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역사 문화이야기
자랑스런 고양인 추강 남효온 선생(1454~1492)은 조선 단종 때 문신으로 김종직의 문인이며, 김굉필, 정여창등과 함께 수학했다. 영의정 남재의 5대손으로 생원 남전의 아들이다. 그는 늘 행주에서 기거하며 시류에 항거하는 시와 작품을 남겼는데 대표저서로는 육신전이 있고, 친우 50명의 언행과 일화 등을 담은 추강냉화와 문집으로는 추강집이 있다.
매죽헌 성삼문, 취금헌 박팽년, 연풍 하위지, 백옥헌 이개, 벽량 유응부, 낭간 유성원 선생을 가리켜 역사는 사육신이라 적고 있다. 추강 남효온 선생이 단종을 위해 사절한 육인의 충절을 담아 저술한 사육신전기는 추강선생문집8권에 수록돼있다. 사육신의 행적을 모두 서술한 뒤 남효온은 찬을 통하여, “누가 신하가 못 되리요마는, 지극 하도다, 여섯 분의 신하됨이여! 누가 죽지 않으리요마는, 크도다, 여섯 분의 죽음이여!”라며 신하로서의 의리를 지킨 육신들의 절개를 높이 평가했다. “육신전”은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육신들의 행적을 야인(野人)의 입장에서 기록함으로써 구비전승과도 맥을 같이하는 기록물이다. 정사(正史)에서 배척된 역사적 사실과 그들의 행적을 뛰어난 문장력으로 기술한, 육신전은 역사의식과 문학성이 결합된 추강 남효온의 대작이다.
1478년 성종 9년 천재가 잇따른 데 대한 군신들의 직언을 구하자 25세의 추강은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문에서 지방 수령들의 신중한 등용과 궁중의 모리기관 내수사를 혁파할 것, 불교와 무당을 배척하여 사회를 정화할 것, 등 8개항을 진언했다. 특히 현덕왕후(단종의 모)를 모신 소릉의 복위를 주장하여 세조를 옹립한 정난공신들의 분개를 사서 한 때 국문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그 후 27세 때 모친의 뜻에 따라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과거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벼슬에도 뜻을 두지 않았다. 김시습이 그의 재능을 아껴 과거를 보도록 권유 했지만 소릉의 복위 전에는 응할 수 없다며 끝내 벼슬을 하지 않았다. 대를 이어 고양에서 농사짓고 살아 온 그는 이총, 이정은, 홍유손 등과 어울려 죽림거사(竹林居士)의 삶을 살았다. 때로는 무악에 올라 통곡하고 남포에서 낚시질을 하며 울분을 삼켰다. 추강은 풍류와 산수를 좋아하여 뜻 맞는 벗들과 행주강가에서 시작을 즐기고 틈만 나면 전국의 명승지를 답사했다.
추강 남효온 선생의 고양 땅 행주에서 지은 유시 2수를 소개한다.
登幸州城隍堂
城隍堂下落花明
鴨島南頭潮水生
繫馬叢林坐靑草
隔江聞唱午鷄聲
행주 성황당에 올라
성황당 아래 떨어진 꽃잎 선연한데
압도 남쪽 언저리엔
밀물이 밀려오네
수풀에 말 매고 푸른 풀 깔고 앉아
강 너머 들려오는 닭 울음 듣노라
宿江浦遽廬
紈袴飽肉者 安知西山蕨
飛走不同穴 我獨恥干謁
畎畝尋要術 漁舟費日月
人生適意耳 何用終歲矹
강나루 주막에 묵으며
비단옷 두르고 고기반찬 배부른 자들이여
수양산 고사리 맛 그 어찌 알겠는가
날짐승과 길짐승은 보금자리 달리하듯
나만은 벼슬을 부끄럽게 여기노라
시골에 묻혀 밭고랑을 일구며
뱃전의 낚시질로 세월을 보낸다네
한세상 삶이야 뜻 대로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한평생 아등바등
지낼 것인가
사육신전을 쓴 것에 대한 핍박은 추강선생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이어져 1498년 무오사화 때는 외아들(충서)가 국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1504년 연산군모 폐비윤씨의 복위문제로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소릉 복위를 상소했던 일이 다시 논죄되어 고양에 있던 그의 묘가 파헤쳐지는 부관참시의 변을 당 해 시체는 한강나룻가에 버려지기도 했다. 1513년 추강은 좌승지에 추증되고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되어 문정의 시호를 받았다. 또한 고양 팔현으로 문봉서원에 배향 되었다. 추강 남효온 선생을 가리켜 생육신이라 하는데, 생육신은 조선 시대에,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불출로 항거하고, 절개와 충절로 시류에 맞서며 단종을 추모한 여섯 신하.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을 가리킨다.
고금의 충신이나 현인은 반듯이 훌륭한 자취를 남긴다고 한다. 선현들의 훌륭한 자취를 후세인들의 사표(師表)로서 교육의 지침으로 삶아야 할 것이다. 진정한 선비였던 추강 남효온 선생의 사상과 가르침은 고양 인의 정서순화에 크게 밑거름이 되셨고, 선생의 시심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와 고양시의 후학들은 선생의 유시를 돌에 새겨 그의 삶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행주산성 역사공원 경관 좋은 곳에 시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