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곡 중·고교 부지 희사 등 지역발전에도 기여
나주 압해 정씨 월헌공파는 위로는 조상에 대한 예를 올리고 아래로는 후손들에 대한 장학 사업을 통해 인재양성에 노력하고 있다. 선비의 기질을 갖추고 지역 발전을 위해 활동해 온 나주 압해 정씨는 고양의 대표적 집성촌 중 하나였다.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6월 3일 나주 압해 정씨 월헌공파 종회를 찾았다.
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36) - 나주 압해 정씨 월헌공파 종회
취재조사 |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
도움말|나주 압해 정씨 월헌공파 종회
월헌공 황해도 배천에서 능곡으로
고양에 살고 있는 나주 압해 정씨 월헌공파는 황해도 태생인 월헌공 정수강 선생에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1454년 황해도 배천 태생인 월헌공은 결혼 후 지금의 능곡동 일대로 이주하게 된다. 이후 그의 자손들이 능곡동과 행신동 일대에 번성해왔다.
월헌공은 조선시대의 학자로 21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연산군의 횡포를 비판하다가 파직된 뒤 다시 부름에도 나가지 않고 7년 간 절의를 지켰다. 중종반정으로 부름을 받고 다시 나가 정국원종공신에 책록된 후 대사성, 강원감사, 대사헌, 병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종중에서는 월헌공이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종 1474년에 고양시로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양시로 이주한 월헌공은 이후 강릉김씨와 혼인을 하고 3명의 아들을 두었다. 지금도 토당동 지도공원에서는 월헌공 정수강 선생의 문학비를 볼 수 있다. 이 비는 2004년 전국에 있는 국문과 교수 및 문인들로 구성된 ‘한국 문학비 건립 동호회’ 주관으로 세워졌다.

정월이면 식구들 모여 윷놀이
나주 압해 정씨는 10여 가구가 능곡동과 행신동 일대에 거주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왔다. 이 일대에는 논이 많이 발달해 있었으며 나주 압해 정씨도 농업을 기반으로 다방면에서 종인들이 활동해 왔다. 고양시 최초의 사법서사(지금의 법무사)를 지낸 정해봉 어른이 나주 압해 정씨 월헌공파 사람이다.
개발 전에 이 일대는 소나무가 많아서 송장(松長)고개라고 불리면서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능곡동 일대에는 나주 압해 정씨 이외에도 최씨와 이씨가 많이 거주했다.
이 지역은 갯벌을 했던 곳으로 흙은 황토가 많이 분포해 있었으며 산을 개간한 곳이 많았다. 정영표 나주 압해 정씨 공안공파종회 이사는 “대장천, 창릉천, 한강이 마을 인근에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친구들과 어울려서 잉어와 메기도 잡고 물장구도 치며 놀았다”며 그 당시 풍경을 전했다.
나주 압해 정씨는 가족 간의 우애가 깊었는데 제사 때면 모두 큰집에 모여서 시간을 맞춰 제사를 지내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또한 정월이면 식구들이 모두 모여 윷놀이를 하며 화합을 다지기도 했다.
능곡 일대는 기차역이 생기면서 교통이 발달했던 곳이다. 그러나 기차가 하루에 1∼2회 정도 밖에 운행하지 않아 이용에 어려움이 많았다.
정영훈 나주 압해 정씨 월헌공파 종회 총무이사는 “서울에 있는 학교 통학을 위해서는 기차를 이용해야 하는데 기차 시간을 잘못 맞추면 뛰어가서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거나 기차를 놓치면 학교를 못 가는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1988년 도시화로 묘역 이장
6·25가 발발하면서 서울에 있는 대신 중·고등학교가 능곡으로 옮겨왔다. 그러면서 자리를 잡은 곳이 지금의 능곡 중·고교 부지다. 당시 이 땅은 나주 압해 정씨의 땅이었기 때문에 종중에서 땅을 임대해 학교를 지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이 수복되고 대신 중·고등학교가 돌아가자 종중에서는 이 땅의 활용방안에 대해서 논의를 했다. 종중에서는 대신 중·고교는 다시 서울로 돌아갔지만 지역 발전과 지역의 인재 양성을 위해서 계속 학교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능곡중학교가 문을 열었고 지역의 인재 양성을 위한 요람으로 성장해왔다.
능곡과 행신동 일대가 도시화계획사업으로 개발되자 이 일대에 안장돼 있던 선조들의 묘소 19위가 용인으로 이장됐다. 1988년 용인으로 이장되기 전까지 능곡중학교 학생들은 나주 압해 정씨의 시제 때면 묘소를 찾아 학교 발전을 위한 나주 압해 정씨 선조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나주 압해 정씨 월헌공파 종회는 지금도 능곡고등학교에 매년 장학금을 전달한다. 이 장학금은 학교의 추천을 받아 1인당 50만원씩 두 명의 학생에게 수여된다.
나주 압해 정씨는 물론 이 지역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정해붕 어른을 기억한다. 학자적 풍모를 갖춘 정해붕 어른은 집안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민들에게도 늘 예의범절을 강조하던 엄한 분이었다.
정해붕 어른은 청렴하고 강직한 심성을 갖춘 분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지도면장을 지낼 때도 당시 경찰서장이 “면장이 인사를 오지 않는다”라고 말하자 지도 면장을 그만둘 정도였다. 또한 사법서사를 지낼 때는 꼭 한복을 고집하며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자존심도 높았던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국보급 공작문 흉배 출토

조상들의 묘역이 훼손되는 것은 물론이고 정든 고향이 정취를 잃어버리는 것 또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나주 압해 정씨 월헌공파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도시 개발이 진행되자 나주 압해 정씨는 선조들의 묘역을 용인으로 이장하기로 한다. 그러나 능곡 일대에 안장된 선조들의 묘소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유물들이 쏟아져 주변을 놀라게 했다.
당시 이장을 주관했던 정규원 월헌공파 대종회 부회장은 “월헌공의 손자인 충정공의 묘소에서 국보급인 공작문 흉배가 출토됐다. 당시 이장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정 부회장에 따르면 이 흉배는 금석으로 제작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보기 드문 양식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충정공 묘소에서 출토된 복식물은 고복식 연구에 있어 중요한 역사자료로 인정되고 있다.
현재 이 흉배는 종중에서 기증해 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또한 당시 이장 과정에서는 흉배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의복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월헌공의 아들과 손자인 공안공과 충정공의 신도비는 현재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장학사업 통해 인재 양성 주력
수 백년을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능곡이 도시화로 개발되고 선조들의 묘소마저 이장한 뒤 나주 압해 정씨 월헌공파는 인재 양성과 가문에 대한 연구에 집중한다.
정규원 월헌공파 대종회 부회장은 “1990년대부터 종중 장학사업을 펼치고 있다. 또한 나주 압해 정씨인 다산 정약용 선생을 연구하기 위한 다산학술문화재단을 만들고 꾸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주 압해 정씨는 다산 초당이 위치하고 있는 남양주에서는 매년 정약용 선생에 대한 문화제를 열기도 한다. 선조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후손들의 발전을 위해 노력이 종중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필수 요소라는 것이 나주 압해 정씨의 마음인 것이다.
선조들의 묘소가 이장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던 나주 압해 정씨는 이제 일부만이 능곡 일대에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정영훈 나주 압해 정씨 월헌공파 종회 총무이사는 능곡에 올 때면 옛 추억을 떠올리며 능곡을 한 바퀴 돌아본다고 한다. 정 총무이사는 “이 곳 저 곳을 둘러보지만 올 때마다 이제는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변해버린 고향의 모습이 좀 섭섭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