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는 친구를 위한 모임이 있었다. 조건이 괜찮은 국책 연구소에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친구였다. 조국을 떠나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았고, 그래서 의아함은 더했다. 알려진 이유로는 아이들 교육문제 때문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흔히들 말하듯이 “교육이민이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친구의 일성은 지금도 잊어지지 않고 있다. “어디 애들 교육문제 때문 만이겠는가, 이 나라가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것 같아 떠나는 것이네”. 캐나다에 가서 막노동을 하면서 살아도 이곳보다는 사는 것이 사는 것 같다는 말이다.

뉴스에서 유아 토막살인 같은 괴이한 사건을 접할 때, 출퇴근길에 일어나는 살벌한 교통문화를 체험할 때,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는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다리 위를 지나갈 때, 차가 오거나말거나 차길에서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식당에서 술 취해 고성을 지르는 사람들이나 막무가내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당연시하는 부모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의 질이 어느 정도이고, 과연 이곳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삶인지에 대해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에서 지극히 당연하게 벌어지는 저 일상의 사건들을 어떤 식으로 감내해야 하는지 답답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애써 모른척해도 가끔씩 솟구쳐 오르는 좌절과 분노는 우리를 이 나라에서 떠나도록 충동질하지 않는가. 캐나다로 이민간 그 친구는 이 땅의 저 문화를 이겨내지(?) 못한 패배자이고, 그래도 여전히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우리는 그것의 승리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한국이 OECD에 가입해서 이제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자축했을 때, 선진국 사람들이 이 땅의 문화를 체험하고는 어떻게 말할 것인지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참으로 희한한 나라라는 것이다. 성수대교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나라, 검찰총장 위해 법무부장관을 바꾸는 나라, 아는 사람이 있으면 불법도 정당화되는 나라, 돈과 향응이 판을 치는 나라, “죄송합니다”와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인색한 나라는 국민소득이 아무리 높다해도 진정한 선진국일 수 없다. 외국계 회사의 한 한국인 직원이 “이 땅에서 왕처럼 살고 있소이다”라는 이메일이 가져온 소동이 결코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이 사회는 지금 감성만이 팽배해 있다. 지연, 혈연, 학연 등과 같이 우리 사회의 지배구조를 점령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감성의 산물이다. 인연은 감성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가 선진화되기 위해서는 보다 철저하게 합리화되어야 한다. 정부의 개혁도 합리적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인사도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사회문화도 이성의 기반 위해서 정립되어야 한다. 이성은 곧 질서이고, 질서는 또한 예의를 잉태하고 있다. 그래서 질서와 예의는 사회의 핵심이다. 그것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인 셈이다.

이런 것을 도외시한 채, 사회를 인터넷으로 포장한 들 그게 어디 선진사회인가. 인터넷 선진화는 한참 뒤의 일이다. 가진 자나 없는 자나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생활하는 것이 애국하는 일이고, 그것이 이 땅이 싫어 떠나는 우리 동포를 다시 껴안는 일이며, 삼천리 금수강산에 사람이 살도록 하게 하는 일이다.

어느 승강기에서 우연히 본 글이 생각난다. “소인은 자신에게 너그럽고 타인에게 인색하지만, 대인은 자신에게 인색하고 타인에게 관대하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속하는가.

<한양대 교수·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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