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세중의 문화단상>
어느 독자의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이번 단상을 대신한다. 전위 예술가에 성(姓)씨가 무(巫)씨며 단상의 내용들은 우리 문화 원류에 대한 것들이 서로 연관되어질 것 같지 않다는 의문이다. 나 역시 스스로를 밝히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살아온 과정을 애써 밝힌다면 1937년 정축(丁丑)생으로 서울 중구가 고향이며 우여 곡절 끝에 10여년이 넘게 고양 지축동 북한산 자락에 거처를 두고 매달 음력 보름마다 한뫼 삼신제를 열어 왔으니 100여 회 넘게 한 셈이고, 50년간 작품 활동에서 500여 회 이상의 공연 활동을 해온 이를테면 한국 연극협회가 주관하는 모든 행사에 원로 연극인으로서 그리고 무교학회 고문, 단군학회 회원, 전 한민족 아리랑 협회 이사장, 통일 문화재단 회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고양에 거주하면서부터 이은만 선생을 만나 그분과 화통하여 10월 3일 <한뫼 개천제>를 호수 공원 하늘 마당에서 열었고, <송강 문화제>, <공양왕능제>를 주관하였으며, 최초로 <금정굴 양민학살 희생자 위령제>를 그리고 <북한산 축제>를 통해 고양 문화에 앞장서 왔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렇다면 그런 일들과 전위 예술하고는 어떤 연관성이 있나가 궁금할 것이다.
필자는 유학자 집안의 9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서울고를 나와 성균관 대학교에 들어가야 했고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하고 싶었던 우리 문화 예술의 뿌리를 찾아 중앙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와 연극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대는 민족의 얼과 넋이 깃들어져 있는 민족 예술의 시원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하고 그곳에서 민족극의 원천과 우리들의 몸짓과 춤사위를 발견하고 기록했으며 1969년 서울 YWCA 강당에서 <韓國 民俗 假面舞劇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가진 바 있다. 또한 민속극회 <남사당>과 동아시아 민속을 연구하기 위해 <동아 민속예술원>을 설립하였고 새로운 민예 부흥에 앞장섰다. 1977년 명동 국립 극장에서 무세중 창작 발표회 <전통과의 충돌>은 현대속의 민속을 창조하려는 진보 정신의 새로운 출발이었지만 당시 예술 풍토에서 사람들은 나를 너무 앞서가거나 이상주의자로 여겼고 군사 독재 체제에서의 공연 감시와 간섭으로 자의반 타의반 독일로 건너갔다. 독일 순회강연과 공연 후에는 베를린에 정착해서 내 자신의 이름을 딴 극단 테아트로무(TEATRO MU)와 극장을 만들고 20여명의 독일 프랑스 폴란드 단원들을 이끌며 공연을 하였다.
전통 예술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어떻게 전통의 바탕위에 새로운 미래 지향적인 것을 세우기 위하여 현실을 똑바로 보고 앞을 개척해야 했다. 광산(光山) 김씨 사계(沙溪) 김장생의 자손이요 유학 집안의 틀을 벗어나 민족을 우선해야 했고 민족에 앞서 인류 보편적 인본주의를 의식하여 나의 주체 개념을 황금의 금(金)보다는 원류가 되는 무(巫)를 선택한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의 인간의 도리라는 무(巫)의 개념은 무당무자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사상으로서 홍익(경천敬天.숭조崇祖. 애인愛人)철학으로 하늘을 우러러 돕고 뿌리 조상을 섬기며 사람이 그중 으뜸이라 서로 끊어질 수 없는 원리를 터득하고 서로 구슬리고 어울리고 다스려야 한다는 巫의 뜻을 깨달아 의식한 것이다.
무세중/전위예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