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대표적인 관광지라면 당연 행주산성을 으뜸으로 꼽을 것이다. 김포공항을 통해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랑신부가 공항 가는 길에 여유시간을 이용해 잠깐 들렀다 가는 곳이기도 하다. 그 이전 조선시대에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신이 왔을 때 유람배를 띄우고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종착지이기도 했다. 여기에 볼만한 곳으로, 행주산성 정상에 있는 ‘행주대첩비’가 있다.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꽤나 알려진 사실이고, 산성 일대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지 오래되었다. 또한 이 행주산성은 행주치마와 함께 권율 장군이 대첩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전적지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행주산성이 이 정도 밖에 안될까. 좀 더 눈을 넓혀보자. 산성에 올라가면 사방으로 탁 트인 전망이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좌측 동쪽으로는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이번에는 시선을 약간 오른쪽으로 돌려 남쪽을 바라보자. 발길 아래 한강이 도도하게 흐른다. 누구든지 이 한강을 내려다보노라면 세파의 근심과 번거로움은 깨끗이 씻어버리게 될 것이다. 다시 안목을 반대쪽에서 출발해보자. 행주산성 건너편은 현재 서울시 양천구이다. 조선시대에는 양천현이었다. 1740년 이곳 양천 현감을 지냈던 화가 겸재 정선은 한강 너머로 보이는 행주산성을 바라보면서 한 폭의 그림을 남겨놓았다. 그것이 유명한 ‘행주에서 고기잡이를 보며(杏湖觀漁)’이다. 곁들어 시도 한 수.
‘늦봄엔 복어, 초여름엔 숭어가 제격. 복사꽃은 물 따라 밀려오고 행주 바깥에 그물을 놓는다’
고 했다. 그런데 그 그림을 가만히 살펴보니 기와집에 여러 채 보인다. 산골짝이 가운데 자리 잡은 집도 있고, 좌측 낭떠러지 절벽에 간신히 걸쳐있는 작은 집도 보인다. 가운데 ‘ㄷ’자 모양으로 된 집은 아마도 꽤나 행세하는 고관의 집으로 보이는데, 좌측의 작은 집은 그 위치로 보나 규모로 보나 사람이 거주하는 곳으로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정자인 듯싶다. 아하, 행주산성에도 정자가 있었구나. 내친김에 산성에 있던 정자가 얼마나 되며, 그 정자와 관련된 시문이나 이야기가 남아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름 있는 정자만 최소한 8개로 짐작된다. 낙건정(樂健亭) 귀락당(歸樂堂) 범허정(泛虛亭) 권가정(權稼亭) 육괴정(六槐亭) 휴휴정(休休亭) 유사정(流沙亭) 소쇄루(瀟灑樓)가 그것이다. 이른바 ‘행주팔경’이란 것이 여기를 중심으로 한 말인가 보다.
정자가 있으면 대개의 경우, 아니 반드시, 정자의 이름인 편액을 가로로 혹은 세로로 다는 법이다. 그리고 그 정자를 세우게 된 내력을 적은 記文을 나무판에 새겨 달아 놓는다. 그뿐 아니다. 그 정자에 왔다간 기념이나 정자에 관련된 詩文을 함께 남겨놓는 게 우리 선조님네들 문화의 관습이다. 지금은 과거의 그 정자 자체가 없어졌으므로 현판과 기문 등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실물은 없어졌으나 다행히 그 정자를 읊은 시문이 남아있어 당시 시인 묵객들이 행주에서 읊은 문예적·예술적 흥취를 찾아볼 수 있다. 뒤져본 결과 최소한 100여 수의 시가 남아있다. 그 시인의 이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시인이 대부분이다.
행주 기씨로서 퇴계와 학문을 논했던 고봉 기대승, 간이 최립, 택당 이식, 농암 김창협, 복재 기준 등등이 바로 그분들이다.
정자를 복원해서 현판을 걸고, 중수기와 시문을 걸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싯구절을 따다가 기둥에 주련까지 달아놓으면 훌륭한 정자 문화가 탄생될 것 같다.
권율 장군의 문인기질과 정자에 내재된 문인정신이 어우러지는 행주산성. 이만한 관광자원이 이미 우리에겐 있었다.
- 기자명 정후수/한성대 교수
- 입력 2012.05.28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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