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구 용두동 ‘창릉천 돌다리’를 아시나요

우리가 살고 있는 고양에는 여러 유형의 다리가 있다. 그 중 창릉천 돌다리는 고양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돌다리이다. 이 다리는 현재 그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풍스럽고 견고하며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 우리의 정서와 잘 어울리는 듯하다.
안재성 향토문화보존회 회장은 “삼각산 덕수리에서 발원한 덕수천과 서오릉의 창릉에서 발원한 물줄기, 명릉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합수되고, 그 천이 흐르고 흘러 덕수천과 합쳐지면서 큰물줄기를 이뤄 강매동 강고산 마을을 거쳐 행주산성을 휘감으며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을 일러 창릉천이라 부른다”며, 창릉천의 옛 이름은 덕수천이었으나 후에 서오릉 안에 있는 조선왕조 제8대 예종의 능인 창릉이 있는 곳에서 발원 하였다고 하여 창릉천이라 부른다고 전했다.
살며시 처진 곡선 모양의 26개 디딤돌이 엇갈림 방식으로
창릉천 돌다리는 약 30m 강폭에 현재는 26개가 놓여있다. 직사각형 모양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디딤돌은 조금씩 크기가 다른데 가로 약 120cm, 세로 약 80cm 가량으로, 석산에서 채석한 흔적을 그대로 유지한 채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 돌 겉면에는 군데군데 길게 파인 홈과 구멍이 보인다. 이것들은 원석을 분해하고 자르기 위한 수단의 흔적으로 보인다. 물 밖으로 나와 있는 돌의 높이는 50cm 정도이고, 돌다리 중간부분부터는 강 밑쪽으로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살짝 처지는 곡선을 주어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 물 흐름까지 원활히 할 수 있는 공법을 사용하였다. 각각의 디딤돌은 직사각형의 원석을 이용, 서로 엇갈림 방식을 사용하였으며, 35cm 가량의 간격을 띄고 놓여있다.

돌다리 위와 아래, 폭이 30m 가량의 강 밑바닥에는 크고 작은 수백 개의 기초 박석(薄石)을 깔아서 강물의 흐름을 조절하였으며, 폭우나 홍수에도 유실 없이 잘 보존되도록 하였다. 큰 강돌을 이용하여 빈틈없이 깔려있는 박석은 서로 엇갈리게 쐐기를 박는 형식을 취함으로서 오랜 세월에도 변함이 없게 시공하였다. 돌다리 상단부에 있는 기초 박석은 비교적 평평하게 깔려있고, 돌다리 하단부부터는 각도를 점점 낮추어 물의 흐름을 원활히 하는 공법으로 시공되었다.
돌다리를 사이에 두고 강 위아래 양옆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20~30여 개에 달하는 소나무기둥 흔적이 있다. 강 위쪽의 소나무 기둥과 아래쪽의 너비는 약 5m 40cm 가량으로, 한때 돌다리 위로 나무다리가 설치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안재성 회장은 “이 기둥은 많은 사람들의 이동이나 화물운송이 있을 때 임시로 가교를 설치할 때 사용되었거나, 또 돌다리가 원형대로 보존될 수 있게 하천의 범람과 홍수에 대비 보강 보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돌다리 주변에 서오릉과 궁말, 서삼릉이 자리해
창릉천 돌다리 주변에는 이 다리의 용도를 떠올리게 하는 곳들이 있다. 약 2㎞ 지점에는 서오릉이, 창릉천 돌다리를 건너 1km 정도를 가면 고양행궁 터로 추정되는 궁말(궁촌), 약 4㎞ 떨어진 곳에는 서삼릉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서오릉과 서삼릉은 조선왕조 왕들의 능역이다. 창릉천 돌다리는 이 두 개의 능 사이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 왕이 능행을 나와서 도착했음을 고하는 알릉례(謁陵禮)와 능을 떠날 때 사릉례(謝陵禮)를 올린 뒤, 잠시쉬어가거나 유숙을 했다는 고양행궁이 창릉천 돌다리 약1㎞ 전방에 있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영조 36년(1760) 1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조정과 내외의 신하에 관련된 일기인 일성록, 정조 3년(1779)부터 고종(高宗) 20(1883)까지 105년간의 일기인 내각일력 등을 참고하면 고양행궁은 조선 후기 영조, 정조, 헌종, 순조, 철종, 고종 등의 왕들이 무려 40~50회를 이용한 기록이 보이는 아주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고양행궁 터로 전해져 내려오는 궁말
1755년 발간된 ‘고양군지’에는 현재의 원흥동이 원당면 목희리(木稀里)로 표기되었으며 송현촌(솔개), 극촌(가시골), 궁촌(궁말)마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92년 고양시 승격으로 원흥동이 된 이후 고양시 덕양구에 속하게 되었다. 191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50,000/1지도에는 궁촌이라는 지명이 정확히 표기되어있다.
궁촌 즉, 궁말은 원당에서 서오릉 방면으로 가다가 창릉천 건너기전 오른편 우측에 있는 마을을 가리켜 부르는 곳으로 1991년 발간된 ‘고양군 지명유래집’에 다음과 같은 지명유래가 전한다. ‘옛날 이곳에 궁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즉 쉰고개 우측 배나무 밭이 예전 궁이 있던 곳이라 하는데 지금도 이곳에는 기왓장과 자기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곳은 서오릉에 인사를 드리러 온 임금이 잠시 머물던 별궁이라 한다. 또 다른 유래로는 능모탱이 또는 능머리로 불리는 곳이 있는데 서오릉에서 바라다볼 때 이곳의 모양이 능의 머리맡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하고, 또 다른 지명은 원당리 효릉으로 통하는 곳이라 하여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보다 정밀한 학술조사와 애정 어린 관심 필요
창릉천 돌다리는 언제 놓인 것인지, 소나무 기둥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하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조심스럽게 상상해 본다. 조선 왕들의 숨결이 깃든 서오릉을 지나 창릉천 돌다리 위에 놓인 나무다리를 말 타고 위풍당당하게 행차했을 왕과 그를 따르는 신하들. 그 모습을 보려고 모여든 수많은 백성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예부터 다리는 사람들이 생활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창릉천 돌다리는 우리 선조들이 이용했던 다리라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소중하다. 하물며 왕이 능행을 위해 건넜던 다리라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그런 창릉천 돌다리가 여기 저기 나뒹굴고 있는 쓰레기 속에 쓸쓸히 방치되어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우리가 사는 곳 가까이에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선조들의 아름다운 흔적이 있다면 이는 돌보아야 마땅하다. 보다 정밀한 학술조사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고양사람들의 관심, 애정 어린 손길이 기다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