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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조국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참군인제5회 자랑스러운 고양인에 선정된 장흥 장군
  • 이병우 기자
  • 승인 2010.10.31 08:51
  • 호수 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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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중국 망명생활 일본군과 싸워…초대 헌병사령관   
해방 후 김구 심복이라는 이유로 군에서 한직 맡기도

   
▲ 해방후 40대 후반경의 우석 장흥 장군

제1회 최영장군, 제2회 추강 남효온, 제3회 석주 권필, 제4회 약곡 이가순. 2006년부터 제정된 ‘고양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선정된 사람들이다. 고양시 씨족협회는 올해 제5회를 맞이하는 자랑스러운 고양인 선정 작업에 우석 장흥 장군(1903∼1983)으로 뜻을 모았다.

장흥 장군은 일반인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고양군 원당면 성사리 205번지에서 태어난 장흥 장군은 평생동안 참군인의 모습을 보였다. 장흥 장군은 일제치하 시절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군부의 헌병대 요직에 있으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 한국인이면서 일본군 소속의 군인을 유인해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 일을 한 애국지사다. 또한 임시정부 요원과 이들의 생계와 보호를 책임지는 역할도 도맡아 했다. 귀국 후에는 초대 헌병사령관으로서 모범적인 군생활을 했지만 백범 김구의 심복이였기에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좌천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 생애를 통해 곧은 성품으로 군생활을 마친 참군인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고양시 씨족협의회 이영찬 회장은 “장흥 장군의 자료를 수집하는데 있어 조카인 장석주 선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비교적 늦게 결혼을 한 장흥 장군의 자제보다 조카인 장석주 선생이 유년시절부터 장흥 선생의 심부름을 하는 등 곁을 보좌하며 장흥 장군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장흥 장군은 시류에 동조해 입신양명을 추구하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며 “해방전이나 해방 후에도 출세보다는 맡은바 소임을 다하는 굳고 바른 군인”이었다고 한다.

원당면 성사리에서 태어난 장흥 장군은 서당의 훈장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해 15세 무렵에는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했다고 한다. 10대 후반 조국이 일제치하에 놓이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 무려 27년 동안 중국에서 활동한다. 애국청년단, 의열단, 황포군관학교 등을 거쳐 중국 군부의 중요한 헌병대 요직에 정예 장교로 근무하기도 했다. 한국 국적의 일본군 병사를 유인해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임시정부에 군관련 정보를 전달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상해에서 전후 사태르 수습하는 선무단장으로서 교포 수송, 치안 유지, 일본군 무장 해제 등 어려운 일을 끝까지 마치기도 했다.

   
▲ 신혼시절 김순경 여사와 함께 한 장흥 장군

귀국후에는 건국을 위하여 대동청년단체에서 훈련소장으로 수천명의 청년 육성과 국군창설의 주역으로 초대 헌병사령관과 제6사단장 등을 지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권 이하의 군요직은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장악했고 백범 김구의 심복이었던 장흥 장군은 한직으로 밀려났다. 장흥 장군은 부대 하급자가 고위직에 승진해도 전혀 동요하는 빛 없이 맡은 임무를 꿋꿋하게 수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역 후에는 장흥 장군은 원호위원장으로 22만의 원호대상장의 예우, 지위 향상 등  기초법규 제정, 정리, 시행하게 되었다. 노년에 들어서는 선조의 계보로부터 현 자손까지 족보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1983년 2월 6일 생애를 마쳤다.

지난 15일에는 우석 장흥 장군에 대한 업적발표회를 고양시 문예회관에서 가졌다. 이날 장흥 장군의 부인인 김순경 여사에 대해 고양시 씨족협회는 송공패를 증정했다. 이날 발표회에는 장남 장석위, 조카 장석주 선생 등이 참여했다.

이병우 기자 woo@mygoyang.com    
   
 


 

이병우 기자  woo@mygo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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