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세중의 문화단상>
이 세상에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남의 입장이 되어 보거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볼 일이다. 그것이 만물의 영장 진정 사람이 할 몫이다. 그것이 문화를 향유 할 수 있는 사람의 할 일이다.
내가 너를, 네가 나를 이해해 주는 일은 화해와 평화의 첫 걸음이다. 싸울 일이 없다. 그런데 거기에는 세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그 뜻이 이루어지기에 쉽지 않다. 첫째는 나를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군지, 무얼 원하는지, 왜 그러는지, 자신의 입장이 뚜렷해야 한다. 둘째는 상대방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누군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왜 그러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셋째는 나를 알고 상대방을 알면 둘이 하나 되어 즉 뒤바꾸어 보게 되면 견줄 일이 없어진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 않으면서도 내 생각만 더 크게 보여 상대방이 안보이거나 얕잡아보기 쉽기 때문에 문제다. 앞으로 나가는데 부딪히지 말고 멈추어 뒤돌아서서 자리를 바꾸어 본다. 입장을 바꿔보면 모든 난관이 극복된다.
뻔하고 뻔 한 일인데 상대방에게 책잡히고 상대방이 자기처럼이 아니라 혹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나하고 믿으려 하지 않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그 상대방이 일본이라 치자. 일본은 우리와 제일 가깝고 역사가 생긴 이래 문화, 역사, 종교, 환경 등 모든 면에서 유사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때론 치고받으며 살아온 이웃나라다. 생각해보면 섬나라 여건으로 항상 대륙으로 진출하려고 하는 본능적 접근으로 모든 문화 전반의 문명적 이기(利己)를 전수 받으려는 의식으로 충천해 있다. 그들은 현해탄을 넘어 아침 해가 밝은 땅 조선을 엄마처럼 품에 안기려는 본능적 욕구가 극도로 팽창되어 때론 귀소본능이 드러나 본래의 것을 소유하려는 잠재의식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호시탐탐 침략의 칼을 들이대고 대상으로 여겨 급기야는 36년 간 우리나라를 빼앗기도 하였다.
그와는 반대로 전환기의 근대 조선의 지식인들은 지금의 미국처럼 일본으로 건너가 서구 문물을 나르며 마치 일본이 지상 천국인양 그들은 엄청난 근대 문명의 영향을 우리에게 가져왔고 한편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내선 일체의 정략에 동조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런 일본의 동북부가 세계 지진 역사상 최악의 9도 지진으로 매몰되고 쓰나미 해일에 덮쳐 생지옥을 만들더니 예상대로 원전 폭발로 인한 방사능 오염이 극심해져서 그곳으로부터 250km가 떨어진 수도 동경까지도 피폭되고 있는 등 경악을 금치 못 할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지난 11일이었으니 보름 전 일이었는데 지금도 하루 종일 지진의 후유증과 피폭 사태에 초죽음이 되어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아픔을 견디며 절망의 나날을 지새우는 일본인들을 본다. 그런 비극적 사태에서 우리를 보고 내 가정을 뒤돌아보고 나를 다시 보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수없는 지진 공포에 시달려온 일본인들 그러나 세계인들이 모두 놀랠 정도로 침착하게 질서를 지키고 있다. 거리는 조용하고 시가지는 반 이상이 전기가 나가 어둡고 특히 무엇보다도 물이 오염되어 맘대로 사용 할 수 없는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침착성에 전율을 느낀다. 생각해보자. 눈 깜짝 할 사이에 집이 날아가고 ‘악’하는 사이에 가족을 잃어버리고 어디가 어딘지 구별할 수 없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수십 년을 살아온 정든 집, 땅, 이웃들이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먹을 것도 덮을 것도 아는 척 할 사람도 없이 전기가 나간 추운 땅바닥에 누웠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차라리 소리치고 발버둥치고 까무러치고 터져라 외쳐대며 눈물을 쏟아내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다.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극도의 체념도 어느 경지를 벗어나면 모든 오감의 기능이 마비된다. 절망이라는 말을 할 땐 이미 희망이 있지만 절망조차하지 못하는 그들의 입장을 뒤바꿔 생각해보니 내가 당한 것처럼 왈칵 눈물이 난다.
상대방을 나와 뒤바꿔 생각해보는 까닭은 우리도 자연의 재앙이 덮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무세중 / 전위예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