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없이 마을 발전 이끌며 450여년 거주

진천 임씨는 일신의 안위보다는 국가와 이웃을 위해 희생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 특히 고려와 조선초기에 번성하면서 국가의 주요 관직에서 많은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재산 증식에는 전혀 욕심이 없어 청빈한 삶을 살았고 후손들에게도 이런 삶을 강조하며 살아왔다.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3월 21일 진천 임씨 진사공파를 찾았다.
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31) - 진천 임씨 진사공파 언장촌
취재조사 |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
도움말|진천 임씨 진사공파 고양 종중
입향조 정착지에 여전히 종손 거주
진천 임씨의 시조의 7대손인 임수경은 1454년에 문과에 급제해 삭녕군수에 오른다. 그러나 이듬해인 1445년에 부모가 돌아가시자 묘소인 죽산에서 노막을 짓고 시묘생활을 한다.
시묘가 끝날 무렵 조정에서는 그의 인물됨과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임수경에게 흥주목사를 맡기고자 한다. 그러나 임수경은 당시 임금이던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것이 불충이라고 여겨 흥주목사직을 거절하고 끝내 관직에 나가지 않는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임수경이 효를 실행함과 동시에 충절을 지키는 절개 있는 선택을 했다며 생육신과 비교해서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임수경의 손자이며 종손인 임세영은 일찍이 성균관에 급제해 통덕랑에 오른 인재였다. 임세영은 전주 이씨와 혼인한 뒤 1550년~1555년경에 왜란을 피해 지금의 고양시 덕이동 1116번지 언장촌으로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묘소는 덕이동의 군산릉에 안장돼 있으며 그가 처음 입향한 곳에서는 여전히 종손이 거주하며 살고 있다.
임세영은 임효종과 임효순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인 임효종은 아들을 낳지 못해 차남인 임효순의 자손들이 번창하면서 덕이동에서 살아왔다.

적은 농지 불구 욕심없이 살아와
덕이동 진천 임씨는 주로 3통과 4통에 분포하며 살아왔다. 진천 임씨가 많이 살던 집성촌은 언장촌으로 불린다. 1960∼1970년 당시 이 일대는 마을의 전체 50여세대 대부분이 진천 임씨로 구성됐을 정도로 타성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현재 전국에 덕이동을 본적으로 하는 인구는 약 500여명, 156가구에 이른다.
1856년에 태어난 임백원씨는 과거 이 일대에서 글방을 하며 아이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인근에서 한학에 능통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서 학문을 배웠을 정도로 한학에 뛰어났다. 임백원씨는 작은 키에 무서운 성격이었는데, 하루는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를 보고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진천 임씨는 조정의 벼슬 권유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임수경의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강직한 가풍을 자랑한다. 종중의 임형선씨는 “벼슬에 급제해서 험한 일 보다는 묵묵히 선비로서의 정신을 지켜온 집안이다. 또 재산에 대한 욕심도 없어서 후손들이 경제적으로는 다소 어려움을 겪어온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과거 이 일대는 수리조합 등 농사를 위한 수리 시설이 늦게 발달한 지역이다. 전형적인 천수답으로 저수지에 물을 가뒀다가 농사를 지었으며 일부에서는 고래실논이 발달하기도 했다. 진천 임씨 사람들은 농사를 위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농사철이면 분주했고, 가을이면 1km이상 떨어진 산비탈까지 벼를 지고 걸어가 벼를 말리기도 했다.
임옥규 전 종중 회장은 “땅이 비옥하긴 했는데 농경지도 크게 발달하지 않고 특별한 작물도 재배하지 않아 소득이 적었다. 이에 따라 자손들 교육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생활을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어른들은 선조들의 선비 정신만은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말해 진천 임씨의 가풍을 짐작하게 했다.
진천 임씨가 살던 덕이동 일대에는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많았는데, 임형일 종중 회장은 “큰 나무가 얼마나 많았는지 호랑이가 나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집안에서 유학계 활발
과거에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주민들이 서로 돕는 ‘유학계’가 집안마다 발달했다. 특히 유학계는 마을에 누군가가 죽어서 초상이 나면 주민들이 모여서 일을 돕고 상여를 같이 끌면서 장례 절차가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힘을 모았다.
이 유학계는 마을 단위로 결성되기보다는 성씨별로 결성돼 그 결속력을 높였는데, 덕이동 일대에서는 진천 임씨의 숫자가 단연 많았기 때문에 이 유학계의 힘도 컸다. 집성촌에 초상이 나면 유학계에서는 쌀을 모아서 장례비용을 지원하기도 했고, 마을의 대부분이 같은 성씨, 같은 집안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유학계도 크게 번성하고 원활하게 활동해 다른 집안 유학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임형선씨는 “집안에서 임주원씨가 고서적 등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6·25 당시에 대부분이 소실되고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진천 임씨 덕이동 사람들은 이렇게 고서적이 소실된 것 이외에도 조상들을 모시던 사당이 없어진 것을 많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180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 인근에 진천 임씨의 사당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사당이 노후화 되면서 관리의 어려움이 생긴 탓인지 사당이 철거됐고 그 이후에는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다.

마을 공덕비 2개 모두 진천 임씨
덕이3통 마을회관에 가면 2개의 공덕비를 볼 수 있다. 이 공덕비의 주인공은 재미있게도 모두 ‘임형선’씨를 위해 세워졌다. 진천 임씨 집안에 이장을 지낸 임형선씨가 동명이인으로 두 명이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초에 이장을 지내던 임형선씨는 새마을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길을 새로 확장하는 등 마을 발전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이에 주민들은 마을 회관 앞에 공덕비를 세우고 임형선씨에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임형선씨의 뒤를 이어서 마을의 이장을 지낸 것이 전임 이장과 이름이 동일한 임형선씨였다. 신임 이장인 임형선씨도 전임 이장 못지 않게 열성적으로 마을 발전을 위해 활동했다. 특히 이장 퇴임 후 2001년에 마을회관 건립을 위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무상으로 기증했다.
후임 이장이었던 임형선씨는 “이장으로서 마을일을 보던 것이 참 좋았는데, 그 때 마을 회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런데 2001년경에 마을 회관을 짓기 위해 땅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게 됐고, 마을 발전을 위해서 땅을 기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각 종 개발 사업이 성행하면서 그에 따른 보상 문제로 행정기관과 주민들 사이에 많은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임씨가 자신 소유의 땅을 마을 회관 설립을 위해 기꺼이 내놓은 것이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 일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이장 재직 중에도 마을 발전을 위해 열심히 활동했던 임형선씨가 퇴임 후에도 마을 회관 건립을 위해 땅을 기증하자 주민들은 마을 회관을 건립하면서 그 앞에 임형선씨를 위한 공덕비를 마련했다.
지금 덕이3통에 위치한 마을 회관에 가면 두 명의 임형선씨의 공덕비와 그들이 마을 발전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임형성 고양시의회의원과 임용규 일산동구청장이 덕이동 진천 임씨 출신이다. 이처럼 마을과 지역 발전을 위한 인물이 다수 배출된 것과 관련해 종중에서는 조상들의 영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과거 진천 임씨는 고려와 조선초에 나라의 주요 벼슬을 지낼 정도로 크게 번성하던 가문이었다. 특히 고려 때에는 지금의 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에 진천 임씨가 많이 등용됐다. 이런 이유로 진천 임씨 종중에서는 자신과 집안의 안위보다는 국가와 지역을 먼저 생각하는 조상들의 선비 정신이 아직도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현대사회 종중 역할 되새겨
임형일 종중 회장은 “사회가 발달하고 현대화되면서 집성촌이 자꾸 소멸된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뿌리 의식도 많이 약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중 활동이 더 중요하다”며 현대 사회에 있어 종중 활동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덕이동도 일산 신도시가 형성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아 마을의 개발이 진행됐고, 지금은 찾아볼 수 있는 과거의 모습은 여전히 집안 사람들끼리 우애가 깊고,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는 것뿐이다.
다른 종중과 마찬가지로 진천 임씨 진사공파 종중에서도 고령의 어른들은 여전히 뿌리에 대한 인식과 종중의 중요성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지만 젊은 종인들의 참여와 이해가 부족한 것이 풀기 어려운 숙제이다. 젊은 종인들의 참여 활성화는 종중의 발전과 급변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옛 것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다.
임 회장은 “자신의 뿌리가 중요한 이유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종중 활동을 강화하면서 후손들에게 뿌리 의식의 중요성에 대해 교육해야 한다. 이것이 종중이 존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진천 임씨에서도 조상들에 대한 잃어버린 기록을 찾고 알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 중이다”라고 밝혔다.
덕이동 진천 임씨는 매년 정기적으로 시제와 벌초 행사를 진행하며 종인들의 참여와 화합을 도모하고 있다. 또 고양시 곳곳에서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여러 곳에 분포된 조상들의 묘소를 한 곳으로 모아서 종중 묘역을 조성할 계획도 갖고 있다.
임형선씨는 “일년에도 몇 번씩 모여서 종중 행사에 같이 참여하고 되도록 자주 모이려고 한다. 다들 바쁘게 살고 있는 요즘이기 때문에 종중을 통해서라도 자주 얼굴을 보고 자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진천 임씨가 전하는 우리 마을 지명 유래-입향조의 벼슬을 따서 ‘온장’ 추정
덕이동에서도 진천 임씨 진사공파가 많이 모여 살던 곳은 ‘언장’이라고 불리던 지역이다. 주민들은 언장 혹은 온장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입향조인 임세영이 조선시대에 ‘온’이라는 벼슬을 한 것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진천 임씨의 해석이다.
그러나 문헌에는 이 마을의 이름이 ‘방죽 언(堰)’자 언장(堰場)으로 표기돼 있어 임세영의 벼슬이 아닌 다른 유래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입향조인 임세영이 안장된 산이 ‘군산릉’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지명에 대해서도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지만 진천 임씨 사람들은 9개의 골짜기기 있다고해서 군산릉이라고 붙여졌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정확한 연관성에 대해서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진천 임씨의 역사 - 시조 임희 왕건 도와 흥화부원군 지내

그의 후손 임수전은 임진왜란때 의병을 이끌고 죽산 봉성에서 왜적을 토벌하다 전사했고 그의 아들 임현은 광해조 11년에 명나라를 도와 청나라를 r공격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진천에 가면 이들 부자를 기리는 충신의 정려(亭閭)가 동네 앞에 마련돼 있다.
또한 임연 장군 숭모비가 후손들에 의하여 진천에 마련돼 있고 임 장군이 고려 천지를 호령할 때에 구축했다는 농다리는 거대한 자연석으로 축적한 것으로 길이 약 100m, 넓이 약 1.5m, 높이 약 1.5m 규모로 당시의 규모로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이 다리는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당기면 돌아가도록 설계돼 ‘농(籠)다리’라는 명칭이 붙었다. 농다리는 진천의 역사적 명물로 전해 내려오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 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