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중의 산골'이었지만 대대로 학문에 대한 열정 높아 인재 많이 배출

청주 이씨는 고려와 조선 건국의 공신들이다. 시조인 이능희는 고려 개국의 공신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고려의 최고 품계) 태사 국공에 봉하고 식읍 3000호를 하사 받았다. 그의 12세손이며 파시조인 문도공은 고려 말 고향에서 은둔하고 있던 중 태조 이성계의 부름으로 강계 지역의 관군 만호(지방의 군사령관)에 임명되어 추후 개국원종공신이 된다.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2월 27일 청주 이씨 문도공파를 찾았다.
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28) - 청주 이씨 문도공파 집성촌 원당골
취재조사 |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
도움말|청주 이씨 문도공파
1426년 경 공신전 있는 원당 입향
중시조인 문도공(휘 居易)은 조선초기 개국원종공신, 정사·좌명공신으로 정종, 태종초에 영의정을 역임했으나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하여 사병 혁파 정책을 단행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실각한 후 진천으로 낙향했다.
문도공의 맏아들인 상당부원군(휘 佇저)은 태조 5년(1405) 태조의 장녀 경신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됐고 정사·좌명공신으로 태종을 도와 의정부찬성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됐으나 부친과 연루되어 실각하고 말았다. 상당부원군은 함안으로 잠시 귀양갔다가 이천을 거쳐 임강(현 장단)의 별장에 은거하며 지냈다. 그 후 다시 귀경해 재기를 꾀했으나 아버지 문도공이 태종 12년(1412)에 돌아가시자 2년 간 시묘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뜨게된다. 이에 태종이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애도하면서 경숙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묘는 용인에 있으며 경신공주는 세종 8년에 돌아가신 뒤 쌍분으로 상당부원군 옆에 모셔졌다.
상당부원군은 아들이 둘인데 장자인 대호군은 경신공주가 세종8년(1426)에 죽은 후 공신전 등으로 받은 전장이 있는 원당으로 낙향하였다. 이 때부터 청주 이씨 문도공파 사람들은 고양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면서 살아왔다.
당시 대호군이 고양 지역에 처음 입향한 곳은 원당골이며 이후 청주 이씨 사람들은 원당골에서 집성촌을 형성했다. 원당골에는 청주 이씨가 가장 먼저 집성촌을 형성했으며 고양 지역에서도 원당골 이외에는 뚜렷한 청주 이씨 집성촌은 없다.
13대조의 묘소가 지금의 문예회관 자리에 묘소가 있었는데, 현재 시청 부지 일대가 밀양 박씨의 땅이었으나 13대조의 배위가 밀양 박씨로 청주 이씨의 13대조가 그 곳에 안장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시청 청사가 건립되면서 박재궁으로 옮겨졌고 12대조의 묘는 원당골에 위치하고 있다. 청주 이씨는 서인의 노론계통이었다.

삼릉천, 곡릉천 주변으로 농지 발달
청주 이씨는 원당골에서 최대 15가구가 모여 살며 집성촌을 이뤘다. 원당골을 본적으로 하고 있는 청주 이씨는 전국적으로 60가구 정도 된다. 지금도 원당골에 8가구가 살고 있다. 원당골은 고양 지역에서도 교통과 도로 발달이 늦었던 지역이다. 의정부로 향하는 도로가 1978년경에나 건설됐고, 그 전에는 기찻길을 이용해야 외지로 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종중의 문도공 17대손 이우용씨는 “산골 중의 산골이었다. 고양시의 오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주변이 산이었고 도로 등의 발달이 늦었다. 교통이 발달했던 고양시의 다른 지역과 발전의 차이가 발생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교통의 낙후성은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교통과 도로 시설이 부족해 외부와의 연결이 원활하지 않다 보니 신학문의 보급도 다소 늦었다. 원당골에서는 해방 이후에나 신학문에 관심을 갖고 눈을 뜨게 됐다. 그 전에는 종중 어른들이 아이들을 선발해 인근 신원동에 있었던 글방에 보내서 한학을 가르치고는 했다.
반면 원당골은 삼릉천과 곡릉천이 마을을 흐르고 있어 농사를 짓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부농은 아니었지만 하천을 주변으로 농지가 발달하고 농토가 많아 생업을 이어가기에 수월했다. 이필용 종중회장(문도공 17대 종손)은 “오염되기 전의 맑고 투명한 삼릉천과 곡릉천은 원당골 사람들의 자랑이기도 했다. 이 곳에서 아이들은 참게를 잡기도 하고 수영도 하고 이 물을 길어다 밥을 짓기도 했다. 샘물이 있어서 가뭄에도 크게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환경 덕분에 쌀의 품질도 좋았는데 원당골처럼 골짜기에서 재배된 쌀은 벌판의 논에서 나온 쌀보다도 그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농지 가격도 벌판의 논보다 원당골의 논이 가격이 더 높았다. 청주 이씨 사람들은 이 곳에 보통의 수수를 심으면 땅이 좋아서 찰 수수로 바뀔 정도라고 설명한다.
이 밖에도 서삼릉은 원당골 청주 이씨 사람들의 주요 생활터전이기도 했다. 이재명 총무는 “서삼릉이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삼릉에 나물이 많이 자랐다. 그래서 집안 여자들이 서삼릉의 나물을 캐서 장터에 내다 팔며 생계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여자들은 걸어서 영천의 장터까지 가서 이렇게 캔 나물을 팔기도 했다.

수재마을로 불릴 만큼 학문에 열중
교통과 도로 발달이 늦은 지역에 위치하다보니 집안의 아이들은 능곡이나 일산 등 비교적 발달이 빠른 곳의 친구들을 부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부러움은 집안 아이들에게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를 시켰고, 결국 인근에‘수재 마을’이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명문대 출신들이 다수 배출되는 등 아이들은 공부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이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며 공신의 후예로 성장해 온 집안의 가풍과도 연결된다.
원당초 1회 졸업생인 이재호씨(이필용 종중 회장 아버지)는 원당골 청주 이씨 종중에서 신학문을 처음으로 배운 인물이다. 1932년에 원당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첫 입학생으로 공부를 시작한 이재호씨는 1961년 원당면 초대 민선 면장으로도 당선된다. 문도공의 17대손인 이우용씨는 동화약품의 대표이사로 13년간 재직했다. 이우용씨는 1966년 동화약품에 입사해 1982년에 대표이사에 오른 뒤 1996년까지 대표이사를 지냈다.
이우용씨는 “집안 어른들은 신학문을 배우는 것을 일제에 협력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시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신학문 배우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한학과 농사에 전념하도록 교육하셨다”라고 말해 강직한 가풍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청주 이씨는 학자기질이 강하고 순박하고 강직한 것으로 많이 알려졌다.
서울 대경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이승용씨는 “고려사에도 보면 청주 이씨는 간신이 없는 것으로 돼 있다. 청주 이씨가 지방관으로 발령을 받으면 마을 주민들이 크게 환영할 정도였다. 고려사에는 지방의 한 마을에서 민란이 일었는데 청주 이씨 이백경이 관리로 오면 민란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설명했다.
보통의 가정은 명절이 되면 다같이 모여서 회포를 풀다보면 자연스럽게 화투를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청주 이씨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명절이면 아이들은 어른들 앞에 바른 자세로 앉아 집안의 내력과 역사에 대해 한 참 동안 교육을 받아야 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이승용씨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힘든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집안 아이들처럼 밖에 나가서 뛰어 놀고 싶었지만 어른들의 말씀이 끝날 때까지 정자세로 경청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승용씨는 그렇게 어른들로부터 집안의 내력에 대해 듣다보니 역사에 관심이 많아져 대학에서도 역사를 전공해서 지금도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이영찬 고양시씨족협의회 수석부회장은 “지역에 오래 전부터 입향해 정착해 왔기 때문에 뿌리 의식이 강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은 조상들의 역량이 후손들에게서도 전해지고 있는 셈이다”라고 설명했다.

사당 정비, 종중 발전 등 도모
청주 이씨 문도공파에서는 매년 음력 10월에 모여서 집안의 기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경숙공의 기제사는 원당골에 위치한 사당에서 지낸다. 경숙공은 ‘불천지위’를 받은 인물인데,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을 도와 왕위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했다. 보통 4대조를 모신 뒤 묘소에서 시제를 지내는데, ‘불천지위’를 받게 되면 시제 대신 영원히 사당에서 기제사로 모실 수 있다. 이는 공로가 인정될 때 나라에서 허락한 경우 가능하다. 경숙공은 태종으로부터 어필(왕의 친필)과 함께 이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 만큼 경숙공의 공을 국가에서도 인정한 것이다.
청주 이씨 종중 사람들의 숙원은 바로 이 경숙공의 사당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사당을 정비하는 것이다. 종중에서는 문화재 지정으로 경숙공을 더 많이 알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 중이다.
청주 이씨는 또 집성촌이 많이 사라지고 변해버린 조상에 대한 의식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갖고 있다. 이우용씨는 “집성촌에서 자라다보니 자연스럽게 어른들로부터 집안의 역사에 대해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집안의 역사적 흐름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핵가족화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젊은 세대에게는 이런 의식 형성이 미약해 걱정이다. 선대 조상들의 정신이 이어지지 못할까 걱정이다”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이필용 종중 회장은 “선조들이 형성한 집안의 강직한 가풍을 이어받아 젊은 종인들이 집안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자신의 뿌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자손들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라며 종중에서 큰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우리 마을 지명 유래] 원당은 원당골에서 유래
원당은 조선후기까지 원당면 일패리에 속했다. 일패리는 청대동촌, 도촌, 물고리촌, 신촌, 루곡(루동), 능곡 마을이 있었다. 원당은 또 1413년 고봉현이 고양현이 되면서 관청이 들어선 최초의 관아지이다. 이로써 이 곳을 으뜸 원(元)자와 집 당(堂)자를 써서 원당리라고 부르게 됐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또한 원당은 정승이 많이 나며 그 분들의 묏자리가 많이 쓰여 명당으로 유명했던 곳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서삼릉이다. 이 곳에 왕실의 큰 재실(정자각)이 있어 으뜸원자와 집당자를 써서 원당이 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그러나 원당골 청주 이씨는 원당의 지명이 원당골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청주 이씨의 원당골 입향이 서삼릉보다 앞서며 과거 원당의 중심이 원당골이었고 가문에서 고려 말과 조선초기의 공신들이 배출된 사실이 지명에 반영된 것이 아닌지 유추하고 있다.
청주이씨의 시조 안도공과 문도공 고려와 조선의 개국공신들
시조인 안도공 이능희는 고래 개국공신이다. 안도공은 청주 호족 출신으로 청주는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지역이었다. 고려 태조 원년인 918년 8월에 개국 공신 2등에 지정됐고 금, 은, 비단 등을 하사 받았다. 태조 23년 12월에는 신흥사에 공신당을 지어 삼한공신을 동서벽에 그려 붙였다. 안도공의 사당은 충남 홍성군 홍동면 화신리에 있는 화신사다.
문도공 이거이는 조선 개국에는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어 직접 참여하지 않아 개국원종공신이 된다. 이후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 1393년(태조2)에 우산기상시에 임명되고 그 뒤 평안도병마도절제사, 참지문하부사, 참찬문하부사, 판하넝부사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태종 이방원의 집권 과정에서 문도공은 자신의 아들과 함께 태종의 최측근으로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서 크게 기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