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 신도시 개발 당시 옛 지명 보존 위해 노력

설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 중 하나다. 설씨를 비롯해 이, 최, 손, 정, 배씨는 한국 최초의 성씨로 기록돼 있기도 하다. 경주 설씨 참의공파 사람들은 원효대사의 후손으로 불의를 참지 못하며 강한 의협심을 갖고 정발산 인근에서 설촌 마을을 형성하며 화목하게 살아왔다.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3월 5일 경주 설씨 참의공파를 찾았다.
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29) - 경주 설씨 참의공파 집성촌 마두동 설촌마을
취재조사 |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
도움말|경주 설씨 참의공파 일산지회
1543년경 마두리 입향
개성에 거주하던 설윤은 가선대부를 지내던 중 1543년경 일산읍 마두리 설촌에 정착하게 된다. 설윤은 조선시대 문량공이었던 설풍의 3대손이며 가선대부를 지낸 설귀창의 9세손이다. 당초 백석1동에 위치한 입향조인 설윤의 묘소는 현재 일산 신도시의 개발로 파주 적성면에 선산을 마련해 이장한 상태다.
입향조인 설윤은 슬하에 두 아들 설경수와 설경철을 두었는데, 장남 설경수는 구산동으로 이주해 외아들을 낳았고, 차남 설경철은 설촌에서 거주하면서 6명의 아들을 두었다.
설촌이 산세가 좋고, 평지가 넓은 탓인지 참의공파 후손들이 많이 번창하며 집성촌을 이루었다. 설촌은 북쪽으로 정발산이 병풍처럼 감싸주고 그 산맥이 백마역 인근까지 이어져 있었다. 현재 일산신도시의 위치상으로는 마두도서관 부근에서 정발마을까지가 설촌 마을이었다.

일산 열무 유명해 시장서 인기
설촌 마을은 지형이 평탄한 탓에 농토가 넓게 형성됐으며 대부분의 논밭이 설씨 문중 소유였다. 설촌 마을의 논은 기름진 논이 집과 인접한 문전옥답의 형태가 많았다. 또한 마을과 논밭 사이에는 398번 지방도가 형성돼 있기도 했다. 설씨 문중 사람들은 개발 전 설촌 마을이 정발산이 감싸안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고 기억한다.
설원규 고문은 “당시 대부분의 고양시 사람들처럼 설씨 문중도 설촌 마을에서 농사에 의존하며 살았다. 그러던 중 1970년 초에 지역에서 보기 드물게 시설원예인 비닐하우스를 시작했다. 현대의 비닐하우스는 강철 재질의 쇠파이프를 뼈대로 사용하나 당시는 대나무를 이용해 제작했다. 논에서는 5월경에나 채소의 수확이 가능했으나 비닐 하우스에서는 3월이면 수확이 가능해 비닐하우스 재배가 시작되자 수입면에서는 농사보다 훨씬 풍족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이 일대에서 재배된 ‘일산 열무’는 크기도 크고 맛도 좋아 인기가 많았다. 일산 시장과 서울에 주로 공급된 일산 열무는 설씨 문중 사람들에게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설촌 마을은 집 집 마다 3천 평 정도의 농지를 소유하고 우마차를 보유할 정도로 부농에 속했다.
설원규 고문은 “영농자금, 생활비, 교육비 등을 이렇게 비닐하우스를 통한 채소 재배 등에서 올린 수입으로 많이 충당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풍족하게 살 수 있게 해준 농지를 모두 일산 신도시 개발에 넘겨주고 입향조의 묘도 이장한 뒤 종중 사람들도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설씨 문중과 정발산 일대의 동네에는 재미난 설화 하나가 전해져 온다. 과거 괴질이 유행하면서 사람들이 목숨을 많이 잃던 시절에 설촌 마을 능안골에 설씨 노인이 한 분 살고 있었다. 이 노인이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는데 붉은 옷을 입은 동자가 한강을 넘어 정발산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것을 본 설씨 노인이 괴이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흰 수염을 기른 산신령이 나타나서 동자에게 호통을 쳤고, 그러자 동자는 그 길로 김포쪽으로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 후로 설촌 마을 부근 정발산 일대에서는 괴질이 사라졌다고 한다.
설씨 노인은 이 꿈을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고, 마을 사람들은 정발산의 산신령이 마을을 구했다며 그 후 인근의 6개 마을(설촌, 냉촌, 강촌, 낙민, 놀매기, 닥밭)이 3년마다 정발산 도당굿을 지내고 있다.
또한 설원규 고문의 아버지인 설한봉 어른은 한학에 관심이 많아서 고서적을 모으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설 고문은 이 책들을 집안의 창고에 보관했으나 90년대에 일산 일대에 폭우가 내릴 때 책들이 많이 훼손돼 버렸다. 설 고문은 그의 아버님이 모은 책과 설씨 문중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책들이‘왕희지(王羲之) 서체’‘고금연귀(古今聯句)’‘가정백방길흉비결(家庭白方吉凶秘訣)’‘문자류집(文字類集) 목록’등 다수라고 밝혔다.
일산 신도시 건설, 택지 개발로 고향 땅서 멀어져
설촌 마을이 일산 신도시 개발에 포함되자 설씨 문중 사람들은 이주를 해야했다. 그러나 선조로부터 수 백년을 살아온 고향 땅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래서 설씨 문중 사람들은 일산 신도시 인근의 풍동으로 많이 이주한다. 고향 땅을 인근에서 바라볼 수 있고 고양시를 떠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풍동의 택지개발이 시작되면서 다시 이주할 곳을 알아보고 있다. 계속된 개발로 고향 땅에서 밀려나야 하는 현실이 지역에 대한 애정이 큰 설씨네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문중의 한 관계자는 “농사 때면 품앗이를 하며 서로 돕고 지내던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는 옛 추억일 뿐이다. 종중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자리는 이제 시제를 지내거나 집안에 큰 행사가 있을 때뿐이다”라며 도시화와 개발로 인해 변해버린 세상에 대한 아픔을 드러냈다.

원효대사 후손다운 남다른 의협심
경주 설씨 사람들은 지역에 대한 애정만큼은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조상으로부터 수 백년을 살아왔던 지역이 일산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개발된다고 하자 경주 설씨 사람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고향 땅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에 다른 주민들과 함께 개발 반대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 과정에서 설원규 고문은 투쟁 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결국 일산 신도시가 건설되자 이번에는 관계 기관을 쫓아다니며 일산 신도시 개발 전에 사용되던 고양시 고유 지명이 유지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설원규 고문은 일산 신도시 개발과 함께 형성되는 지하철 역사의 이름에 백석, 마두, 정발산, 주엽, 대화동의 지명이 반영될 수 있도록 철도청에 지속적으로 건의했다. 그 결과 마침내 5개 역사의 이름에 5개 지역의 이름이 반영됐다. 설 고문은 교육청도 수시로 방문하며 학교의 이름들이 전통적인 지역명이 반영될 수 있도록 촉구했다.
설원규 고문은 “일산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5개 행정구역이 수용됐고 지하철역도 마침 5개가 신설됐다. 지하철역의 이름이 개발로 모두 사라져버린 지역의 이름과 유래를 남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매일같이 관계기관을 찾아다니면서 건의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에‘고양시 지역발전 협의회’를 설립하기도 한 설 고문은 앞으로 각 자연부락이 위치했던 곳에 마을 이름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소망이라고 한다.
경주 설씨의 이런 열정은 선조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경주 설씨 참의공파의 설창희, 설한순 선생은 6·25당시 치열한 태극단 활동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전쟁 당시 비밀지하 단체인 태극단에서 활동한 두 분은 구국의 일념으로 태극단에서 능곡 삼성당 전투와 정발산 전투에 참여하면서 많은 공을 세우게 된다. 덕이동 묘지에는 당시 활동 중 전사한 45인의 묘가 마련돼 있다.
또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역사 속 인물 중 하나인 원효대사가 바로 경주 설씨 출신이다. 삼국 통일의 정신적 지주가 된 원효대사는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았는데, 설총은 우리나라 최초로 현인의 칭호를 받고 신라 3문장의 1인자, 신라 10현중과 동국 18현중의 수위로 꼽히는 인물이다. 특히 이두 문자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고려 때의 설응은 고려가 멸망하자 신하로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조선의 병조참의 제의도 거절할 정도로 강직했으며 설맹손은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창씨 개명에 반대하며 자결한 인물이다. 설의식은 1922년 동아일보 사회부기자로 입사해 일본 특파원과 편집국장을 지내다가 일장기말살사건으로 1936년 사퇴했다.
설원규 고문은 “원효대사의 후손인 탓인지 신라에서부터 고려, 조선, 근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에 대한 충성의 마음으로 강한 의협심을 갖고 살아온 인물들이 유난히 많이 배출됐다”고 말했다.

일산 신도시 사람들의 지역사랑 당부
경주 설씨 참의공파 사람들은 일산 신도시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설원규 고문은 “많은 자연마을이 신도시에 수용됐는데, 지금 신도시 사람들이 일산의 옛 것에 대해 유래라도 알고 지내기를 바란다. 우리 지역이 후손들에게 역사를 보존시키고 교육 시킬 수 있는 곳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설 고문은 아직도 일산 신도시를 보면 누구네 집이 어디에 있었고, 어느 아파트가 들어선 곳은 논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 눈에 보이듯 그려진다며 개발이 됐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직도 이렇게 고향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지만 계속되는 개발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허탈감이 가슴 가득히 밀려온다.
경주 설씨 사람들은 일산 신도시 개발과 풍동 택지 개발로 많은 종인들이 곳곳에 흩어져서 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김장때면 종중의 부녀자들이 같이 모여 김장을 담그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각 종 개발로 종인들이 흩어져서 사는 만큼 종중의 역할은 그 만큼 더 중요하다. 고향을 떠나서 사는 종인들에게 구심점 역할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종중의 활동이 매년 음력 10월에 이뤄지는 시제나 벌초 때 모여서 함께 이야기하고 종중의 일을 논의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경주 설씨 참의공파는 앞으로 여건이 허락하면 장학사업을 통해 젊은 종인들에 대한 학비 지원도 계획하고 있다.
설은춘 회장은 “회원간의 유대 강화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일산 신도시를 보고 있으면 옛날 생각도 나고 아쉬움도 든다. 신도시와 풍동 택지개발로 자꾸 고향 땅에서 밀려나고 종중이 흩어져야 하기 때문에 화합도모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설씨가 많이 살아서 설촌 마을
설촌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설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 때 마을의 50가구 정도가 설씨네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일산 신도시의 개발로 설촌 마을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정발고등학교 인근의 ‘설촌 공원’이 있어 설촌 마을의 위치와 유래를 짐작하게 한다.
설촌 마을은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 마을이 긴 일자형 구조로 형성돼 있어서 아랫마을, 윗마을, 가운뎃말로 구분되었다. 특히 윗말은 ‘능안’이라고도 불렸다.
능안이라고 불린 이유에 대해 경주 설씨 사람들은 “옛날에 왕의 묘로 사용하려고 했는데 묘자리가 100개에서 1개가 부족해 왕의 묘로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계속 능안이라는 이름이 전해져 왔다고 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식사동에 위치한 ‘견달산’에 대해서도 경주 설씨네 사람들을 비롯한 정발산 인근 사람들은 ‘본달산’이라고 불렀다. 다른 마을 사람들이 설촌 마을에 와서 “견달산이 어디디 있는가?”라고 물으면 설촌 마을 사람들은 모른다고 말했을 정도다. 견달산은 본달, 번달, 현달 등으로 각기 불렸다.
이에 대해 경주 설씨 설촌 마을 사람들은 견달산이 볼 견(見)자를 사용하는데, 이를 한글인 ‘보다(본)’로 풀이해 ‘본달산’이라고 부른 것이 아닌지 추정하고 있다.
신라 진품에 버금가는 귀족가문
설씨는 신라의 개국공신이며 신라의 왕족인 박·석·김씨에 버금가는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했다. 신라의 신분제도인 골품제에서도 왕족인 진품에 버금가는 6두품의 귀족가문으로 원효대사, 설총 등 역사상에도 많은 인물을 배출한다.
경주 설씨의 시조 설거백은 경북 월성군 천북면 일대에 부족국가를 이루어 습지부의 장이 된다. 이 때 진한에는 6부족이 있었는데, B.C. 57년 경 6부족이 회의를 통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다. 후에 나라 이름을 서라벌(신라)이라고 하게 된다.
2년 뒤 B.C. 55년경에 설거백은 개국 공신으로 대마사겸 대원수가 되고 신라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6부의 이름을 고쳐 6촌으로 승격하면서 설씨의 성을 하사 받았다.
설원규 고문은 “이 때부터 한국 최초의 6성씨가 시작된다고 본다. 즉, 설·이·최·손·정·배 씨 등이 이 때 생겨난 것이고 설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라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설씨를 비롯한 6성의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신화도 실려 있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