는 동네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모두 모여서 음식을 나눠먹고 하루 종일 잔치 분위기였다”며 그 때를 회상했다.
진밭마을 주민들은 또 오랜 마을 전통인 대보름 놀이를 고양시 전체의 축제로 만들어 매년 개최하고 있다. 올해도 3000여명에 이르는 지역주민들이 진밭마을에 모여 옛 문화를 체험하며 되살리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우리집안 유물]
규장각 문서보다 오래된 계하사목 ‘공신의 후예들을 예우하라’는 문서

성석동 순천김씨에는 ‘계하사목’이라는 책이 한 권 전해져 온다. 종갓집에 과거 많은 고서들이 전해져 왔으나 새로 집을 지으면서 소각한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집안의 유물이다. 이 계하사목은 현재 규장각에 보관중인 1805년의 문서보다 오래된 정조가 즉위한 건륭 41년(1776)년의 것이다.
대부분의 글이 초서체로 쓰여 있어 해석의 어려움이 있지만 이 지방관아에서 공신의 후예들을 제대로 예우하지 않을 경우 충훈부를 통해 긴급히 그들을 예우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다.
이 문서에는 국조 좌명공신 평양부원군 양경공 김승주의 자손인 김정이 태조조와 선조조에 많은 공록이 있는 후손임을 역설하고 선대의 음혜(陰惠)를 끊고 천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은 이 법의 본의가 아니므로 이를 반포한 뒤에도 전과 같은 폐가 있을 경우 수령은 파직하고 탐관오리는 귀양보내겠다는 강한 의지가 들어있으며 지방관은 이를 살피고 받드는 것이 마땅하다고 실려 있다.
김수정 총무는 “선대의 많은 유물이 관리 소홀로 사라져 버려 무척 아쉽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알림]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는 우리 지역의 집성촌에 대한 취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취재를 원하거나 궁금한 사항이 있으신 분은 아래로 연락바랍니다.
문의 : 고양시씨족협의회 031-964-2009 / 031-967-19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