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고양의 어원을 조선왕조 실록에서 찾아봤다. 태종 13년(1413년·계사년) 3월 23일(임인) 2번째 기사에서 고봉현을 고쳐 고양현으로 하였다고 되어있다. 또한 고봉속현 행주(幸州)사람이 상서(上書)했다. 현재의 고양의 명칭은 고봉의 高(고)자와 덕양의 陽(양)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고봉산은 고양의 주산이며, 또한 고양팔경 중의 하나이다.

신도시의 명칭인 일산을 처음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송포면 덕이리(현재 덕이동) 한산마을의 한메(한뫼)가 변경된 것이라고 한다. 일산의 옛 이름은 와동(瓦洞) 또는 와야촌이었으나 후곡 후동을 합해 일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봉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그 옛날 삼국의 대립기에는 민족의 번영과 영토 확장을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이던 곳으로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주변일대를 잘 조명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 산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설화가 전해오는 곳으로 한씨 미녀가 봉화를 밝혔다는 산이다.

고봉산은 봉우리가 계단을 설치한 것처럼 평평하게 이루어졌으며 정상에서 중턱 아래의 펑퍼짐하게 전개되는 띠를 두른 듯한 평지가 봉우리 전체를 감싸고 있어 ‘띠 둘레산’ 대위산 혹은 대산이라고 부르는데, 발음상으로는 ‘테미산’, ‘템산’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띠산 아래에는 장군총(將軍塚)이 있는데 주민들은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1755년 고양군지) 전해진다.

중산은 옛 일산 6리 입구 쪽에 있던 자연마을로 이 마을을 지나 도당산 쪽으로 올라가면 안악골이 나오는데 주민의 안녕과 평온을 기원하던 도당제가 이어져 오던 유서 깊은 곳이 있다.

중산이라 부르게 된 유래를 살펴보면 우선 중산은 고봉산을 중심으로 볼 때 마을의 위치가 마을의 중심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고봉산의 성석동쪽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고양팔현 이신 모당 홍이상 선생의 묘소가 있고, 중산마을에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천명도설을 저술하신 추만 정지운 선생의 묘소가 있다. 중산 마을은 일산 신도시 건설과정에서 생겨난 마을로 고봉산 중심인 중산의 흙을 파서 일산 신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양의 전래 설화중 고봉산 한씨미녀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 옛날 삼국이 대치하고 있을 때 한강유역의 고양시(당시 계백현)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삼국은 서로 한강유역을 차지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빼앗긴 계백현을 다시 찾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보고 있던 고구려,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만반의 수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백제의 한 고을에 한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미색이 출중한 ‘주’라는 딸이 있었다.

화창한 봄날 산책을 나온 한주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고 바라만 보고 있던 청년은 용기를 내어 ‘낭자’하고 불렀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한주는 준수한 풍모와 늠름한 자세에서 풍기는 청년의 위엄에 한순간 압도되고 말았다. “낭자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무례함을 무릅쓰고 낭자 앞에 나섰습니다. 말씀드릴 기회를 주십시요.”

한주는 당황하고 망설였으나 그 청년을 쫓아갔다. 청년은 사랑을 고백하면서 신분을 밝혔다. 그는 고구려의 태자로 백제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기 위해 몰래 잠입해 정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의 만남은 사랑으로 이어졌고, 임무를 마친 태자는 “고구려로 돌아가는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을 정복하고 낭자를 아내로 맞이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고구려로 돌아갔다. 태자는 얼마 후 고구려의 임금이 되었다. 바로 그가 안장왕이었던 것이다.

안장왕은 한주에게 약속한 대로 여러 차례 군사를 동원해 백제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백제의 태수는 미녀로 소문난 한주에게 사람을 보내 청혼하기에 이르렀다. 한주는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며 청혼을 거절했다. 이에 태수는 한주를 붙잡아 들이고는 장래를 약속한자가 누구냐고 캐묻고, 이에 한주가 대답을 하지 않자, 적의 첩자와 내통하고 장래를 약속한 것이 틀림없다며, 한주를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낙심해 큰 상을 걸고 계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구해 오도록 했다. 이에 을밀은 고봉현(계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구해올 터이니 안학공주와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안장왕은 공주와의 결혼을 허락하고, 을밀은 용감한 병사들과 함께 무객으로 변장한 채 계백현에 잠입했다.

한편 옥에 갇혀 있던 한주는 일편 단심가를 지어 불렀다. 그러나 태수는 한주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청혼을 했다. 한주가 이를 완강히 거절하자 태수는 분노하여 한주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바로 이때 무객으로 가장한 채 잠입해 들어온 을밀이 백제군을 몰아내고 한주를 구하고 고구려의 대군과 함께 국경에 주둔하고 있던 안장왕은 소식을 들고는 한시바삐 한주를 만나고자 했다.

이때 한주도 안장왕을 빨리 만나고 싶은 심정에 높은 산에 올라 봉화를 밝혔으니, 이 산이 바로 고봉산이다. 이렇게 안장왕과 한주는 만나게 되었고, 한주를 구출한 을밀은 안학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이 설화는 춘향전보다 1천년 앞선 국경을 초월한 고구려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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