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전 군헬기장 터 닦다 발견돼
덕양구 효자동에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태묘가 있었다. 태묘는 왕실에서 산모가 태아를 출산하고 난 후에 나오는 태반을 묻는 장소를 말한다. 태묘는 태실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의 왕족들은 우리 선조들은 태의 자리가 다음 아기의 잉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전국 각처의 명당에 태묘를 정하고 태반을 묻었다.
덕양구 효자동에서도 이 태묘가 약 32년 전인 1978년 무렵에 우연히 발견됐다. 당시 군부대가 이곳을 헬기 착륙장으로 쓰기 위해 터를 닦던 중 석실이 발견되었고 이를 기이하게 여긴 군부대는 석실을 걷어내보니 항아리가 나왔다. 이 항아리가 바로 태반을 담은 항아리였다. 고양시 정동일 문화재 연구사는 “태반을 담은 항아리는 현재 문화재청이 관리하고 있는 궁중유물전시관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며 “항아리를 보호하는 태실함이 부실하기 짝이 없어 문화재 보존차원에서 문화재청이 따로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주민들에 의하면 태반을 담은 항아리는 따로 보관되고 있지만 항아리를 보호하던 석실(태실함)이 도난당했다고 전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한 주민은 “당시 연대장이 태반을 담은 박물관에 기증을 했지만 그 전후에 석실을 누가 이미 가져가 버린 상태”였다고 전한다.
마을 주민들은 석실이 도난당하자 태를 묻은 장소를 표하는 태비마저 도난당할까봐 마음을 졸이다가 태비를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 군 헬기 착륙장에 있던 태비를 함께 가지고 내려와 지금은 효자동 외딴곳 모처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 태비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높이 112cm, 폭 31cm, 두께 9cm의 비다. 아무런 장식은 없는 평범한 비로 보일 수 있지만 비 후면에는 ‘成化三十年六月十五日(성화삼십년유월십오일)’이라고 새겨져 있고 비 전면에는 ‘王女胎室(왕녀태실)’이라고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정후수 한성대 교수는 “성화 30년이면 1477년으로 성종 8년에 해당되며 이 비는 성종의 딸 중 한 명의 태비일 것”이라고 말했다. 성종은 12명의 부인으로부터 16남 12녀의 자녀를 얻어냈다. 따라서 효자동에서 발견된 이 태비에 새겨진 글귀는 성종의 딸 12명 중의 한명의 태비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 태비가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은 원래 태비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동일 문화재 연구사는 “일제강점기에 새로 조성한 서삼릉 내의 태묘와 다르게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그간직하고 있어 보존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