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예 교육할 학습장 건립 희망

▲ 한산 이씨 광목공파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선조들의 유물을 살펴보고 있다.

한산 이씨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마다하고 은둔자로서 살아간다. 이런 선조들의 모습은 지금도 후손들에게 남아 한산 이씨 광목공파 사람들은 조용한 삶을 추구하고 남을 탓하기보다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는 태도를 지닌다.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4월 27일 한산 이씨 광목공파 종회 및 고양 화수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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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35) - 한산 이씨 광목공파 종회 및 고양 화수회 은못이 마을

취재조사 |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
도움말|한산 이씨 광목공파 종회 및 고양 화수회

단종을 그리며 만든 ‘은지 연못’

한산 이씨의 시조 윤경은 고려 숙종 때 지방의 호족으로 ‘권지호장직’에 있었으며 그의 7세손 색은 원나라에 들어가 원나라 과거에 급제해 한림원 관직에 등용됐다. 이후 귀국해 대사성, 대제학, 문하시중 등 요직에 올랐다. 1362년(공민왕 11년) 흥건적의 난 때는 왕을 호종해 공을 세워 ‘한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축은 계유정란이 일어나기 전 주변정세의 변화를 감지한뒤 황해도 관찰사를 사직하고 고양군으로 낙향한다. 당시 낙향해 정착한 곳이 도내동 은못이 마을이다. 이축은 단종이 영월로 귀향간 뒤 살해되자 매월당 김시습, 조상치 등과 공주 동학사에서 단종 어포를 제단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이축은 1456년에 단종을 그리며 연못을 하나 만들었다. 이 연못이 은못이 마을의 지명 유래가 된 은지 연못(덕양구 도내동 844-3번지)이다. 이 연못은 논으로 바뀌었다가 1980년도에 다시 못으로 만들어졌다. 위치는 흥도동 주민센터에서 화전동 방향으로 이어진 도로상 은못이 마을 입구에 있으며 약 6611㎡(2000여 평)정도의 크기다.

이축은 1454년 낙향 후 20여 년을 이곳에서 보내다가 1473년에 세상을 떴다. 그의 묘소는 도내동 한산 이씨 묘역인 은지 서남쪽 200m 부근에 위치하며 조선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1998년에 건축해 총 26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경은재

주민간 신뢰, 일제강점기 6·25에도 무탈

이축이 은지 연못을 만들고 은못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한산 이씨 광목공파 후손들도 이 일대에 번성하게 된다. 당시 이축이 처음에 터를 잡은 곳에는 5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의 종손인 이세준 현 고양향교 전교가 살고 있다.

한산 이씨는 또 은못이 마을 인근 산에 60여기의 조상 묘역을 조성해 선조들의 공덕을 기리며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는 광목공 이숙야부터 안소공 이훈, 망월암 이축, 이훈 등이 안장돼 있다.

한산 이씨는 예로부터 이 일대에서 13가구 정도가 집성촌을 이루며 함께 살아왔다. 지금도 10여 가구 정도가 함께 살고 있는데, 타성은 별로 없었고 한산 이씨가 주로 많이 거주해 왔다.
토질은 농사를 짓기에 좋은 편이었는데, 1마지기에서 1섬을 수확하는 것을 대석(對石)지기라 하고 1마지기에서 2섬을 수확하게 되면 양석(兩石)지기라 한다. 은못이 마을은 양석 지기 정도의 수확량을 보였다.

한산 이씨 광목공파에서는 독특하게도 외조봉사를 지내는데 21대조 할아버지 숙야의 장인이며 계성판윤을 지낸 봉유인을 제향하고 있다. 한산 이씨가 외조봉사를 지내는 이유는 그 만큼 외조어른이 한산 이씨 집안의 큰 힘이 됐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산 이씨는 고려의 충신들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나라를 잃은 슬픔과 충신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조선 조정의 벼슬을 거부하고 은신하며 지냈다. 그러자 조선 조정과 관계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한산 이씨 자손들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 계성판윤을 지낸 외조 어른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산 이씨가 살고 있는 은못이 마을은 6·25때 폭격으로 인한 피해가 전혀 없었다. 전쟁으로 다치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이 은지 연못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세준 전교는 “당시 고양 일대에서 전쟁이 치열했음에도 파옥된 집이 거의 없었고 피난 가면서 항아리에 담아서 마을 뒷산에 묻어둔 신주도 그대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이 모두 은지 연못이 마을을 지켜준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때도 마을의 별다른 변고가 없었다. 일본이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을 억압하면서 당시 곳곳에서는 친일파와 주민들간의 갈등이 자주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은못이 마을에서는 주민들간의 화합과 신뢰덕분인지 큰 위기가 없었다.

▲ 인재공, 안소공의 불천위 사당 앞에 모인 한산 이씨 광목공파 화수회 종원들. 뒷줄 왼쪽부터 이인원, 이준석, 이지원, 이현원, 이형복, 이종원, 이경원, 이영복, 이경구, 이조원, 이봉구, 이낙원, 이세준, 이낙원, 이장찬, 이성원, 이정구

차분한 성품으로 남 탓보다는 자기반성

고려의 멸망과 함께 조선 조정의 벼슬 권유를 거절하고 충신으로서 은둔 생활을 했던 선조들의 영향인지 지금도 한산 이씨 사람들은 차분한 성격이며 남 앞에 앞장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세준 전교는 “모든 일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먼저 찾고, 정치에 나서거나 앞장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묵묵히 조용히 사는 것을 가장 좋은 덕목으로 여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산 이씨는 제사 방법을 현대 실정에 맞도록 변형하면서 더 많은 후손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예전에는 시제를 3일씩 지내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제청을 짓고 시제를 하루에 모두 지내고 있다.

광목공파 종중에서는 현실적 여건을 생각해 1998년에 제청을 건축, 총 26위의 위패를 봉안해 과거 묘에서 올렸던 시향을 이제는 매년 제청에서 향사를 올리고 있다. 또한 작년부터는 합사봉행을 통해 제사 시간을 단축하고 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후손들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살고 각 자의 일상이 바쁘다보니 몇 일씩 되는 제사에 참여하기 어려워지면서 집안 행사의 참여율이 떨어지는 문제를 보완하기 위한 방안이다. 한산 이씨는 제사를 다소 현대적으로 지내더라도 더 많은 후손들의 참여를 통해 선조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같이 결정했다.

종손인 이세준 고양향교 전교는 “집안 모두가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큰 바램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지역에 학습장을 건립하고 싶다. 그리고 조상에 감사하는 마음을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어갈 수 있도록 위선사(爲先事 조상을 위하여 하는 일)를 개선해보고 싶다”라며 전통문화의 중요성과 이의 현대적 계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산 이씨가 생각하는 학습장은 우리의 예법과 충·효 등 전통 덕목을 오늘에 되살려 계승 할 수 있도록 젊은 세대들에게 교육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한산 이씨가 이런 학습장을 생각하는 이유는 이런 정신이 살아나야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세준 전교는 논어의 위공령편에 나오는 말을 예로 들며 전통적 가치를 존중하는 삶을 권유했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말만 잘 지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은 내가 하기 싫은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뜻으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남을 존중하라는 뜻이다.”

▲ 조정으로부터 불천위를 받은 사당

후손의 덕목 기록한 책 480년간 전래
제사준비 기록된 200년전 문서, 위패 독집 등 보존

한산 이씨 광목공파 집안에는 여러 가지 오래된 유물들이 보관돼 있다. 200여년 전에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묘제의’는 제사를 준비하면서 필요한 사항들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
또한 가문의 수칙을 적어 놓은 책자도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480년 전 한산 이씨 광목공파 아산군의 부인되는 어른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는 집안 여자들이 조상의 제사를 잘 챙기는 등 며느리로서 지켜야 할 덕목들이 명시돼 있다.
이 밖에도 통정대부를 지내고 나중에 지평 벼슬에 오른 지평공 이성원(1576∼1629)의 교지 등 많은 어른들의 교지를 보관하고 있다. 또 위패를 모시는 독집, 호패 등의 다양한 유물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세준 전교는 “몇 백년 된 물건들을 지켜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조상들의 숨결이 묻어있는 물품들이기 때문에 잘 간직해 오고 있다. 보관이 어려워 전해지지 못한 물품들이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 한산 이씨 집안에 전해져 오는 선조들의 유물

사당 훼손되면 집안에 변고 생겨
6·25 예고한 소, 도깨비 이야기 등 전해져

한산 이씨는 불천위를 받은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집안에서 조선시대 안소공을 지낸 이훈이 조정으로부터 불천위 지위를 받으면서 내려온 것이다. 본래 제사는 고조까지 4대를 모시고 그 위의 조상들은 시제 때 다 함께 지낸다. 그러나 불천위에 봉해지면 영원히 그 분이 돌아가신 날 제사를 지내는 기제(忌祭)를 모실 수 있게 된다.

이 불천위는 보통 국가에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분들에 대해 국가, 유림, 문중에서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모시는 것이 허락된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불천위는 그 집안의 영광과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인정돼 왔다.

조선시대 청백리였던 안소공은 효령대군의 사위로 좌리공신을 지냈다. 이 사당은 1593년 소실되고 1798년 중창하면서 목은 이색의 차남인 인재공 이종학을 추배 했다. 이종학은 두문동에 들어간 분으로  1392년 상호군 직제학으로 32세에 함양으로 귀양가서 죽임을 당했으며 현재 진천 백원서원과 서천문헌서원 등에 모셔진 분이다.

그런데 한산 이씨 사람들은 이 사당이 훼손되면 반드시 집안에 변고가 발생한다고 믿는다.  어느 날 사당에 보관 중인 선조의 독집이 깨진 것이 발견된 뒤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시는 등 매번 사당이 훼손되면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겼다. 불천위 사당에서 제사를 지낼 때면 한산 이씨뿐만 아니라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 제를 올리고는 했다.

한번은 갑신정변 때 종손이 마을을 떠나 피난을 가면서 종손의 집에 마을의 다른 주민들이 잠시 머물게 됐다. 얼마 후 집에 머물던 마을 주민이 도깨비에 홀려 정신 이상자가 되는 일이 발생하면서 이 집은 20년 이상 폐가로 방치되기도 했다. 

이 집은 입향조인 이축 어른이 은지못에 정착 후 여지껏 종손이 살아 왔던 집인데 유독 화재가 많이 발생하고 명절 때 송편을 만들면 밤새 송편들이 사라져 마을 뒷산의 물푸레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발견되기도 해 어른들은 도깨비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1950년도 6월 초. 마을 사람들과 한산 이씨 사람들은 나라에 큰 변고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긴장하는 사건이 생겼다. 종갓집 외양간에 묶어둔 소가 집에 사람들이 없는 사이에 외양간을 나와 마루의 미닫이문 사이로 마루에 올라가 변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외출에서 돌아온 어른들은 그 광경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얼마 후 6·25가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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